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2. 양명학
  • 3) 양명학과 소론

3) 양명학과 소론

 16세기에 주자성리학이 철학적으로 이해되면서 所以然의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理學보다는 所當然의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心學이 중심이 되는 가운데 양명학은 수용되어, 16세기 말 사단칠정논쟁·인심도심논쟁이라는 이기이원론에 대하는 이기일원론의 논쟁이 벌어지면서 ‘氣發理乘之’說에 입각한 조선성리학이 성립되어 가자 양명학도 성혼계통인 신흠·장유·최명길로 이어지면서 조선양명학으로 성립되어 갔다.

 중국의 양명학은 기일원론에 입각하여 심무체용설의 입장에서 ‘심즉리’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처음 받아들인 남언경의 경우도 서경덕의 기일원론에 입각하여 심무체용설의 입장에서 ‘심즉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명종대에 주자의 이기일원론적 이원론에 입각하여 ‘이발기수지’·‘기발이승지’를 주장하며 심유체용설을 전개하는 퇴계로부터 ‘심즉리’설은 이단으로 배척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논쟁과정에서 선조대에 율곡이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의 입장에서 퇴계의 ‘이발기수지’·‘기발이승지’설을 계승하면서도 ‘이발기수지’를 부정하고 ‘기발이승지’설을 확립하게 되니, 이후의 장유·신흠·최명길 등이 이기관에서는 기일원론 대신 이기일원론인 ‘기발이승지’설을 추종하고 양명학의 心說에서는 나정암의 심유체용설에 입각한 ‘심즉리’설을 받아들여 조선식 양명학을 확립하게 된다.

 조선성리학이 우암에 이르러 사회이념으로 정립되었다면, 우암과 논쟁을 벌이며 소론학파를 형성하여 가던 윤선거·윤증 부자의 뒤를 이어 정제두에 이르렀을 때는 집대성된 조선양명학이 성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똑같은 율곡문하에서 다시 일원론·이원론의 논쟁인 호락논쟁이 일어나는 시기에 이르면 소론이 패퇴하여 강화학파로 여맥을 유지하는 가운데 소론의 학문으로 이어가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조선성리학은 치세능력을 상실하고 말폐를 노정하게 되어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 갈 이념으로 북학사상이 발흥하게 되는데, 북학파는 호락논쟁에서 일원론을 주장하던 낙파계열을 계승하여 나갔다. 따라서 양명학은 다시 이들에게 수용되어 혁신적인 일원론을 성립시키는데 도움을 주지만 양명학 자체도 성리학의 한 분파이므로 성리학 자체를 탈피하는 북학사상가들에게는 양명학도 하나의 극복대상이었다.

 따라서 추사의 실사구시설로 북학사상이 확립되니 이후 사상계는 이를 추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북학사상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서양열강이 제국주의 침략을 감행하므로 이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다시 성리학이 위정척사파로 대두되고, 이와 함께 양명학이 다시 이건창·김택영·박은식 등으로 이어지며 한말·일제 상황에 대처하여 나간다.

 이와 같이 볼 때 지금까지 양명학을 성리학에 대한 실학으로 보거나 대립적으로 파악하던 시각을 벗어나 심성론이 중심이 된 조선성리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조선성리학의 한 분파로 ‘심즉리’를 주장하는 조선양명학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파악이라고 본다. 결국 조선양명학은 조선성리학자들인 소론의 학문으로 발전하다 소론과 더불어 쇠퇴하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조선 후기에 양명학이 미약했다거나 중국양명학과 같다고 보는 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듯하다.

<池斗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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