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1) 천주학과 보유론적 천주신앙
  • (6) 이벽·정약용의 보유론적 천주신앙

(6) 이벽·정약용의 보유론적 천주신앙

 「走魚寺天眞庵講學」모임에서 천주서학서의 공동검토를 주도하면서, 후에 창설되는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이벽은, 그의 사상을 담은 저작이 현재 전해지는 바 없으나 실학의 집대성자라 할 정약용이 항상 우러러보던 선배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수다한 저술 가운데도 다산의 천주학 경사의 학문성향을 내포하고 있다는≪中庸講義≫에서 자주 자기의 의견이 이벽의 글을 인용한 것임을 밝혀 놓고 있어 양자의 학문관계를 짐작케 하고 있다. 즉 정약용의 천주학 이해는 이벽의 영향과 그 자신의 천주학서연구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150)丁若鏞의≪中庸講義≫여러 곳에「此本李德操之義」·「此本李曠菴之說」·「觀乎中庸以下 多李曠菴之文」·「李德操云」등의 어구가 자주 사용되고 있어 양자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우리는 정약용의 글을 통하여 이벽의 학문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정약용은 주자의 음양론과 달리「음」과「양」은 본래 형체가 없는 것이고 다만 명암이 있을 뿐이며,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51)丁若鏞,≪與猶堂全書≫2-4권, 經集 中庸講義補. 이는 음양으로 나타나는 太極이나 理가 萬物化生의 창조력을 가진 것이라는 견해를 부인한 것이다. 그는≪詩經≫에 나오는 바의 ‘唯天生民 天生蒸民 有物有則’이라는 어구를 통해 분명히 창조주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것이「天」즉 상제이며 그 상제는 인간만사를 강림하는 능력을 가진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자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인「천」즉 상제는 결코 주자의 理와 같은 선험적·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位格을 갖춘 윤리적·종교적 존재였다. 우리를 굽어 보고 재앙과 행복을 가려 주는 이러한 천=상제를「誠敬」으로써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152)丁若鏞,≪與猶堂全書≫1-16권, 詩文集 自撰墓誌銘. 그는 本然之性은 인과 물이 각기 다르며 인간과 만물은 각기 다른 천명을 타고난 것이어서 서로 바뀜이 없는 것이라 하고,153)丁若鏞,≪與猶堂全書≫2-5권, 經集 孟子要義. 주자가 인간과 만물에는 비록 기품의 멀고 가까움은 있을 망정「理」는 같은 것이라고 한 말을 반대하였다. 인간은 만물과 달리 道義之性을 가진, 즉 靈性·道心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였다.

 인간은 본래 육신의 기호(形軀之嗜好)와 영신의 기호(靈知之嗜好)를 가진 존재이다. 전자는 禽獸之性에 근거한「人心」이며, 후자는 道義之性에 근거한「道心」으로, 인간은 마땅히 인심을 절제하고 도심을 살펴가야 하며 그렇게 하는 노력이 몸을 닦고 하늘을 섬기는 길이라고 보았다. 修身事天이 內省的 修己에 의한 性之好德之命을 통한 하늘과 사람의 만남(天·人際會)의 노력인 것인데 대하여, 祭天(周禮의 示因祀上帝)은 외형적 제례에 의해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었다.154)李乙浩,≪茶山經學思想硏究≫(乙酉文化社, 1966), 62∼63쪽. 이러한 정약용의 事天의 논리는 善을 다하여 공을 쌓는 행위와「미사」의 전례155)「미사」를 중국교회에서 禰撤로 표기한다. 이는 至尊無對한 천주께 드리는 聖祭로 天主敎의 유일무이한 참 祭祀라 한다(朱在用, 앞의 책, 204쪽).에 의한 천주공경의 교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이해된다.

 물론 茶山經學은「理氣」의 宋儒說을 초극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으로 先儒說이 아니라 공맹의 경학사상의 원점에서 참된 유학의 실상을 찾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학은 새로이 유신론적 天觀세계로 이해가 미치면서 그가 구하여 읽고 있던 서학서의 천주교교리에 대해 공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천주교신앙의 세계로 들어섰다고 보여진다. 정약용에 이르러, 천주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주자학적 유학의 입장에 터전을 한 것으로부터 공맹의‘修身治人의 실천적 유학’과 古經의「상천=상제관」에 입각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것이다.156)李元淳,<朝鮮後期 實學者의 西敎意識>(앞의 책, 1986), 60∼64쪽.

 李檗이 후세에 남긴 직접적인 저술로≪聖敎要旨≫가 있다. 이 기록은―‘讀天學初函李曠菴作註記之’라는 제목 아래의 글로 보아―명나라 말기 중국의 서학자 李之藻의 한역서학서의 선별총서인≪天學初函≫을 검토하고서 그가 받들게 된 천주신앙의 가르침이 담긴 신·구성서의 내용을 논한 글이다.157)金玉姬,<曠菴 李蘗의 西學思想의 受容>(≪曠菴 李蘗의 西學思想≫, 가톨릭出版社, 1979), 163∼220쪽 참조. 그가≪성교요지≫상권에서 구약성서의 내용을 들어 천주교의 구원관을 설명하고, 신앙성서의 이해를 터전으로 하여 그리스도구속사업을 설명한 글을 보면 그의 천주신앙이 복음주의와 보유론에 입각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천주교교리서를 편술함에 있어, 선유의 상제와 事天 및 공맹의「충효」·「성경」·「인심도심설」등의 유교적 윤리사상을 널리 원용하고 있다. 正道를 강조하며 충효의 윤리적 아름다움을 들어 자애와 성실, 즉 정도실천의 덕을 설명하였다. 또한 聖道는 인심에 이미 깃들어져 있다고 보아 유가의 인심도심설과의 근사성을 강조하고「致君澤民」·「正心誠意」등의 유교적 덕행 위에「昭事上帝」할 것을 주장하는 등의 논리와,「禹湯堯舜仲閔孔孟」등 동양적 성덕의 이상인을 들어 천주교 덕행의 기준을 풀어 가는 등의 내용은 그가 경험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의식하고 수용하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한편 그의 논지를 잘 살펴보면 그 이면에는 강한 사회의식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暫世」요「逆旅」의 현실에서 영생의 정신적 구원을 위해「克己」·「復禮」할 것을 적극 권면하는 그의 논리에서, 한편 혼탁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 새로운 정신적 인간의 추구를 부르짖고 나선 義人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회의식은 바로 그 시대의 사회성의 표출이고 현실구현의 정신적 배경의 새로운 추구요 실학정신의 이색적 전개였던 것이다.

 해박한 경학의 소양을 가진 이벽이 서교서를 일독하고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의 교양과 학식이 허락치 않는 것이었다. 그가 천주교교리를 이해한 학문의 한 가닥은 그가 추구하던 유가적 경학사상이었다. 이러한 학적 배경에서 그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천주교를 수용한 것이다. 여기서 이벽의 또 한 가닥의 학문배경으로 실학적 비판정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158)李元淳, 앞의 책(1986), 6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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