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2) 천주신앙 실천과 초기교회의 발전
  • (3) 중인층의 천주신앙 수용과 활동

(3) 중인층의 천주신앙 수용과 활동

 한문으로 쓰인 이른바 한역천주교서의 연구에 의해 천주신앙을 깨우쳐 자율적으로 교회를 창설한 것이기에 교회창설 초기의 교인들은 주로 학문능력을 갖춘 양반지식인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천주교회를 창설하고 전교활동을 펴 교회발전에 헌신적이었던 초기교회의 지도적 교인들은 거의가 양반교인들이었다.170)初期信仰共同體의 지도층 문제를 집중적으로 추적 연구한 趙珖은 정조 8년∼15년(1784∼1791) 사이에 교회의 지도층 인물로 李承薰·李檗·權日身·丁若鐘·丁若銓·尹持忠·柳恒儉·洪樂敏 등 양반과 양인 李存昌과 金範禹·崔昌顯·崔必恭 등 중인출신 교인을 거명하고 있다(趙 珖,≪朝鮮後期天主敎史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8, 73쪽).

 그러나 조선교회는 양반들만의 교회는 아니었다. 중인층이 초창기부터 신앙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중인교인으로 두드러지는 인물은 金範禹·崔仁吉·崔昌顯 등 역관계 중인과 崔必恭·崔必悌·金宗敎 등의 의약계 중인이었다.

 역관은 통역이 그들 집안의 직업이었고 잡과를 거쳐 역관에 오르는 것이어서 맡은 바 일의 필요에서 한자와 유학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들의 사회적 지체는 양반을 따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상당한 학식의 소유자였다. 한편 그들은 자주 중국에 출입하거나 중국인을 접촉하는 공적 기회를 가지는 인물들이었으므로 해외의 세상 돌아가는 일과 중국학계의 동향에도 비교적 밝았다. 한편 중국땅에서 중국학자나 전교에 종사하던 서양성직자와도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조선의 전통문화와 다른 이질문화에도 강한 호기심을 가졌었고 선진문명에 대한 의욕은 다른 어느 계층보다 예민한 특수직 종사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른바「象譯貿易」171)역관은 중국에 자주 출입할 수 있는 공적 신분이었다. 그들은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八包」의 특권을 이용하여 공인된 상거래를 폈고, 상인과 결탁하여 後市활동을 통해 불법적인 무역활동을 펴 상당한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의 公·私활동을 통한 무역행위는「象譯貿易」으로 표현되었었다(李元淳,<燕行使行의 經濟史的 一考-私貿易活動을 中心으로->,≪朝鮮時代史論集≫, 느티나무社, 1992, 참조).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가진 계층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일찍부터 선각적 양반학자와 교분도 있었고 한역서학서의 도입과 검토에도 계속적으로 관계가 있었다.

 한편 의약계 중인도 한방의술과 의약을 다루어야 하는 직업적 필요에서 한자와 한학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나마 터득할 필요가 있었던 계층이었다. 또한 그들은 직업상 큰 거리에서 그들의 한약방을 내고 진료와 시약하는 일에 종사하며 각계 각층의 인사와 빈번히 접촉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사회적 감각이 비교적 예민할 수밖에 없는 계층이었다. 그들도 경제적으로는 여유있는 생활터전을 가진 기술직 중인이었다.

 이상 의관과 역관계의 중인 즉 醫譯系 기술직 중인은 흔히「下大夫一等之人」으로 표현되며「醫官之族」으로 正職을 받을 수 있는 족속들이었다.172)≪杏下述≫附錄, 輿通論. 그들은 사족이 아니면서도 卿大夫에 나갈 수 있는 신분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긍지가 있었고 학문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직분과 학문 그리고 사회성으로 말미암아 성리학체계에 대한 집착성이 덜하여 개방적 감각을 가질 수 있었고, 이질문화나 이질가치에 접근하기 편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그것을 수용하기에 서슴치 않을 진취적 가능성을 가진 계층이었다. 조선 서학의 학문적 검토가 진행되는 이 시기는 이들 의약계 중인들이―성리학적 인간관과 사회체제로 경색되어 숨막힐 듯한 사회분위기에서의 탈출하고자 하는―신분상승을 위하여 노력하고 나아가 일부에서「通淸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委巷文學運動」도 태동하기 시작한 때였다.173)기술직 중인의 委巷文化運動에 대하여는 鄭玉子,<朝鮮後期의「文風」과 委巷文學>(≪韓國史論≫4, 서울大 國史學科, 1978) 참조.

 이러한 역사적 추세에 따라 일부 선각적 중인들이 현실보다는 내세에, 물질보다는 정신에, 인습보다는 진보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가치, 새로운 종교를 찾아, 새로 들어온 종교인 천주교에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교조화되다시피 한 성리학체제가 무너져 가는 과정이 진행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그들을 천주신앙의 수용으로 치닫게 한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가해지는 시련과 조상의 제사문제에 직면하여 신문화운동의 차원에서 보유론적 천주신앙을 가지고 천주교운동에 가담했던 양반출신의 교회영도세력들이 탈락한 후의 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제2의 한국천주교 주도세력이었다.174)李元淳,<朝鮮後期社會中人層의 西敎受容>(앞의 책), 103∼1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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