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Ⅲ. 민속과 의식주
  • 2. 의식주생활
  • 3) 주생활
  • (3) 풍수적용의 민간확산

(3) 풍수적용의 민간확산

 주거의 입지와 형태가 거주인은 물론 그 후손의 운명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사상은 이미 고대부터 한반도에 전파되어 왔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묘지뿐만 아니라 읍성의 위치 및 주거의 입지와 형태를 결정하는 방법이 발전되어 온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풍수적인 생각과 방법에 따라 주거를 건설할 수 있었던 계층은 조선 중기까지 대단히 한정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민중들은 풍수를 적용할 만한 지식이나 경제력을 맞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풍수의 전문가들이 일정한 관직을 가지고 국가기관에 고용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정한 경제력과 사회적 권력이 없이는 민간주거에서 풍수를 적용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비록 민간에서는 그들의 주거건축에 풍수적인 방법을 적용하기 어려웠지만 풍수사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민간신앙화되어 있었다. 주거건축을 통하여 인생의 피흉발복과 가족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과 상류층에서 그 적용을 통하여 보여진 소응은 풍수가 민간신앙으로 자리잡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봉건적 신분질서가 해이해지고 서민의 경제력이 증가함에 따라 민중들은 갈망해 오던 풍수를 주거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저술된 실학자들의 저서에서 자주 보여지듯 이 풍수의 적용은 이미 일반화되었으며, 풍수의 적용으로 인한 피해가 사회문제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민간에서는 풍수전문가의 수요가 점차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민간 풍수사들도 증가하여 일제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적어도 5,000명 이상의 민간 풍수사들이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800)村山智順,≪조선의 풍수≫(최길성 역, 민음사, 1990), 290쪽.

 그러나 풍수사상이 민간으로 확산되고 주거건축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사상이나 적용방법과는 다르게 일정한 변형의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우선 풍수의 사상과 방법이 서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변형의 과정은 대략 세 가지 방향으로 추정되어진다.

 첫째는 俗神化의 경향을 볼 수 있다. 풍수사상과 방법들은 본래 음양오행과 주역의 논리를 배경으로 하는 고도로 난해한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바, 민중들이나 민간의 풍수사들이 이를 쉽게 이해하여 적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풍수서들이 한문으로 된 것이어서 민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도 그 이유가 된다. 따라서 민간화하는 과정 속에서 가감되고 첨삭되거나 번안되어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으로 용해되었다고 볼 때 속신화의 경향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 널린 유포되었던≪鄭鑑錄≫이나≪前生錄≫, 그리고 성주풀이류의 노래에 보여지듯이 주술성과 점복성이 강하게 속신화되어 갔던 것이다.

 둘째는 적용범위의 확대라고 보여진다. 본래 주거건축에 있어서 풍수의 적용은 택지의 선정에 한정된 것이었다. 땅의 길흉이 사람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풍수의 관점과 방법으로 볼 때 건물 자체보다는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판단하는 일이 본래의 기능이었다. 풍수적용의 대상이 되는 무덤과 주거를 陰宅과 陽基라고 불러 왔는데, 이는 음택이 사자를 땅속에 파묻는 까닭에 宅과 基의 구별이 없으나 주거는 대지와 건축물이 구별되기 때문이 라 하였다. 사람의 운명은 땅의 생기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니 만큼 양기가 맞다고 하였던 것이다.801)이러한 구분은 村山智順(위의 책, 637∼638쪽)에 의해 주장되었고, 崔昌祚에 의해 지지된 바 있다(≪韓國의 風水思想≫, 民音社, 1984, 251쪽).

 그러나 토지를 생산기반으로 하였던 농업사회 속에서 더구나 택지를 선택적으로 구입하기 어려웠던 서민층에 풍수적 방법에 따라 택지를 구입하여 주거를 건설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택지선정 이후에 결정되는 주거계획 및 건설과정에 풍수적 사고를 적용함으로써 택지의 풍수적 결함을 보충하는 데에 더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이로써 풍수적인 생각이 건축계획의 전반으로 확산, 적용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셋째는 풍수사상의 실용화라고 볼 수 있다. 당시까지 주거건축의 계획방법은 풍수사상과 그것으로부터 산출된 陽宅論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양택서들이나 이것을 부분적으로 발췌, 편집한 민간서적들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실정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단히 선험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이었다. 현실생활에 있어서 실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려 했던 일단의 실학자들은 풍수의 생각과 방법들이 가지고 있었던 비합리적인 요소를 비판하고 당시 조선의 실정에 맞는 건축계획 방법을 정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풍수사상에서 비롯된 지리관이나 주거관마저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에 바탕을 두고 실용성과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체계화를 이루어 갔던 것이다.802)특히 徐有榘는≪林園十六志≫또는≪林園經濟志≫의 서문인 例言에서 이같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여하튼 풍수사상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단순화·속신화·실용화의 과정을 거쳐 민간신앙으로서 민중들의 생활 속으로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주거관은 물론 건축계획으로부터 건설방법에 이르기까지 주거건축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풍수의 생각과 방법들이 주거건축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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