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1. 성리학
  • 5) 유기론과 유리론의 대두와 쟁점
  • (3) 한주학파의 심즉리설과 노사학파의 유리론

(3) 한주학파의 심즉리설과 노사학파의 유리론

 영남계열에 속하는 寒洲 李震相의 성리학적 입장은 한마디로「心卽理說」을 표방하여 심의 주재성 내지 주체성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철저한 주리론이라 할 수 있다. 이진상의 심즉리설은 명칭에 있어서는 王陽明의 심설이 지닌 기본명제와 동일하지만, 그는 자신의「심즉리설」의 의미에 대해 심을 구성하는 이·기 속에서 근원적으로 심이 이임을 밝히는 것이라 해명함으로써 자신의 학설이 성리학의 입장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곧 이진상은 44세 때 지은<心卽理說>(고종 3년:1861)에서 심을 돌(石)과 옥이 섞여 있는 옥의 원석에 비유하면서, 왕양명의 심즉리설은 옥에 섞여 있는 돌까지 옥이라 하는 것으로 본체와 작용을 혼동하여 기에 속하는 심의 작용까지 이라 주장하는 것이니 실은 心卽氣說이요, 자신의 심즉리설은 원석 속의 옥만을 가리켜 옥이라 하듯이 심의 본체만을 가리켜 이라 하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에서 심즉리설이 되는 것이라 하여, 자신의 학설을 왕양명의 심즉리설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081)李震相,≪寒洲集≫권 32, 雜著 心卽理說.

 이진상은 자신의 심즉리설의 이론적 기반을 이황의<聖學十圖> 가운데 ‘心統性情圖’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정립하고 있다. 그는 ‘심통성정도’의 3도 가운데 中圖는 세워 보는 인식방법에 따라 심의 본체로서 성을 가리킨 것으로 심즉리임을 밝힌 것이요, 下圖는 가로로 보는 인식방법에 따라 현상의 측면에서 심을 이와 기의 결합으로 파악하여 互發을 설명한 것이라 이해한다.082)李震相,≪寒洲集≫권 9, 書 與李謹休別紙.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중도에 나타난 이황의 입장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리설을 확인하고 있다. 곧 그는 중도의 입장을 이황 만년의 定論으로 보고, 이황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심을 主理而兼氣, 성을 體, 정을 用으로 각각 파악하는 것이 이황의 기본입장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083)李震相,≪寒洲集≫권 15, 書 答金鳳乃. 이처럼 그는 이황의 심개념을 해석하면서 그 宗旨는 ‘심통성정도’의 중도에 나타나 있으며 ‘心合理氣說’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즉리설임을 해명하고 있다.084)琴章泰,<退溪와 寒洲의 心槪念>(≪退溪學報≫54, 退溪學硏究院, 1987), 31쪽.

 이진상은 또한 四端七情의 문제에 있어서도 ‘性이 발동하면 情이 된다(性發爲情)’는 명제에 따라 성과 정이 하나의 이임을 지적하고, 따라서 사단과 칠정이 실상에서는 모두 이가 발동한 것이지 기가 발동한 것이 아니라는 ‘理發一途說’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심즉리설을 구체화하였다. 곧 그는 이황의 ‘理氣互發說’이 이와 기가 각각 발동한다는 발동의 주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발동하여 나타난 현상에서 무엇을 위주로 보느냐의 관점임을 주장함으로써, 발동의 주체는 모두 이이고 발동하여 나타난 현상에서는 기가 자료가 된다는 ‘理主氣資’의 주리론을 확립하고 있다.085)琴章泰, 위와 같음.

 이처럼 이진상은 이황에 대한 해석을 통해 주리론의 종지를 가장 철저하고 논리적으로 체계있게 천명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성리학적 관심은 엄격히 전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황학설에 대한 해석은 영남학파의 정통적인 이황에 대한 이해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그의 사후 영남학파 사이에 이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과 학문적 토론이 일어났었다. 이진상의 심즉리설은 당대의 성리학계에 중요한 쟁점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俛宇 郭鍾錫, 韓溪 李承熙, 重齋 金榥 등 그의 문하에 계승되어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특징적 학풍으로 전승되었다. 그들은 이진상의 심즉리설에 입각하여 다른 학설을 비판하고 그들의 학설을 옹호하는 논변을 활발히 펼쳤으며, 특히 곽종석·이승희가 심즉리설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李晩寅·李載基와 맞서 고종 23년(1886)부터 4년에 걸쳐 논쟁을 벌인 것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蘆沙 奇正鎭은 기호학파의 家學을 배경으로 하지만 성리설에 있어서는 유리론이라 일컬어지는 적극적인 주리설을 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성격을 지닌다. 곧 기정진은 理一을 말할 때 分이 이미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分殊를 말할 때 이미 一이 스스로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理一分殊의 일원적 통일성을 확립시킴과 동시에 이일 속에 분수를 내포시켜 이기의 대립적 인식을 극복하는 유리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086)奇正鎭의 성리설은 理一分殊說에 의거 主理的 입장에서 湖洛兩論을 종합지양하려는 唯理論이라 하였다(裵宗鎬, 앞의 책, 261∼283쪽).

 이와 같은 그의 성리학적 입장은 그가 81세 때(고종 15년:1878) 문인 趙性家의 질문에 대답으로 저술한<猥筆>(6조)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거부할 뿐 아니라 기호학파 성리설의 기본명제인 이이의 氣發理乘一途說도 대담하게 부정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곧 그는 이는 동하고 정하게 하는 근거(所以然)이지만 스스로 동하거나 정하지 않으며 동하고 정하는 것은 시키는 것 없이(非有使之) 기가 스스로 하는 것(機自爾)이라는 이이의 설명에 대해, 음양이 동하고 정하는 것은 기의 작용이지만 天命이 시킨 것(使之然)이므로 이를 두고 기가 스스로 동하거나 정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시키는 주체인 천명을 배제하고 천명 밖에 또 하나의 본령을 설정하는 것으로 기가 이의 지위를 빼앗을 위험이 있다고 하여 機自爾說을 비판하고 있다.087)奇正鎭,≪蘆沙集≫권 16, 雜著 猥筆. 즉 그에 의하면 이는 명령하는 주체요, 기는 명령을 받는 종복이므로 이의 명령에 따라 기가 발동하는 것이 바로 이의 발동(氣發則理發)이 된다.088)奇正鎭, 위와 같음.

 이처럼 기정진은 이이의 일원론적 입장조차 이에 대립한 기의 근원성을 제기하는 이원적인 것이라 지적하고, 이는 존귀하여 상대가 없는 것(尊無對)이며, 기는 이 속에 있는 것으로 이가 유행할 때 손발이 되는 것(理流行之手脚)이라 규정하여 일원적 유리론을 확립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사단과 칠정의 발동에 대해 이기의 호발로 보는 이황의 이원적 이해나 기발만 인정하는 이이의 일원적 이해를 넘어서, 기발이면서 동시에 이발이라는 일원적 해석을 새로운 자신의 입장으로 정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그가 이를 所定者(필연성)라 하고 심을 能定者(결단성)라 한 것도 이와 심을 가능태와 현실태로 대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089)琴章泰·高光稙, 앞의 책, 302쪽. 이것은 곧 이의 근원적 실재성 안에서 이와 기의 일관적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조선왕조 말기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일종의 성리학적 대응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기정진의 유리론은 石田 李最善, 松沙 奇宇萬, 老柏軒 鄭載圭, 立齋 南廷瑀 등 여러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기호학파의 정통적 이기론을 고수하고 있었던 艮齋학파와 淵齋학파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으면서 기호계열의 각 학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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