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4. 향촌자치체계의 변화
  • 2) 관 주도 향촌지배질서의 성격
  • (1) 관 주도 향촌통제책의 강화

(1) 관 주도 향촌통제책의 강화

 사족중심의 향촌자치체계가 동요·붕괴된 이후 향촌사회의 자치적 질서는 크게 제약되고 향촌사회의 운영은 관권에 예속되어 갔다. 여기에서 향촌자치체계를 대신하게 된 것은 관의 부세자문기관화 한 향회와 부세운영의 실무기간이었던 질청이었다. 그 결과 향촌사회의 운영에서 사족을 대신한 향임층과 이서층의 중간적인 역할도 크게 증대되었다. 그런데 이들 이향층이 독자적인 자치체계를 꾸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이서층의 경우 그 내부에 일부 가문이 향리직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에서625)李勛相,≪朝鮮後期의 鄕吏≫(一潮閣, 1990). 볼 수 있듯이 이들은 나름대로 재생산구조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일을 맡기고 안맡기고는 철저하게 수령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에 이향층이 중심이 된 자치질서란 성립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향촌사회 지배질서가 관에 철저히 예속되어 향촌자치체계가 크게 위축됨을 의미하였다.

 한편 이전까지 사족중심의 향촌자치체계의 보조역할을 하던 면리제가 관의 행정기구로서 본격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도 위와 같은 향촌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면리제는 조선 초기 관권위주의 향촌통제책이 강화되어 갔을 때 강조된 바 있었던 것인데,626)朴鎭愚,<朝鮮初期 面里制와 村落支配의 강화>(≪韓國史論≫20, 서울大 國史學科, 1988). 아직까지 자연촌까지를 아우르는 철저한 것이 되지는 못한 상태였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은 18세기 숙종대에 이정법이 실시된 이후라고 할 것이다.627)金俊亨,<18세기 里定法의 展開-村落의 기능강화와 관련하여->(≪震壇學報≫58, 1984).

 여기에서 사족중심 자치체계의 붕괴는 일시에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는 데는 17세기 이래 관으로부터의 꾸준한 견제, 특히 18세기 이후 관주도의 향촌통제 강화책이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앞서 언급된 숙종 37년<양역변통절목>과 함께 반포된 이정법, 이어 실시된 팔도구관당상제 등은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역할을 일정한 선에서 제한하고 향촌사회를 수령중심으로 다시 조직하며, 수령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실 사족중심의 향촌자치체계는 결코 완결적인 구조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것은 끊임없이 재확인되고 강화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모순을 야기시키는 주체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재지사족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속적 자기비판과 자신들의 결속을 강화시켜야 했다. 향약이나 향규가 관권과의 마찰을 극도로 자제할 것을 요구하고 吏民의 통제와 아울러 사족들 자신의 통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강조하고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다만 조선 중기에는 지방세력의 상대적 지위가 강화되고 중앙의 권력집단이 지방적 근거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와 같은 사족중심의 자치체계가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태에서 중앙권력과 지방세력간의 이해관계가 소원해지고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는 것은 지방세력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특히 일본과 청나라와의 커다란 전쟁을 치른 후 국가기반을 재강화하는 과정에서는 국가와 지배계급의 입장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지배계급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던 관료들과의 대립에서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던 효종이 관료들의 비판에 대해서 “我國은 君弱臣强해서 만약 이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君이 되려는 사람이 없을 것”628)≪孝宗實錄≫권 12, 효종 5년 3월 갑오.이라고 지적한 것은 당시 지배계급과 국가권력과의 관계가 대립적인 국면에 직면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후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의 방향과 관련하여 효종의 입장이 주목된다. 효종은 사족이나 관리들과 상당부분에서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는데, 효종 2년(1651) 南原幼學 丁浹의 향약시행 요청에 대한 처리에서 다음과 같은 비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향약을 일률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향약은 옛날 향숙의 법으로서 마땅히 권장하여 훈업의 방도로 삼을 필요는 있지만 이름을 향약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牧民官이 學校之政을 잘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孝宗實錄≫권 6, 효종 2년 4월 을해).

 이어 올라온 副司果 閔鼎重의 장문의 時弊上疏에 향약실시 등의 건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효종은 오직 수령·감사의 擇任·久任문제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 史臣의 비판이 있었다.629)≪孝宗實錄≫권 6, 효종 2년 6월 신해. 이러한 사실은 사족이 중심이 된 자치체계가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과는 모순관계에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감사와 수령을 통한 지방지배방식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중앙정부가 취한 향촌통제방식의 기본적 형태였고, 따라서 효종의 위와 같은 태도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위 정협의 건의내용이 향회를 통한 吏鄕의 통제뿐만 아니라 면단위에서까지 하민들을 사족의 수중에 장악하려 하는 것이었고, 또 그것이 17세기의 향촌사회에서 관행화된 체제였음을 고려한다면, 비변사의 뜻에 따라 효종이 그것을 거부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정부는 사족중심의 향촌자치체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향촌사회에서는 사족의 향촌지배를 대체할 만한 세력이 출현하지 못하고 있었고 국가에서도 그러한 한에서 사족의 이해를 부정할 수 없는 단계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같은 향촌사회의 지배구조에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부여한 것은 숙종이었다. 「이정법」과 「팔도구관당상제」가 그 새로운 형식이었다. 숙종 역시 지방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감사나 수령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며 이들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데서는 기존의 왕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수차의 禮訟에 의한 당인들의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감사나 수령이 당인들과 깊이 연결되어 스스로 문제를 처리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고,630)≪肅宗實錄≫권 2, 숙종 원년 정월 신유. 따라서 이들을 통제하는 데는 자신의 측근을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판단, 지속적으로 암행어사 및 각종 어사를 지방에 내려보내고 있었다. 숙종이 암행어사 파견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그가 즉위한 직후 수령문제에 대한 집중적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당시의 수령직이 당인, 특히 대신들의 당세확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史臣의 지적과631)≪肅宗實錄≫권 4, 숙종 원년 9월 신축.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정권교체에 따른 행정의 공백을 메울 다른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는 어사파견이 가장 적절한 것이었을 것이다. 숙종은 감사나 수령이 당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의 측근인 侍從之臣을 십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사의 파견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우선 문제가 된 것은 잦은 어사의 파견이 가져오는 폐단이었다.632)≪肅宗實錄≫권 27, 숙종 20년 10월 정미 및 권 32, 숙종 24년 7월 을해. 빈번한 어사의 파견은 수령들로 하여금 어사의 눈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보다 적극적인 경우 어사에게 호평을 받기 위해서 어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민폐가 되었다. 또 어사의 잦은 파견은 어사들로 하여금 형식에 흐르게 하였고, 마찬가지로 이조나 병조의 관원들로 하여금 어사의 보고를 형식적으로 처리하게 만들었다. 이는 당초 어사를 파견하는 존재의의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어사들도 가능한 한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적절히 임무를 수행하면 그만이었다. 여기에서 숙종 34년(1708) 2월, 숙종이 「代柱帖」을 만들어 항시 옆에 두고보겠다고 한 것은633)≪肅宗實錄≫권 46, 숙종 34년 2월 계미.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판단된다. 대주첩은 감사나 어사들에 의해 높이 평가된 수령의 명단을 의미하는 바, 이는 곧 어사들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는 점을 감시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서 그 모두를 왕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감사·수령 및 어사의 기능에 대한 국왕과 신료들의 입장이 불일치하는 데 따른 운영상의 혼란이었다. 당시 왕이나 집권관료들은 한결같이 수령들의 부패문제를 거론하고 있었고, 수령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사를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각각 그 주장하는 근본 목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당시 중앙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던 향촌사회의 문제와 관련해 본다면, 국왕은 어디까지나 감사·수령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관료의 일부는 그같은 왕의 태도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경우 언관 등 일부 관료들이 암행어사를 파견하자고 주장하였던 이면에는 관권을 이용하여 기존 사족지배질서에 제한을 가하고 있던 수령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수령이 이향들과 결탁하여 사족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데 대한 우려를 내포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숙종은 향촌사회의 변동에 따라 생기는 문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해결하되 교화나 풍속에 관한 부분만은 사족에게 맡겨 그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기타 부세 등 행정에 관한 것은 면리임에 맡기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정법」을 제시하고, 이들 수령에 대해서는 중앙의 고관들이 책임지고 감독하도록 하는 「팔도구관당상제」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팔도구관당상·유사당상제는 備邊司 당상관으로 하여금 각 도에서 올라오는 공문 및 각종 공사의 처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각 도를 맡는 당상관을 정하고 유사 당상 4인으로 하여금 구관당상을 도와 각각 2도씩을 담당하도록 하였다.634)吳宗祿,<비변사의 조직과 직임>(≪조선정치사≫하, 청년사, 1990).
金仁杰, 앞의 책, 121∼125쪽.
≪속대전≫이후 편찬된≪전률통보≫의 外官格式조에 수령이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시원임대신, 6조판서, 3군문대장,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 이조전랑’외에 비변사의 본도구관당상을 찾아보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한 것은635)≪典律通補≫권 1, 吏典 外官格式. 지방관들이 새로이 구관당상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팔도구관당상을 둔 것은 지방관들을 비변사에서 통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이 시기 향촌사회의 문제가 중앙에서도 크게 문제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남원인 崔是翁이 남원부사 李聖漢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제공한다.

光海朝를 거친 이래 鄕風이 크게 어그러져 몰염치하고 문자도 모르는 우매한 무리들이 향청을 틀어잡고 있었는데, 癸亥(인조반정) 이후에도 역시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前輩들이 이것을 병으로 여겨 鄕約之規를 설립하여 朱子가 증손한 呂氏鄕約과 광산(광주) 선배들의 취지를 취하여 한 읍의 향약을 정하고, 또 각 리의 향약을 정해서 善惡勸懲之道를 보였습니다. 이 법이 행해진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으니, 법이 오래되면 해이해지는 것은 괴이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兩廳(鄕廳·作廳)은 모두 鄕約之名이 자신들에 해를 끼친다고 증오하여 그것을 반드시 제거하려 하고 … 사대부 또한 그 중독을 꺼려서 시비에 끼어들려 하지 않으니 마침내 鄕所·胥吏가 聯名作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崔是翁,≪東岡遺穚≫권 2, 與李地主聖漢).

 최시옹은 숙종 38년(1712) 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와 같이 지적하면서 또 이렇게 쓰고 있었다.

奉公一節은 향약 중 하나의 일인데, 糴糶(환곡)과 부역의 포흠·적체가 과연 士夫와 양민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향풍이 어그러진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위 두 가지 문제는 향약 중의 大節로서 一番人이 심히 꺼려하는 바입니다. 그간에(향약을 실시하는 데서) 혹 사사로움에 끌린 바가 없지 않겠지만, 어찌 남의 말을 전혀 생각치 않고 오로지 사사로운 뜻만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復古(향약시행)의 뜻을 두고도 먼저 이 兩節(糴糶·賦役)을 제거하려 한다면, 이는 목구멍을 막고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가라고 하면서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崔是翁,≪東岡遺穚≫권 2, 與李地主聖漢).

 위 최시옹의 두 가지 지적은 사족중심의 향촌지배체제가 이향들에 의해 부정되고, 당시 관에서 인정하는 향약이라고 하더라도 환곡이나 부역의 문제를 배제함으로써 향약 본연의 의미가 살아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는 바로 이 시기에<양역변통절목>에 따라 이정법이 반포되었던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절목>은 흔히 교화로 표명되는 측면에서는 사부(사족양반)를 끌어들이는 한편 행정적인 차원에서의 부세문제 등은 중간담당층에게 맡기고 있었다. 이런 조치는 당시 사족들의 영향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고, 당시 수령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고 있던 향약의 기본구조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은 그 이전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던 것이지만, 그 의미는 부세운영에 있어서 사족의 간여를 배제하고 그것을 수령이 직접 자신의 관리하에 두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숙종대 이후 꾸준히 추진되어 숙종 37년 「이정법」체제로 나타났으며, 위와 같은 일련의 정지작업 위에서 숙종 39년 비변사에서 팔도구관당상·유사당상제를 마련함으로써 일단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의 기본구도가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사의 파견은 그 보완책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상으로부터 당시 관이 주도하는 향촌통제책의 기본구조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아직까지 사족 개개인의 특권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사족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사족들에 의해 장악되어 왔던 향권을 관의 통제하에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중앙권력, 특히 각 도의 구관당상들의 책임하에 향촌사회를 통제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된다.

 위와 같은 정책수립의 배경이 되었던 것은 당시의 소농경제의 발전과 촌락기능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636)金俊亨, 앞의 글. 그렇지만 보다 일차적으로는 재지사족들의 경제적 기반의 위축이라든지 재지사족만을 자신의 동반자로 삼을 수 없게 만든 조건이 정부로 하여금 그같은 결정을 내리도록 하였다고 하겠다. 이후 정부에 의해 취해진 일련의 정책강화 방향은 그 점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조선 후기 사족중심의 향촌사회 지배구조가 동요하고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이 자리를 잡아나가는 데에는 재지사족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와 수령권 강화의 방안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은 부세정책에 단적으로 반영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족들의 향권상실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이정법체계에서도 사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으며, 경상도 일부지방에서는 바로<양역변통절목>에서 제시하는 틀을 이용하여 사족이 향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기도 하였다. 향청의 소임은 막중한 것이므로 교체할 때에는 향청에서 「班首」에게 고하고, 양반의 대표인 반수가 전체 향론을 물어서 수령에게 천망하고, 각 면리에서는 풍헌이나 이임같은 행정조직 외에 집강이나 상존위를 양반 가운데서 뽑아 이를 통해 풍속과 교화를 다스리도록 하였다는 것이다.637)曺夏瑋,≪笑菴先生文集≫권 2, 鄕約增定.
一. 功曹爲一邑亞官 其任不輕 每當遞時 曹司告于班首 廣詢鄕議薦報官司 若有圖點者 齊會論罰.
一. 各面執綱卽古之面約正也 宜令留鄕所 極擇儒品中可合者爲執綱 面內公事 則依近例委之風憲 而執綱則 只管風敎之事 小則自專 大則告官 外此切勿干涉.
一. 各里上尊位卽古之直月也 亦極擇儒品中加合者爲上尊位 而若無兩班之洞 則兼領於隣里上尊位 而其責任風敎之事 小則自專 大則議決于執綱.

 그렇지만 이 시기에 전반전으로 사족이 향권을 상실해 나갔던 상황에서 부세행정을 포함한 한 고을의 전반적인 일에 대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면리단위에서의 집강이나 상존위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고, 향론을 통해서 임명된 향임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재생산을 담보해 줄 제도적 장치가 해체된 상태에서는 그 역할이라는 것이 수령의 시녀역 이상이 되기 힘든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향임이 만족스러운 것이 되기 힘들었고, 그것은 사족으로서 향임을 기피하지 않는다고 하는 영남에서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영조 21년(1745) 상주목사가 자신이 도임한 후 差帖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향임을 기피한다고 하여 별감 趙學經 등 3인을 토호로 지목하여 처단해 줄 것을 감사에게 부탁하는 다음의 예가 18세기 중엽 당시의 사정을 보여준다.

각 읍에 향임을 두는 이유는 읍장(수령)을 도와 읍을 다스리는 데 있습니다. … 본주의 경우 儒·品을 막론하고 반드시 鄕望에 드는 자 중 합당한 사람을 차정하여 그로 하여금 읍의 일을 맡게 하는 것이 邑例입니다. 까닭에 목사가 도임한 후에 향청에 각별히 선택해 줄 것을 지시하고 그 望報에 따라 차출하였는데, 별감 趙學經은 帖을 받은 후에 병을 칭하여 여러 차례 사퇴하겠다고 呈訴하였습니다. … 그가 거만하게 집에 앉아 아들이나 조카, 또는 문인·족속을 칭하는 자들을 시켜 얼굴을 바꾸어 가며 소장을 올리게 하니, 반드시 그 말 가운데 거역하고 모욕하려는 뜻을 비치고자 하였습니다. 관민간의 分義에 있어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 이들 토호가 완강하게 거역하는 풍습을 불가불 특별히 다스려 후일에 이같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기에 이와 같이 보고합니다. 위의 3인이 公任을 피하고 관령을 거역한 죄를 법에 따라 처리하여 풍습을 規正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商山錄≫乾, 爲牒報事).

 당시 상주목사는 감사에게 올리는 牒報에서, 별감 조학경과 별감 金守行, 書役都監 孫徵 등 3인을 관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처벌할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목사 자신은 그 지역에 내려오는 관행에 따라 향청의 추천을 토대로 위 3인에게 향임을 맡으라는 차첩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별감 조학경이 관을 모독하려는 뜻을 품고 영을 거역하였으니 엄벌에 처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이 시기에 오면 관권의 통제하에 있던 향임은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았고 그것을 거부하던 이들이 토호로 지목되었다는 점을 위 조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관권, 나아가 관권과 결탁하여 향권을 천단하고 있던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이 관권 또는 관과 결탁한 세력의 향권천단에 불만을 가졌던 층이 토호로 지목되어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던 데서, 기존의 향권을 장악해 왔던 세력과 관권과의 마찰이 이 시기에 와서 하나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점차 사족과 그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유림세력을 배제하면서 관권을 배경으로 새롭게 향권에 접근하고 있었던 층이 등장하고 있던 사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도 역시 수령은 지방의 지배세력을 행정에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족이 관과 대립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 조건을 이용하여 사족을 대신해서 새로운 세력이 향권에 접근하여 사족중심의 자치체계를 부정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세운영권을 장악하고 사족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였으며, 대체로 수령의 힘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재지사족의 이들에 대한 압박은 관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심각한 문제로 되고 있었다.

 18세기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향권의 향배를 놓고 재지지배층 내부에는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관권은 가급적 사족의 입김을 배제하고 그들을 견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재지사족은 지방수령을 불만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고, 그 같은 불만은 지방관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로까지 고조되었다. 여기에서 국가는 「鄕戰律」이라는 별도의 조치를 통해 수령을 지원하게 되었다.≪속대전≫에까지 오른 향전률은 피차 관계없이 관련자를 모두 ‘杖一百流三千里’의 律에 처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주요 목적은 바로 관권을 뒤에 업은 향품층과 사족의 후예라 할 유림간의 향권을 둘러싼 대립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견제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사족이었다. 국가에서 향촌사회의 분란을 감사나 수령에 일임하지 않고 국가적 차원에서까지 법률로써 통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향전을 통해 기존 재지사족들의 관권에 대한 위협이 드러나고 그것이 왕권강화에 저해되는 요인으로까지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향촌사회의 재지사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보다 신분이나 계급적 지위가 떨어지는 층들의 도전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 같은 상황변화에 대한 사족들의 반발은 이후 국가와 수령으로부터 향전률에 의한 처단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당시의 향전과 그에 대한 국가의 조치들을 검토하면 향촌자치체계의 변화의 내용과 그 성격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