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4. 불교계의 동향
  • 1) 승단내의 수학경향
  • (2) 이력과정의 확립

(2) 이력과정의 확립

 조선 후기 불교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履歷이라 부르는 僧伽교육과정의 확립이다. 조선 말기에 정리된 자료를 통해 볼 수 있는 과정은 대략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기초적인 의례에서부터 고도의 경전과 禪語錄까지 수학하도록 되어 있으니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235)李能和,≪朝鮮佛敎通史≫하(新文館, 1919), 989∼990쪽.
이 자료는 1911년 寺刹令시행에 따라 1912년 各寺本末寺法이 제정되자 제8장 僧規의 行解에 普通科와 專門科를 두고 전문과는 必須科目과 隨意科目으로 나눈 중에 필수과목의 내용이다. 수학기간이나 과목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아서 사미과를 3년으로 하는 경우나 대교과를 3년 6개월로 하는 경우에는 ( ) 안의 과목을 추가하였다(위의 책, 1147∼1149쪽).

沙彌科 (1년) 十戒 朝暮誦呪 般若心經 初心文 發心文 自警文 (沙彌律儀 緇門警訓) 四集科 (2년) 禪源諸詮集都序 大慧書狀 法集別行錄節要 高峰禪要 四敎科 (4년) 首楞嚴經 起信論 金剛經 圓覺經 大敎科 (3년) 華嚴經 禪門拈頌 傳燈錄 (十地論 禪家龜鑑 法華經) [隨意科]   기타 任其本人之根基 以爲隨意所修

 이러한 이력과정은 조선 후기 불교 전반에 미친 영향과 마찬가지로 서산의 사상경향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서산의 사상경향은 그가 지은 碧松智嚴의 행장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서산은 지엄이≪大慧語錄(書狀)≫과≪高峰語錄(禪要)≫을 수학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36)休靜,≪三老行蹟≫, 碧松堂大師行蹟(≪韓國佛敎全書≫7, 752쪽 하).
그러나 다른 판본에는 이 내용 대신≪도서≫와≪절요≫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고 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어 이들 기술이 四集을 염두에 두고 빚어진 차이가 아닌가 생각된다(위의 책, 753쪽 纂註).
若導初學 則先以禪源集別行錄 立如實知見 次以禪要語錄 掃除知解之病 而指示活路也(李能和, 위의 책 상, 450쪽은 이를 게재한 것이다).
≪서장≫은 臨濟義玄의 12대손으로 간화선을 제창한 大慧宗杲(1089∼1163)의 저술이고≪선요≫는 임제의 18대손인 高峰原妙(1238∼1295)의 저술로서 모두 임제종풍을 선양한 것들이다. 그런데 지눌이 지은<초심문>을 비롯하여 그가 견성하였다는≪대혜어록≫이나 중요하게 여겼던≪도서≫와≪절요≫그리고≪화엄경≫등은 이력과정의 바탕에 지눌의 사상경향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서산은≪서장≫과≪선요≫와 같은 중국 조사의 어록을 배우는 것을 성리학을 집대성한 程子와 朱子가 孔孟을 계승함에 비유하고 있다.237)休靜, 앞의 책, 753쪽 상. 그런데 서산이 활동하던 시기는 退溪 李滉(1501∼1570)과 栗谷 李珥(1536∼1584)가 나서 성리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조선화해 가는 때이었다. 이와 같은 성리학의 진전이 불교계에 미친 영향을 서산의 언설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주자성리학의 이해에서 한 단계 나아가 조선성리학의 문호를 연 율곡은 성리학의 이념을 학습하기 위한 교재를 체계화시켜 小學에서 시작하여 大學·論語·孟子·中庸·詩經·禮經·書經·易經·春秋의 5書 5經 그리고 선현의 性理之書로 이어지는 순서를 제시하였다.238)李 珥,≪栗谷全書≫권 27, 擊蒙要訣 讀書章 4 (≪韓國文集叢刊≫45, 85∼86쪽). 이와 같은 성리학교재의 체계화는 불교의 이력과정 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인 성리학 수학이 서당에서 7년을 배우고 그 다음에 지방의 鄕校나 서울의 四部學堂에서 5년 정도를 배우며 이어서 成均館에서 3년을 배우는 기간과 이력의 기간도 대체로 일치한다.

 이와 아울러 고려할 것은≪釋門喪儀抄≫와 같은 승가의례서의 정리이다. 碧巖覺性이 지은 이 책은 승려의 服喪에서부터 제문에 이르기까지 상·제례의 내용을 조목별로 하나하나 체계화한 것이다.239)覺性,≪釋門喪儀抄≫상·하(≪韓國佛敎全書≫8, 237∼243쪽). 이와 거의 유사한 내용의≪釋門家禮抄≫가 懶庵眞一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벽암의 편찬과 동일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들 의례서는 성리학적 질서유지와 교화를 위한 규범으로서 성리학의 의례서가 집중적으로 편찬되고 일반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의례가 영향을 미치었던 이 시기에≪朱子家禮≫와 같은 예서의 체계에 자극되어 승가의 의례를 정비한 것이었다.

 이력과정이 어느 시기에 확정되었는지 분명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서산의 사상경향과 성리학의 영향 그리고 서산의 제자인 鞭羊彦機가 화엄·법화·원각·능엄·반야·범망 등의 경전과 전등록·염송·선요·서장·도서 등의 전적을 간행하여 여러 산사에 홍포한 사실240)彦機,≪鞭羊堂集≫권 2, 經板後跋(≪韓國佛敎全書≫8, 255쪽 중).을 종합해 보면 서산에서 그의 직계제자에 이르는 시기에 이력의 대체적인 윤곽은 거의 자리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편양이 경전을 간행할 때에도 포함되어 있고 지엄이 임종하기 전에≪法華經≫方便品을 강의하였다고 서산이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시기에는≪법화경≫을 중시하는 경향이 병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후기에는≪법화경≫이 기본 이력과정에서 제외된다. 이것은 송대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程朱 등의 성리학자들이 화엄의 理事說과 法界觀에 대해 언급한 것들241)侯外廬 主編,<中唐華嚴宗和禪宗的唯心主義思想>(≪中國思想通史≫권 4, 北京, 1961).이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인식되고 나서 화엄을 불교철학의 으뜸으로 여기는 추세가 불교계에도 반영되어 생긴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후기의 교단은 강원과 선원, 염불원 등이 갖추어진 총림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강원에는 法主(또는 講士)라고 불리던 講主를 중심으로 講師·仲講·論講 등의 직임을 맡은 승려가 이력과정을 이끌었으며, 이들의 원활한 수학을 위해 外護역할을 맡은 院主·化主·別座·米監·書記·園頭·供司·菜供·負木 등과 內護역할을 맡은 秉法·鍾頭·侍者·看病·知賓·淨桶·淨頭·剃頭·磨糊·奉茶 등의 소임이 조직되어 있었다. 한편 禪院에는 禪主를 중심으로 首座·立繩·維那·侍佛 등의 직임과 외호역할을 맡은 원주·화주·별좌·미감·서기·원두·공사·채공·부목 등의 소임 그리고 내호역할을 맡은 秉法·獻食·司察·時警·侍奉·看病·知賓·淨桶·淨頭·剃頭·磨糊·鍾頭·奉茶 등의 소임이 조직되어 수행하였다.242)南都泳,<韓國寺院敎育制度>中(≪歷史敎育≫28, 1980), 35∼36쪽 및 63∼64쪽.

 그리고 염불이 성행하여 1만일 동안 칭명 염불하며 정토왕생을 희구하는 萬日念佛會가 자주 베풀어졌다. 연담유일이 영조 49년(1773)에 열린 蓮池萬日會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243)有一,≪林下錄≫권 3, 蓮池萬日會序(≪韓國佛敎全書≫10, 261쪽).이 그 구체적 사례인데, 이 밖에도 건봉사와 망월사 등에서 수차 만일염불회가 개최되었다. 특히 건봉사는 순조와 철종년간 그리고 고종 말년에 이르기까지 세 번이나 만일회가 개최된 대표적인 염불도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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