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 3) 천주교박해와 지하교회로의 발전
  • (1) 천주교박해의 역사적 배경

(1) 천주교박해의 역사적 배경

 천주신앙이 조선 후기 사회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종교사적으로 새로운 또 하나의 신앙이 조선사회에 들어서게 되었다는데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신앙에 터전을 한 새로운 가치체계의 수용이었기에,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인간생활 전면에 영향을 주게 되는 광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전통사회의 위정자들과 유교지식인에게는 그것이 사상적 위험과 사회적 독소와 정치적 도전을 결과할 것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단지 정통사회인의 생리적 반발이나 종교적 반발로만 단정할 수 없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사상사의 측면으로 논할 때, 국초 이래의 조선 유교세력의 闢異精神에 입각한 척사위정사상의 비성리학체계에 대한 탄압의 한 국면이 천주교 신앙에 대한 가혹한 박해를 이끌게 된 것이다.

 조선왕국의「闢異端」·「衛正學」의 벽이정신은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이요 정교이념 정립의 주동자이던 鄭道傳의「排佛揚儒論」에 그 사상적 단서가 연유되는 것이나, 그것은 척불정책으로 끝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후 조선왕조의 유교적 봉건지배세력은 정도전의 벽이정신을 더욱 확대 경화시켜 불교만이 아니라, 그 밖의 일체의 비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해서도 正·邪의 이원원리에 입각하여 이를 배격 탄압하게 되었다.191)洪以燮,<朝鮮儒家의 斥邪論에 對하여>(≪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1959).

 正學·正敎·正道로 성리학적 유학을 신념화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邪學·邪敎·邪道로 단정짓는 흑백논리로 경직된 벽사위정사상은 그 후 시대에 흐름에 따라 대상을 달리하면서 격렬하게 異敎·異學에 반응하였다. 조선 국초의「척불운동」, 조선 중기의「양명학 변척운동」, 조선 후기에「천주교박해」와「동학탄압」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취해진 벽사위정사상의 격렬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천주교는 성리학의 사변성과 당색성이 고질화되다시피 한 조선 후기에 들어오게 된 異學·異道·異敎로 이질성이 매우 뚜렷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전통 유가집권세력의 천주교박해는 혹독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것이 주로 집권세력의 정적세력이던 남인들에 의하여 전파된 사상이었기에 정쟁에 이용되어 거듭 유혈이 낭자한 박해로 되었던 것이다.

 둘째, 사회사적 측면에서도 천주교박해의 역사적 이유를 생각하여야 한다.

 천주교박해와 관계있는 여러 가지 기록―척사상소문이나, 臺諫 대책문 또는 斥邪綸音―을 통람하면 천주교도를 단정하기를 ‘無父無君之徒’192)李晩采,≪闢衛編≫권 3, 大司憲 申耆의 上疏나 그 밖의 斥邪上疏나 斥邪綸音에 가장 흔히 사용되는 天主敎에 대한 邪敎用語이다.·‘禽獸之徒’193)李晩采,≪闢衛編≫권 5, 신유 정월 11일, 辛酉治邪 大王大妃傳敎.·‘悖倫亂常之徒’194)李晩采,≪闢衛編≫권 4, 乙巳以後錄工曹判書 李家煥上疏.라 하였으며, 천주교를 ‘絶倫悖常之敎’195)李晩采,≪闢衛編≫권 3, 諸罪人處分 全羅監司鄭民始以持忠尙然招辭狀啓.니 ‘荒誕怪說 不經之外道’196)李晩采,≪闢衛編≫권 7, 三道治邪 斥邪綸音.니 ‘悖倫滅法 自陷於夷狄禽獸之敎’197)李晩采,≪闢衛編≫권 2, 辛亥珍山之變左相蔡濟恭啓辭.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논란에서 천주교 수난의 사회적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해자들이 상술한 바와 같이 천주교를 규정하게 된 주된 이유는 그들이 조선사회의 전통적 예속인 拜孔祭祖를 거부하고 毁祠·廢祀를 서슴치 않은 교도들의 전통적 예속생활의 거부에도 있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계급과 문벌을 초월한 평등과 사랑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계급차별·서얼차대·문벌중시에 입각한 조선사회의 봉건적 지배질서의 파탄을 야기케 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천주교에 있어서의 성직자의 독신제 또는 童貞女의 존재를 그릇 해석한 데 있었던 것이다.198)天主敎聖職者는 독신생활에 의한 자기 봉헌이 의무였으며, 童貞女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하여 육신과 가족을 끊어버리는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권장사항이었다. 한편 천주교에 귀의하는 계층이 양반·중인·상민 등 각 계층에 걸쳤으며, 특히 일반서민과 부녀자가 많았으므로 위정자로서 사회적 기우가 앞섰던 것도 사실이었다.

 위와 같은 점에서 박해자들은 천주교가 성리학적 계급질서에 터전을 한 유교적 조선사회를 근본으로부터 손상케 할 위험을 내포한 도전적 사고체계로 의식했던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그러한 위험의 조짐이 보였으며 조선 유교사회를 잠식하고 파괴하는 음모가 전개되고 있다고 보아 단호히 천주교도의 박멸과 교설의 삼제를 위해 학살을 자행하는 참극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유교적 집권당사자들은 조상제사의 거부를 廢祭→無父無君→棄倫→禽獸의 논리로써 규정하고 천주교도를「금수의 무리」로 몰아 이를 박멸하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셋째로, 정치적 사연도 천주교박해의 참극과 무관치 않다.

 100여 년에 걸쳐 한국천주교회를 엄습한 박해는 순전한 종교적 사건의 연계라고 규정하기보다 정쟁이 빚어낸 참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권의 쟁탈 내지는 정권연장을 위한 투쟁이 박해의 배경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이른바 3대박해라는 辛酉·己亥·丙寅迫害를 통관하면 박해자들은 전통적 예속생활의 파괴이거나 ‘意毁程朱’의 ‘悖理之外道’니 또는 ‘蔑倫亂常之敎’니 하면서 척사위정을 부르짖고 잔악한 살육을 자행하였으니 이는 박해를 합리화하려는 한갓 포장이며, 실은 박해자들이 자신의 집권 지속을 위한, 또는 정권탈취의 야욕 달성을 위한 수단에서 빚어졌던 비극이기도 했다.

 즉 순조 원년의 신유박해는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좌우하게 된 김대비가 僻派의 충동을 받아 南人時派와 老論時派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꾀한 데서 벌어진 학살극이었고, 헌종 때의 기해박해는 순조 말년경부터 연유되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쟁탈의 난동 가운데 발발된 교난이었다. 한편 고종 때의 흥선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는「以夷制夷」의 꿈을 그리며 천주교 접근책을 취함으로써 유림과 반대정객들로부터‘西敎通謀者’로 논단될 거세의 위기에 봉착한 위정자가 이 위기를 미연에 대비하고 집권의 지속을 꾀한 정치적 타산에서 벌인 참변이었다.

 붕당의 정쟁, 세도가문에 의한 세도정치, 그리고 이어진 대원군 집정은 조선왕조 후반기를 결정지은 정치적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천주교회 수난의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당쟁격화·세도쟁탈·집권야욕과 더불어 주목되어야 할 또 하나의 정치적 요인은, 서구식민주의 열강의 침략적 접근으로 인하여 조성되는 집권당사자의 국가적 위기의식의 문제였다.

 헌종 12년(1846) 이른바 병오박해가 전개되기에 앞서 巡威島에서 체포된 金大建신부가 조선교도들과 같이 투옥되었을 때, 프랑스 동양함대사령관 Cécil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홍주 앞바다에 나타나서 기해박해 때 살해된 세 프랑스 성직자(Imbert주교와 Maubant·Chastan신부)에 대해 문책하는 국서를 전한 일이 있었다. 이 국서 때문에 열렸던 묘당회의에서 영의정 權敦仁은 프랑스함대가 내항하게 된 정세를 다음과 같이 분석 보고하였다.

邪術이 유행하여 사람들이 많이 浸染되오니 이번 佛艦이 온 것도 이들 무리들의 유인 소치일까 하옵니다. 이는 ‘蕭墻의 變’일까 하옵니다(≪憲宗實錄≫권 13, 헌종 12년 7월 무술).

 이 때 국왕도 “이에는 반드시 조선인으로 맥락 상통하는 자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김신부의 치죄를 논하는 최후의 묘당회의인 熙政堂 御前會議에서도 권돈인은 국권의 권위를 선명히 밝히기 위해 중형으로 처리할 것을 주장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뒷날 의외의 일이 생기게 되며, 사학의 무리들이 오랑캐와 더불어 ‘간과 창자가 서로 얽히듯 하여도 막지 못할 것(肝肚之相連腸不可掩)’이라고, 김대건을 위시한 사학도들의「通外」의 사실을 성토하면서 중신의 의견을 묻고 있다.199)≪日省錄≫161책, 헌종 12년 7월 25일. 이에 우의정 朴晦壽는 邪徒와 프랑스의「聲氣」가 서로 통하여 세실이 내항하였고, 나아가 오만한 문책의 국서를 전하게 된 것이라고 사태를 분석하여 사학도들이 기운을 더하고 빙자함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 것인지 모르겠으니 시각을 지체할 일이 아니라 극형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200)위와 같음. 그리하여 마침내 김대건은「梟首警衆」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 당시 정부당사자들은 김대건과 천주교도들을 외세와 부동한「通外分子」거나「蕭墻之變」을 조성하는 위험분자로 단정하고 있었다. 사실 영국 식민침략세력이 청나라에서 도발한 아편전쟁에 관한 정보나, 그리스도신앙을 표방하였던 洪秀全의 太平天國의 亂의 어지러움 등은 사대사행원들의 귀국보고로 속속 국내에도 알려져201)阿片戰爭의 소식은 헌종 8년 4월 回還 冬至使行 書狀官 韓必履의 首譯 吳繼續의 聞見別單으로 알려졌고(≪日省錄≫ 101책, 헌종 8년 4월 9일), 南京條約으로 인한 香港의 영국할양도 사행원에 의해 알려졌다(≪日省錄≫ 114책, 헌종 8년 12월 4일). 太平天國의 난에 관한 정보도 철종 9년 回還告訃使 書狀官 安喜壽의 聞見別單(≪日省錄≫139책, 철종 9년 정월 2일)과 賚咨官 李尙健의 보고(≪日省錄≫154책, 철종 9년 12월 4일), 北京回還冬至使 書狀官 金直淵의 聞見別單으로 알려졌다(≪日省錄≫158책, 철종 10년 3월 20일). 事大外交使行員에 의해 청국에 대한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은 쇄국 조선왕국에 계속 알려져 위기의식과 대외경각심을 높여 주고 있었다. 서구침략국가에 대한 의구심이 조선왕국 조야에 차차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 프랑스인 학살에 대한 문책의 군사시위가 벌어지므로 쇄국조선의 집정당사자들은 이를 심각한 국가위기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프랑스와 부동하는 천주교도들은 발본색원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던 것 같다.

 동양전통사회에 고난을 강요하는 서구식민세력은 인도차이나와 청국을 거쳐 마침내 조선왕국에도 미쳐왔다. 철종대에 빈번한 이른바「異樣船」202)서양의 異樣船이 종래 조선사람들이 대하던 배의 모습과 너무나 판이하기에 이렇게 불렀다. 지방관의 狀啓나 問情記나 묘당에서의 논의에서까지 국적불명의 서양함선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荒唐船」으로 불릴 때도 있었다.의 조선해역 출몰이란 침략적 접근을 현실화시켜 조선왕국으로 밀고 들어옴으로써, 쇄국조선의 위정당국자들이 품게 되는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통외분자」나「招寇之徒」에 대해 철퇴를 가하여 국가위기가 조성될 내적 위험을 근본부터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천주교도 색출과 살륙의 박해를 감행하게 된 것이다. 병오박해 때만이 아니라 고종 3년(1866)부터 6년간에 걸쳐 강행되며, 8천명에 가까운 생령이 희생당하는 병인박해의 경우에도 천주교도에 대하여「招寇」와「賣國」·「潛通聲氣」로 성토하고 있다. 그 척사논리 가운데 담긴 국가적 위기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

 병오박해 이전에 ‘以夷制夷의 防俄策’을 건의하였다가 謀叛不道로 참수형을 받게 되는 南鐘三의 結案에 “감히 賣國之計를 품고, 비밀리에 招寇의 뜻을 품고 모역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203)≪丙寅罪人鍾三鳳周等鞫案≫. 남종삼만이 아니라 이러한 생각은 천주교도 누구나가 품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왕대비는 ‘聲氣를 潛通’ 하는 그러한 무리들이 더욱 널리 세상에 퍼지지 않게 양인과 통화하는 무리를 사찰하도록 지시하였다.204)≪高宗實錄≫권 3, 고종 3년 정월 24일 大王大妃敎. 뿐만 아니라 천주교도로서 洋夷와 연결하는 자를 색출하여 先斬後啓토록 하명되었다.205)≪高宗實錄≫권 3, 고종 3년 정월 24일 議政府啓.

 천주교도를「초구·통외」의 위험분자로 단정하여,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조선왕국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위험시하고 극력 경계하는 태도는 이처럼 정부당국자들만의 위기의식은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척사위정을 주장해 온 유림세력의 정치의식이기도 했다. 丙寅洋擾로 프랑스함대의 강화도 침공전이 벌어졌을 때 호남유림의 거두였던 奇正鎭은 다음의 상서로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외국과 서로 통함은 없지 않을 일이라 하나 이들 오랑캐는 곧 비상한 妖氣인지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여 천하가 모두 그 속에 들게 하였으나, 오로지 그에 물들지 않고 깨끗함은 우리 나라만인지라 우리 나라를 눈 속의 가시처럼 여겨 백방으로 틈을 노리며 반드시 우리와 통교하고자 하니 여기에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이 국토를 탐하기를 서슴치 않음은 우리 나라를 附庸시키고자 함이요, 우리의 산물을 탐하는 일이며, 우리 겨레를 노예로 삼고자 함이고, 우리 남녀를 獵色코저 함이며, 우리 국민을 금수로 삼고저 함이요 만일 이들과 한 번 통교를 트게 되면 2·3년 안에 전하의 백성들은 서양오랑캐로 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라(≪高宗實錄≫권 11, 고종 3년 8월 16일).

 그러므로 결단코 서양과 통교할 수 없으며 통외자는 招寇之律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국가적 위기, 민족적 위기가 천주교도들의「통외」·「잠통」·「초구」로 말미암아 조성되었다는 인식에서, 국가보위와 민족자존을 위하여 천주교도를 철저히 탄압 소멸하여야 된다는 정치의식에서, 천주교박해는 더욱 거세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100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봉건모순의 확대로 동요하는 유교봉건사회에서 새로운 삶을 희구하여 천주교에 모여드는 서민대중은 그치지 아니하니 박해정책 아래서도 지하교회는 계속 그 교세가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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