•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2. 지방행정체제의 변화
  • 2) 면리제의 발전과 촌락운영질서의 변화
  • (2) 촌락운영질서의 변화

(2) 촌락운영질서의 변화

 조선 전기에는 대대적인 군현제 개편과 함께 수령권 강화 및 면리제 시행 등으로 중앙집권화가 진척되었다고 하지만, 철저한 중앙통제가 어려운 향촌사회 내의 여러 가지 조건이 아직은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면리제라고 하는 새로운 촌락운영질서를 시행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자연촌의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군현제의 정비도 아직 미비한 부분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다. 많이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향리층이 토착세력으로서 그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또한 이에 대신해서 새로운 향촌지배 질서를 구축해 나가고 있던 재지품관층, 즉 재지사족층의 중앙집권화 시책에 대한 반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향소의 치폐의 반복이 상징해 주듯이 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지향하면서도 당시의 향촌사회의 조건상, 그리고 유교적 지배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고 그들의 계층적 이해를 대변한다고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재지사족층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발호를 억제하면서도 그들을 매개로 향촌질서와 집권기반을 안정시켜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 전기 면리제 운영에 있어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국가는 권농관이나 이정 등 면리임을 가급적 재지사족층에서 선임하려 했다. ‘閑良品官廉幹者를 택해서 권농관으로 삼는’546)≪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7월 신유.다거나 ‘里正長을 有職有識者로 택차’547)≪世宗實錄≫권 2, 세종 원년 9월 정해.한다는 것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그 이외에 방별감 등의 특수직임은 호별로 돌아가면서 맡는 경우도 있었고 里正長의 직임을 사족이 기피하는 예도 있었지만,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는 면리제 운영에 있어서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재지사족들은 이와는 별도로 새로운 향촌운영질서로서 향약을 통한 지배를 실현시켜 나가고 있었다.548)朴鎭愚,<朝鮮初期 面里制와 村落支配의 强化>(≪韓國史論≫20, 서울大 國史學科, 1986), 119∼120쪽. 그들은 향약실시의 하부단위라 할 수 있는 자연촌락을 여러 개 묶은 일정영역에 대한 동약·동계의 운영을 통해 촌락민의 재생산구조를 장악하고 여기에 상하 신분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를 벌칙규정에 의해 다스림으로써 그들의 촌락지배를 관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들어와 생산력이 발전하고 상품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향촌사회내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겨났다. 임란 이후 벼농사의 발달, 18세기 이후 일반화되어 가는 稻麥二毛作 등으로 촌락단위로 강화되는 두레 등의 공동노동조직549)李泰鎭,<17·8세기 香徒組織의 分化와 두레의 발생>(≪震檀學報≫67, 1989), 25∼27쪽.은 자연촌의 자율성을 제고시킬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임란을 계기로 격화되고 있던 농민층의 국가와 재지사족의 통제로부터의 이탈현상은 상품경제의 발전, 이를 바탕으로 한 일반 서민층의 부의 축적, 잇따른 정국변화 속에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의 약화 등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대응해서 조정에서는 농민들의 안집과 그들로부터의 안정된 부세확보를 위한 새로운 향촌통제정책을 실시해 나감과 동시에, 부세정책에 있어서도 새로운 대책을 세우기에 부심하였다. 17세기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널리 실시되는 대동법, 양역의 안정된 확보를 위한 숙종대 후반의 이정법, 전세에서의 비총법, 환곡의 점차적인 부세화, 일부 부세의 금납화, 지방재정의 충당을 위한 각종 잡역의 출현과 民庫 등 새로운 수탈방식의 등장 등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부세정책의 특징으로서 주목되는 점은 부세수취의 고리대적 운영방식의 확산과 함께 부세의 안정된 확보를 위한 전제로서 부세납부가 각 리별로 공동연대책임의 경향이 급격히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양역변통절목>에서 제시된 이정법이었다.

 이정법은 閑丁收括의 기능을 촌락에 맡겨서 농민층 사이의 자체적인 규제에 의해 안정된 양역부과를 강제하는 조치로써 나온 것이었다. 이 제도는 그 이후한동안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아 영조대에 다시 신칙되기도 하였지만 후대로 갈수록 각 군현의 자율적인 운영에 의해 점차 확산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550)金俊亨, 앞의 글(1984), 95쪽. 그런데 이러한 리별 연대책임제는 양역뿐만 아니라 다른 부세의 운영에도 점차 확산되어 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정에서의 面摠·里摠, 환곡에서의 里還, 각종 잡역에서의 民庫적인 운영이나 契房·除役村의 존재 등이 그것이었다.551)김선경,<조선후기의 조세수취와 面·里운영>(≪廷世大 碩士學位論文, 1984), 53쪽.

 이러한 리별 연대책임제는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진행되었던 정부의 향촌통제책과 맞물려 나타나기 때문에 자연히 그 매개체로서 면리제의 기능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면리임의 기능도 강화될 뿐만 아니라 국가나 수령으로부터 여러 가지 침책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졌다.

 원래 면임은 군현내 官司體系의 吏卒가는 구별되며 재지세력에 의해 임용되는 임장으로 분류되는 직임이었다. 이들 면임에 대해서는 조직상의 수반인 향소가 인사권을 행사했으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수령권에 귀속되는 경향이 있었다. 아울러 면임과 동임은 「各社之官·各洞之長」 내지 「官家之輔翼·官家의 手足耳目」이라는 표현처럼 수령을 대신하는 존재이자 통치를 보좌하는 직임으로 규정되었다. 특히 향소의 직임이 官任化되어 수령의 침책을 받는 위치로 전락되고 면리제의 기능이 활성화되어 부세수취의 행정사무에 관한 일체의 업무가 면리기구를 중심으로 수행됨으로써 향소의 면리임에 대한 장악기능은 점차 취약해졌다. 반면 각종 행정업무의 주된 실무자가 군현내 6방관속이라는 점에서 면리임의 업무는 상급기관인 향소보다 수령권과 직결된 이서들과의 결합이 보다 두드러졌다.552)吳永敎, 앞의 책, 183쪽.

 수령이나 이서들의 감독이나 침책을 받는 위치로 전락한 면리임의 직임을재지사족층이 기피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였다. 숙종 원년의<오가통사목>에서는 면리임을 모두 재지사족층에서 선발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회피하는 자에 대한 처벌조항까지 마련하고 수령의 침책도 규제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지금 郡邑 가운데 鄕品은 진실로 선택하기가 어렵고 이른바 里正도 매양 庶孼과 賤類로서 차정하기 때문에 수령이 만일 골라서 정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피하기를 꾀하니, 앞으로 里正과 面尹은 반드시 모두 한 고을에서 명망이 있는 자로서 한다. 비록 일찍이 문과의 蔭職을 지낸 자라 하더라도 차임할 수 있으며, 만약 피하기를 꾀하는 자가 있으면 徒配의 律로 논한다(≪備邊司謄錄≫31책, 숙종 원년 9월 26일).

 그러나 면리임의 수세행정에서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笞刑을 가하거나 욕을 보이는 등 수령들의 침책이 여전하여 사족들의 기피현상이 계속 나타났다. 그래서 숙종 37년<양역변통절목>에서는 존위를 上·副尊位로 구분하여 里 단위의 閑丁望報와 관련된 실무는 부존위 이하가 담당하고 사족출신의 상존위는 단지 그것을 검찰·신칙케 함으로써 사족출신의 이임에 대한 수령의 침책을 보다 완화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553)≪備邊司謄錄≫63책, 숙종 37년 12월 26일.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부존위 이하 유사 등은 中庶나 평민들로 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면리임에 중서나 천류들이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에서는 그것을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절목에서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면임차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숙종 초만 해도 都尹·副尹을 모두 양반층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 중앙정부의 입장이었지만, 영조대에 오면 달라지고 있다. 울산을 예로 들면 상위 면임인 풍헌은 그대로 「幼學」이라 해서 양반층이 차지하고 있으나, 부면임인 약정은 「業武」라 해서 일반 서민층에서 상승해 오는 새로운 계층이나 중간계층이 담당하였다.554)金俊亨, 앞의 글(1982), 69쪽.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에 나오는 지방관아 문서나 민정서에서도 일반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정조대의≪목민대방≫에는 풍헌은 ‘鄕品中識文字有風力者’로 택정하고 副憲(약정)은 ‘閑散中庶中勤幹識字解事者’로, 里監은 ‘里內鄕品中庶中識文字有風力者’로, 이정은 ‘庶民中勤幹解事者’로 임명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와서는 중앙정부가 향촌통제책의 강화를 통해 재지사족의 지배력을 통제하면서도 향촌사회의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재지사족층을 제도적인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재지사족층은 이러한 통제의 틀을 벗어나려 하였다. 대신에 종래의 동약·동계를 매개로 자기 주변의 여러 촌락을 아우르는 사적 지배질서를 유지해 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일반농민의 저항과 관권의 침투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잡역 등 부세충당을 위한 기능에 흡수되어 버리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555)金仁杰, 앞의 글(1985), 787∼788쪽.

 이러한 상황을 틈타 경제력을 바탕으로 밑에서부터 상승해 오는 새로운 서민계층들이 이 면리제 운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서민층의 입장에서는 면리임의 직임을 수행함으로써 여러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역이 면제되는 등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직임의 수행과정에서 다른 농민으로부터 중간수탈을 통해 더욱더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신분적 지위를 상승시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었다.556)金俊亨, 앞의 글(1982), 71쪽.

 이러한 현상은 향촌사회에서 기존의 사족지배체제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나타난 것이지만, 그러한 붕괴를 더욱 촉진시키는 기능도 하게 되었다. 물론 면리기구 운영에 새롭게 참여해 오는 계층은 19세기 이후 구조화되는 「수령-이·향 수탈구조」에 편입되어 농민수탈을 가중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면리기구 참여는 재지사족층의 지배권약화 경향과는 반대로 이미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두레 등 동리별 공동노동조직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촌락에서의 발언권을 강화시켜 오던 농민층의 지위를 보다 높여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동약을 매개로 사족의 지배를 지속시켜 나가려는 사족층의 의도에 반발해서 농민을 비롯한 다른 계층이 分洞을 요구한 사례는 그 현상을 잘 보여준다.557)鄭震英,<朝鮮後期 鄕約의 一考索-夫仁洞 洞約을 중심으로>(≪民族文化論叢≫23, 1982) 참조. 또한 이정법이 일반화되어가면서, 양반층은 그 부담에서 면제되었으므로 가장 봉건적인 특성이 강한 軍役稅의 동리별 부담에 재지사족층도 부분적으로나마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나, 서북지방에서의 「軍布契」와 같이 어떤 신분인가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군역세 충당을 위한 계 운영에 출자하는 경우도558)金俊亨, 앞의 글(1984), 91∼94쪽. 그와 같은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金俊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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