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5) 유기론과 유리론의 대두와 쟁점
  • (2) 화서학파의 심주리주기론의 대립

(2) 화서학파의 심주리주기론의 대립

 四七論이 인간감정의 도덕적 통제에 관심이 있다면 인물성론은 인간성품의 근원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 할 수 있고, 19세기 후반에 대두된 한말 성리학의 心主理主氣論은 인간의 주체적 인식의 문제라 할 수 있다.080)조선시대 유학이 새로운 학설을 수립한 경우로, ① 四七論을 중심으로 한 理氣說, ② 人物性同異論을 중심으로 한 性說, ③ 心是氣·心卽理 또는 明德說·未發說을 중심으로 한 心性情의 설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玄相允,≪朝鮮儒學史≫, 民衆書館, 1949, 485쪽). 이 시기에는 이기론의 입장에서도 理優位說을 극단화하여 唯理論이 제기되는 등 주리론의 전통이 강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호서·호남지역의 任憲晦-田愚와 宋達洙-宋秉璿을 제외하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구별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강한 주리론 내지 유리론의 입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근기의 李恒老-金平黙, 호남·영남의 奇正鎭-鄭載圭, 영남의 李震相-郭鍾錫의 학맥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표출된 주리론은 이항로의 경우처럼 心體·明德을 주리론으로 인식하는 입장이 있고, 이진상의 경우처럼 심의 본체를 이로 인식하는「心卽理說」도 있으며, 기정진의 경우처럼 모든 현상세계의 주체를 이로 보아「이일리분수설」을 제시하는 유리론의 입장도 있다.

 이같은 한말 성리학의 주리론은 매우 창의적인 이론으로 이 시기의 대표적 성리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발단한 심주리주기논쟁은 19세기 성리학의 중요한 쟁점으로 당대 성리학의 문제의식을 집약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이항로의 제자인 김평묵과 유중교가 본심·명덕이 이인가 기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주리론과 주기론의 상반된 입장으로 나뉘어 토론을 벌인 데서 비롯되었지만, 이후 화서학파 전체에 확산되어 김평묵의 입장에 찬성하는 崔益鉉·洪在龜·柳基一과 유중교의 입장을 지지하는 李根元·柳重岳·李直愼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나아가 다른 학파에까지 파급됨으로써 이 시기 성리학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큰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를 절정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조선 후기에는 이 두 사람이 제시한 理氣互發說과 氣發一途說의 대립에 따른 이기설의 철학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이항로로 하여금 성리설에서 조선조 성리학의 결론을 맺어 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스스로 공자→주자→송시열의 道統을 제기하고 있듯이 이이→김장생→송시열을 잇는 기호학파의 계열에 서 있었지만, 성리설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받아들였고 理先氣後·理尊氣卑·理主氣役을 주장하여 이 우위를 강조하는 주리설을 확고하게 제시하였다. 이것은 이이와 송시열을 주기파로, 이황을 주리파로 분류하는 오늘날의 상식화된 분류방법과는 반대로, 도학의 근원적 성격에서는 퇴계학파나 율곡학파가 모두 주리설임을 밝혀 주는 이항로의 성리학설이 가진 근본입장이다. 특히 이항로가 자신의 성리설에서 중요하게 제기하였던 문제는 명덕 곧 본심을 이로 인식하는 심주리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후에 김평묵과 유중교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은 바로 이 심주리론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이었다.

 김평묵은 이항로의 으뜸가는 제자로서 성리학에 있어 이항로의 입장을 철저히 계승하였으며, 심을 主氣로 파악하는 임헌회(鼓山)·전우(艮齋) 등 기호계열의 다른 학파의 인물들과도 활발한 논쟁을 벌이면서 심주리론이 정당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梅山 洪直弼에게서도 수학하였으나 심개념의 문제에 있어서는 홍직필의 입장을 따르는 임헌회와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곧 홍직필이 명덕 곧 본심을 기라 규정한 데 대해, 그는 이항로의 입장을 따라 명덕·본심을 이를 위주로 파악해야 할 것임을 확인하였다. 특히 심개념 문제를 둘러싸고 유중교에 의해 비판적 의문이 제기되어 화서학파 내부에 논란이 일어나자 김평묵은 철저한 심주리론의 입장에 입각하여 이항로의 성리설에 대한 수정이나 보완을 단호히 배척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華西先生心說本義>·<華西雅言心說考證>등의 저술을 통해 이항로의 입장을 정밀히 고증하면서 명덕 내지 본심은 이를 위주로 보아야 심의 능동적 主宰性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을 관철함으로써 심주리설의 성리학적 입장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김평묵이 이항로의 심주리론의 입장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음에 비해, 유중교는 본심을 주리로 파악하는 스승 이항로의 심성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심의 본래적 지위는 기에 속하는 것이라 하여 스승의 성리설의 보완을 시도하였다. 그가 55세 때 김평묵에게 제시하였던 이른바 ‘調補華西先生心說’은 화서학파 내부를 뒤흔드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성리설의 주요한 쟁점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성리학사에 의미 깊은 문제를 던져 주는 것이었다. 이 心說의 문제는 유중교가 이항로의 성리학적 핵심개념을 명덕주리론으로 규정하면서 명덕과 심을 이기론으로 철저히 분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조보화서선생심설’은 이항로가 명덕을 이로 밝히며 동시에 심이 주리와 주기로 인식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명덕과 심을 일치시켜 심의 주리론을 강조한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조정·보완을 시도한 것이다. 유중교는 이항로가 명덕과 함께 심을 주리로 해명한 것은 본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수용하지만 심의 본래적인 지위는 形而下의 기에 속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김평묵과의 논쟁과정에서<先師心說正案>을 저술하여 자신의 주장을 다소 완화시키기도 하였지만, 심과 명덕을 합치하여 보는 입장과 분석하여 보는 입장이 모두 가능함을 지적하고 나아가 그 중 분석하여 보는 태도를 중시하는 입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철학적 사고의 객관적 분석정신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처음 유중교의 문제 제기로 발단한 화서학파 내부의 심주리주기논쟁은 다시 그들의 동문과 제자 사이에 확산되어, 심의 해석을 둘러싸고 다양한 입장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심주기 혹은 심주리의 입장에 서서 자기 주장을 옹호하고 다른 주장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중에는 자신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두 학설을 절충하거나 보완하려는 시도 또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 인물로 柳重岳과 盧正燮을 들 수 있다.

 유중악(恒窩)은 유중교의 먼 집안 아우뻘로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또 이항로와 김평묵의 제자이기도 한 인물인데, 이항로의 심주리설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독창적 심성설을 제기하였다. 그는 35세 때 김평묵에게 자신의 심성설을 제시하면서 ‘마음이 本性의 主宰가 된다(心爲性宰)’는 입장을 지지하여 艮齋학파에서 주장하는 ‘본성이 마음의 주재가 된다(性爲心宰)’는 입장을 거부하였다. 나아가 그는 心爲性宰의 설만으로는 심성의 본질을 충분히 해명할 수 없음을 밝히고 ‘마음은 본성으로써 주재한다(心以性宰)’는 명제를 보완하여 제기하고 있다. 곧 그는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지만 준칙이 되는 것은 본성이다(主宰者心也, 準則者性也)’라고 하는 마음과 본성에 대한 개념적 규정 위에서, 마음이 감정을 주재할 때 본성을 기준으로 지니고 있음으로써 본성의 주재가 되는 것이라 명석하게 밝혔다. 곧 본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마음이 주재한다는 것은 주재의 준칙을 상실한 것이 되므로 결국 주재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평묵도 心爲性宰가 되는 오묘함을 알면 주기설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고 心以性宰의 실재를 알면 불교의 본심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이러한 유중악의 심위성재설과 심이성재설은 본심을 이로 이해하는 이항로·김평묵의 입장과 성의 객관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유중교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에서 절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정섭(蓮谷) 또한 김평묵과 유중교의 문하에 모두 출입하였던 인물로서 양쪽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논쟁의 조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明德心性情之總稱說解>에서 “心·性·情은 이름은 다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다만 하나의 理이다. 이 理의 본체가 性이요, 작용이 情이고, 心은 본체와 작용을 꿰뚫고 있는 것”이라 하였으며, 또<燕居雜錄>에서 “性은 心의 準則이요, 心은 性의 강령이며, 心은 性을 포함하고 性은 心에 갖추어져 있으니, 心과 性은 하나의 理”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곧 심의 포괄성과 이의 근원성을 밝힘으로써 심과 이의 일관성을 승인하고 있는 주장으로서 심주리설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또한 그는 “華西가 明德을 主理로 파악함으로써 明德이 제 자리를 얻게 되었고, 省齋가 心과 明德을 사물(物)과 법칙(則)으로 분석함으로써 心과 明德이 제 이름을 얻게 된 것”이라 하면서, 이것은 이전 사람이 미처 발명해 내지 못한 의견으로 공이 크다고 강조하여 이항로와 유중교의 입장이 모순된 것이 아님을 해명하였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는 이항로·김평묵의 심주리설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유중교의 ‘調補華西先生心說’의 입장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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