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4. 불교계의 동향
  • 2) 강경의 성행

2) 강경의 성행

 영조대 이후의 조선 후기 불교계에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크게 두드러진 講經활동이다.≪화엄경≫강의를 수십 차례나 하고 화엄소초의 어려운 부분을 풀어낸≪華嚴隱科≫를 저술하여 후학의 길잡이가 된 부휴문파의 晦菴定慧(1685∼1741)와, 역시 25회의≪화엄경≫강의를 하고 澄觀의≪華嚴疏抄≫의 疏科를 일일이 찾아서 발현하고 순차를 그림으로 표시한≪은과≫를 저술한 서산문파의 雪坡尙彦(1707∼1791)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리고 雪巖秋鵬(1651∼1706)과 회암정혜는 각각≪都序≫와≪節要≫에≪私記≫를 남겼다.

 이러한 성과를 계승하여 蓮潭有一(1720∼1799)은 설파에게서 화엄경을 수학한 이후 30여 년 동안을 강경에 전념하였다. 연담은 양인의 은과에다 다른 講伯들의 강설을 채집하고 자신의 의사를 붙여 주석한≪사기≫를 저술하였는데,≪화엄소초≫에 담긴 뜻이 호한하고 이론전개가 장황한 것을 교의와 본분적인 면을 종합하여 명료하게 간추려서≪華嚴玄談私記≫를 지은 것이다. 연담은≪화엄사기≫이외에도 四集과 四敎 전과정의 교재에 대한 사기를 지었고, 이렇게 이루어진 사기는 이후의 강경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후학들에게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특히 연담의≪화엄사기≫는 교의를 명료하게 집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징관소초의 틀렸거나 잘못 들어간 것 그리고 빠진 글자를 정밀히 교정하였으며 識數行相에도 밝아 이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후학들의 큰 지침이 되었다.244)李英茂,<蓮潭私記를 통해 본 朝鮮時代의 華嚴學>(≪韓國華嚴思想硏究≫,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82).

 화엄강의의 성행은 일찍이 이루어졌으니 서산의 문손인 楓潭義諶(1592∼1665)이 화엄을 강의하였고 부휴의 문손인 暮雲震言(1622∼1703)은 숙종 12년(1686)에 雲浮精舍에서 화엄법회를 크게 열고<華嚴七處九會品目之圖>를 저술하여 화엄학의 기치를 드높였다. 부휴의 다음대 문손인 栢庵性聰(1631∼1700)은 선암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고 풍담의 제자인 霜峰淨源(1627∼1709)과 月渚道安(1638∼1715)도 화엄강의를 하였다. 월저의 다음대인 喚惺志安(1664∼1729)은 금산사에서 화엄법회를 크게 열어 1,400명이나 되는 많은 대중이 모인 결과로 인해 무고를 당해 제주로 유배가서 목숨을 잃을 정도로 왕성한 형세를 보였으며, 부휴계에서는 無用秀演(1651∼1719)과 회암정혜가 화엄강맥의 대를 이었다. 다음대에서는 好隱有璣(1707∼1785)와 霜月璽篈(1687∼1767)이 맥을 이었고, 그 다음대에서는 설파와 연담 외에도 影波聖奎(1728∼1812)와 雪潭自優(1709∼1770)의 세 제자들인 雲潭·春潭·花潭 등으로 화엄강의는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대둔사에는 풍담에서 연담에 이르는 12大宗師와 영파·운담을 포함하는 12大講師의 전통을 가졌고, 인근 만덕사에도 소요에서 아암에 이르는 8대종사의 전통을 이어 왔었다. 이와 같은 화엄강의의 성행은 앞서 언급한 성리학계의 화엄인식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연담은 黙菴最訥(1722∼1795)과 심성론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묵암이 제불과 중생의 마음이 각각 원만하나 동일체는 아니다라고 한데 대해, 연담은 각기 원만하기는 하지만 그 근원자리는 동일체라고 다르게 보았다.245)有一,≪林下錄≫권 3, 心性論序(≪韓國佛敎全書≫10, 262∼263쪽). 후기 교학의 중요한 쟁점이었을 이 심성론논쟁은 그러나 언설에 의한 논쟁이 후학들에 의해 지속되어 본의를 어지럽힐까 염려하여 관련자료를 전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연담은 유교사상과 비교하여 교리를 설명하기도 한다. 연담은 극락은 염불로써만 왕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같은 仁義慈善의 마음이 지극한 純善人이 왕생하는 것이며, 반대로 부처에 대한 비방만이 아니라 不忠·不孝·奸凶·悖逆이 모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어서, 만일 천당이 있다면 군자들이 올라가는 곳이요 지옥이 있다면 소인배들이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246)有一,≪林下錄≫권 4, 上韓綾州必壽長書(≪韓國佛敎全書≫10, 283쪽).

 연담과 쌍벽을 이루었던 강백이 仁嶽義沾(1746∼1796)이다. 인악은 벽봉에게서 금강·능엄 등을 배우고 설파에게서는 화엄을 수학하였다. 인악도 사교와 화엄 등의≪私記≫를 지었는데 연담과 다소 다른 이해를 보이는 이들 사기는 강백을 따라 제각기 전승되면서 오랫동안 서로 독특한 학풍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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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조선후기 승려 계보
<표 1>조선후기 승려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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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악은 정조 14년(1790) 思悼世子의 현륭원 원찰로 龍珠寺가 창건되자 여기에 證師로 참여하여 佛腹藏文과 龍珠寺祭神將文 등을 저술하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인악은 또 유교와 도교를 포용하여 불교와 융화를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심성합리를 일물로 보는 특이한 심성론도 보였다.247)智冠,<蓮潭 및 仁嶽의 私記와 그의 敎學觀>(≪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 1975).

 이들보다 반세기 뒤에 활동한 草衣意恂(1786∼1866)은 또 다른 경향을 보였다. 초의는 불교학에 정통한 것은 물론, 丁若鏞을 통해 유학에도 깊은 이해를 가졌고 당대의 대표적 문사인 洪奭周라든가 申緯·金正喜 등과 詩文으로 교유하며 새로운 학문에 대한 소양도 넓혔다. 초의는 승려로서는 드물게 차와 원예와 梵字·梵唄·서화 등의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소양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의 새로운 학문경향과 길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활발한 교학 분위기를 통해 승가의 내적 역량이 축적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당대를 주도하는 학문경향에 부응하던 진전된 의식을 초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승려들이 새로운 경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데는 다산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蔡濟恭이 雪坡의 도성출입을 돕고 그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하였는데, 다산은 연담과 교분을 갖고 그를 출가승려의 대표적 인물로 높이 평가하였다. 다산은 순조 원년(1801)에 서학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는데, 5년 뒤에 兒庵慧藏(1772∼1811)이 인근의 만덕사 주지로 오게 되자 불경은 물론≪주역≫·≪논어≫에 통달하였던 아암과 주역에 대한 토론 끝에 각별한 교분을 갖게 되어 순조 18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환향할 때까지 많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분위기를 이루어 놓는다. 순조 13년에는 그 자신이≪挽日庵志≫를 편찬하고, 이어서 그의 지도하에 아암혜장과 袖龍賾性·騎魚慈弘 사제로 이어지는 만덕사계 승려들과 玩虎倫佑와 草衣意恂·縞衣始悟 사제로 이어지는 대둔사계의 연담문손들이 함께≪大芚寺志≫를 편찬하도록 하며, 다시 鶴林 李田靑과 慈弘應彦 白下謹學 鼇岳勝粲 등 승속이 힘을 모아≪萬德寺志≫를 편찬하도록 지도하였다.248)崔柄憲,<茶山 丁若鏞의 韓國佛敎史 硏究>(≪丁茶山硏究의 現況≫, 1985).
다산은<智異山僧歌示有一>에서 출가생활하는 연담의 고승다운 인품을 묘사하고,<題蓮潭詩>에서는 ‘蓮潭大師有一者 我東緇林之華也’라고까지 칭송한다. 다산은 또한<東林寺讀書記>에서 스님의 스님 노릇하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승가를 이해하는 면모도 드러낸다.
그리고 다산은 아암혜장은 물론 아암의 제자들과도 교유를 가졌으니 그 중의 하나인 기어자홍에게 “불법이 비록 誑誕하나 그 말하는 바가 眞妄有無之相이 있는 것은 우리 儒家의 本然과 氣質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贈騎魚慈弘言>)라고 할 만큼 유불을 포용하는 견해로 승려들을 이끌었다.

 다산은 특히 삼국시대 불교전래로부터 신라 말까지의 불교사자료를 정리한≪大東禪敎考≫를 지었는데, 전반부는 편년체 형식에 따라≪三國史記≫의 자료를 토대로 자신의 의견까지 붙여 禪敎始末편을 이루었고 후반부는≪傳燈錄≫과≪四山碑銘≫·≪海東佛祖源流≫등에서 가려낸 승려 141인의 인명을 자료에 따라 열거하였다. 다산은 여기에서 나말 선종사자료로서<사산비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해동불조원류≫보다 정확한 고증과 합리적인 해석을 보였으며 고려 초의 법안종을 높이 평가하는 등 우리 나라의 고대불교사자료에 대해 최초로 본격적인 검토를 함으로써 큰 의미를 남겼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다 생생한 자료를 전해주는≪삼국유사≫를 배제하고≪삼국사기≫와 같은 자료에만 의지하여 고대불교사를 정리하려 한 인식의 한계와≪해동불조원류≫의 고증의 부실을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에 크게 의지한 결과 수많은 오류를 보인 문제점들이 지적된다.249)崔柄憲, 위의 글, 333∼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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