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1) 천주학과 보유론적 천주신앙
  • (1) 천주신앙의 동류

(1) 천주신앙의 동류

 서양 중세의 보편적 신앙으로 유럽을 풍미하던 가톨릭신앙(天主信仰)의 우월성은 신중심·내세주의·보편성의 사상이 지배하던 서양 중세에서 르네상스기를 거쳐 인간중심·현세주의·개별성의 사상이 시대사조가 되는 근대의 역사가 전개되면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종교적 개별주의를 표방하는 루터의 이른바「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유럽 가톨릭교회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프로테스탄트운동에 대하여 가톨릭에서도 자체개혁과 교세회복을 위한 反衝運動인 이른바「반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동태를 업고 등장하게 된 교단이 예수회(Societas Jesu, 耶蘇會)127)1534년 Ignatius de Loyola가 파리에서 창설하며 1540년 敎會의 認可를 받은 聖職修道會, 會員은 절대 順命의 군대적 규율을 가지고 유럽에서의 교세회복과 신천지 宣敎에 헌신했다. 현재는 교육과 학문을 통한 봉사와 선교를 목적으로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였다. 1534년에 창립된 예수회는 가톨릭의 첨병으로 교회정화와 교세수복에 헌신하는 한편, 이른바「地理上新發見」의 이후 세계로 진출하는 유럽 절대주의 세력의 뒤를 따라 신천지 이교세계에 그리스도복음을 전하는 해외선교에 나섰다.

 예수회 동방전교의 선두에 나선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는 1542년에 인도, 1549년에 일본에 키리시땅(切支丹)교회를 이루어 가톨릭신앙을 심어 놓게 되었다. 한자문화권의 종주국이라 할 중국땅에 가톨릭신앙(중국에서는 天主敎라 하였다)의 첨병이라 할 예수회 선교사가 처음 마카오에 도달한 것은 1557년의 일이나, 명나라가 정식으로 예수회원의 北京거주와 전교활동을 묵인하게 된 것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신부가 神宗의 윤허를 얻어 북경에 입주한 1601년의 일이었다.

 일본 키리시땅교회는 일본의 내란시대의 소란 가운데 착실히 교세를 늘려 豊臣秀吉의 집권시대에 35만의 교인을 헤아릴 정도로 급속하게 자랐다. 한편 중국교회도「明·淸교체」의 정치적 격변기를 잘 넘긴 후 청초 역대 황제들의 보호 아래 착실히 교세를 늘리고 있었다. 명·청 두 왕조에서 전교활동에 종사하던 예수회 전교신부들은 조선왕국에 대해 전교활동을 펴기도 했으나 모두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128)로마예수회 歷史硏究所 일본담당 연구원인 Juan G. Ruiz de Medina신부에 의하면, 1566년 일본예수회管區長 Cosme de Torres신부가 조선전도의 첫 계획을 세우고 Gaspar Vilela신부를 조선에 파견하려다 실패한 후, 壬辰倭亂 때 Gregorio Cespedes신부, 丁酉再亂 때 Laguna신부 등이 조선에 상륙한 일도 있었고 그 후에도 日本耶蘇會가 조선전도를 계획하고 추진하였으나 모두 열매를 맺지 못했음을 보고하고 있다(메디나신부 지음, 박철 옮김,≪한국천주교회 전래의 기원≫, 西江大 出版部, 1989). 임진왜란 당시 Cespedes신부나 Laguna신부가 시일을 달리하며 조선땅에 들어선 일이 있었으나 한반도에 그리스도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창설하지는 못하였다.129)Medina신부는 임진왜란 때 조선왕국에 그리스도신자 집단이 생겨났고, 그 후 일본으로부터 刷還되어 온 倭亂朝鮮人 俘虜敎人에 의해 아름다운 天主堂이 한반도에 지어졌음을 주장하며 한국천주교회 창설을 임진왜란기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이다(李元淳,<한국천주교회기원문제(1)>,≪국사-가톨릭교과교육자료집≫, 한국사목연구소, 1990, 1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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