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4. 불교계의 동향
  • 3) 승려문집의 성행

3) 승려문집의 성행

 서산과 쌍벽을 이루는 浮休善修(1543∼1615)의 문하 또한 서산문파 못지 않게 번성하였는데, 부휴의 제자인 碧巖覺性(1575∼1660)이 남한산성의 축조 등 국가적 활동을 활발히 한 이래 특히 부휴문파에서 문사들과 두드러진 교유를 보였다. 벽암의 제자인 翠微守初(1590∼1668)는 국가적 활동에 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승려의 본분을 잊지 않도록 다짐하면서 한편으로 趙重呂(1603∼1650)나 李安訥(1571∼1637), 李植(1584∼1647), 金堉(1580∼1658), 林有後(1601∼1673) 등과 같은 문사들과 긴밀한 교유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그 제자인 栢庵性聰(1631∼1700)은 임자도에 표착한≪金剛經疏≫·≪持驗記≫·≪華嚴疏抄≫·≪三藏法數≫·≪華嚴玄談≫·≪緇門警訓≫·≪起信論疏≫등 경전 190여 권을 모아 숙종 21년(1695)까지 5천판에 새겨 교학 융성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인데, 문사들과의 교유가 한층 두드러져 金壽恒(1629∼1689)과 鄭斗卿(1597∼1673), 南龍翼(1628∼1692), 吳道一(1645∼1703), 趙宗著(1631∼1690), 金錫冑(1634∼1684), 崔後尙과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와 시문을 주고 받았다. 벽암의 제자인 無用秀演(1651∼1737) 역시 명망 있는 문사들인 崔錫鼎(1645∼1715), 李光佐(1674∼1740), 崔昌大(1669∼1720), 李眞儒(1669∼1730), 林象德(1683∼1719), 金昌翕(1653∼1722)과 같은 이들과 교유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교유는 승려들이 문사들과 시문을 화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고 나아가서 문사들이 문집을 간행하는 것을 본뜬 제자들에 의한 승려문집의 간행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숙종대에 들어서 매우 활발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淸虛休靜 1520∼1604


靜觀一禪 1533∼1608
暎虛海日 1541∼1609
浮休善修 1543∼1615
松雲惟政 1544∼1610
霽月敬軒 1544∼1633
靑梅印悟 1548∼1623
奇巖法堅   ∼1594∼
雲谷沖徽   ∼1613
懶庵眞一   ∼1636∼
逍遙太能 1562∼1649
中觀海眼 1567∼
詠月淸學 1570∼1654
碧巖覺性 1575∼1660
鞭羊彦機 1581∼1644
翠微守初 1590∼1668
虛白明照 1593∼1661
白谷處能   ∼1680
枕肱懸辯 1616∼1684
智禪     ∼1652∼
暮雲震言 1622∼1703
寒溪玄一
霜峰淨源 1627∼1709
栢庵性聰 1631∼1700

雲峰大智   ∼1686∼
月峰策憲   ∼1703∼
明衍     ∼1704∼
智還     ∼1709∼
月渚道安 1638∼1715
楓溪明察 1640∼1708
石室明眼 1646∼1710
雪巖秋鵬 1651∼1706
無用秀演 1651∼1719
禪家龜鑑1 三家龜鑑3 心法要抄1 禪敎釋1 禪敎訣1 說禪
儀1 淸虛堂集7 精選四家錄1 續眞實珠集1 三老行蹟1 雲
水壇1<回心曲>
靜觀集1
暎虛集4
浮休堂集5
四溟堂大師集7 奮忠紓難錄1
霽月堂大師集2
靑梅集2
奇巖集3
雲谷集1
釋門家禮抄2
逍遙堂集1
中觀大師遺稿1 (竹迷記) 華嚴寺事蹟1 金山寺事蹟1
詠月堂大師文集1
(禪源集圖中決疑) (看話決疑) 釋門喪儀抄2
鞭羊堂集3
翠微大師詩集1
虛白集3 僧家儀禮文1
白谷集2 任性堂大師行狀1
枕肱集2
梵音集2
華嚴品目問目貫節圖1
寒溪集1
都序分科2<節要科文><水墮寺事蹟>
栢庵集2 淨土寶書1 淨土讚2 緇門警訓註3 四經持驗記4
起信論筆削記會編4
心性論1
月峰集3
念佛普勸文1
水陸齋儀梵音刪補集3
月渚堂大師集2<佛祖宗派圖>
楓溪集3
百愚隨筆1 般若心經略疏連珠記會編2 法會禮懺儀式1
雪巖雜著3 雪巖亂藁2 都序科評2 (節要私記)<妙香山誌>
無用堂遺稿2

<표 2>숙종 이전 승려저작(초)

숫자는 권수(≪韓國佛敎全書≫수록분).< >는≪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에 현존 표기분, ( )는 未傳分.

 그리고 영조대에 들어서면 강경의 성행에 따른 교학의 융성을 기반으로 승려들의 저술과 문집간행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는 숙종대에 四集을 비롯한 불서의 간행이 수차에 걸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사원이 대소규모로 중창되어 그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가 20여 개나 세워지는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사원중창과 사적비 건립은 영조대에도 계속되어 10여 개를 헤아리며 특히 전대에 비해 佛殿의 중창이 늘어나고 불화조성이 30여 개를 헤아릴 만큼 크게 증가하여 이 시기 불교계의 활발한 움직임을 말해주는데, 문집간행도 이러한 추세를 따르고 있다. 숙종에서 영·정조로 이어지면서 조선 고유의 眞景文化가 창출되고 문예진흥이 활기차게 이루어지던 문화기반은 이와 같이 승려들의 문집도 성행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진경시대 문예진흥의 면모는 사원의 외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임진·병자 양란을 치르고 나서 산성 축조를 맡았던 팔도도총섭 벽암각성은 완주 송광사와 화엄사·쌍계사의 재건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사원중창의 길을 열었다.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은 금산사 대적광전(숙종 12:1686)·화엄사 각황전(숙종 28) 같은 대규모 중창사업을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고 흥국사(인조 2:1624)의 재건에는 지방의 관리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하였다. 전란으로 무너진 사원의 형세를 복구하는데 일차적으로 중심 전각의 복원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창사업은 효종·현종대에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250)李康根,<17世紀 佛殿의 再建役>(≪美術史硏究≫208, 한국미술사학회, 1995), 49∼60쪽.

 숙종에서 영정조대를 지나면서 전대의 1차적인 중창에 이어 2차 중창사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는 사원의 규모가 보다 충실해지고 더욱 활기찬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금산사 대적광전(숙종 12)을 비롯하여 화엄사 각황전·관룡사 대웅전(숙종 28)·불국사 대웅전(영조 41:1765)·해인사 대적광전(영조 45) 등 많은 당우가 중창되었다.251)尹張燮,≪韓國의 建築≫(서울大 出版部, 1996), 421∼491쪽. 현존하는 사원건축의 대종을 이루며 주요한 유산으로 내려오는 바탕을 마련한 대가람의 웅장한 건축물들이 대체로 이 시기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원중흥의 형세가 법통의 확정에 따른 문파의 강조와 함께 규모를 재정비한 사원의 내력과 당시의 성세를 기록하려는 사적비의 건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법당의 재건은 불교문화의 난만한 진전도 가져왔으니 먼저 내부에 봉안하는 佛像조성으로 이어졌다. 현종대의 화엄사 대웅전 삼존상, 숙종대의 마곡사 영산전의 칠존상·파계사 원통전 관음상, 영조대의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삼존상, 정조대의 용주사 대웅전 삼존상 등이 계속 조성되어 이들 불상들이 진경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불상과 아울러 초기에 많이 그려지던 불전의 벽화는 이 시기에 들어 이동이 가능한 후불탱화로 대치되어 佛畵의 난만한 발전을 보였다. 이와 동시에 거대한 掛佛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괘불을 걸어 놓고 水陸齋나 薦度齋 등의 대규모 법회를 갖는 기회가 많아졌으며, 사원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업이 추진될 수 있는 재정이 뒷받침되었음을 의미한다.252)崔完秀,≪名刹巡禮≫1·2·3(대원사, 1994).

喚惺志安 1664∼1729
無竟子秀 1664∼1737
影海若坦 1668∼1754
頭輪淸性
聖能     ∼1724∼
虛靜法宗 1670∼1733
南岳泰宇   ∼1732
松桂懶湜 1684∼1765
晦庵定慧 1685∼1741
霜月璽篈 1687∼1767
涵月海源 1691∼1770
箕城快善   ∼1764
大輝     ∼1748∼
月波兌律 1695∼1771
龍潭慥冠 1700∼1762
楓岳普印 1701∼1769
好隱有璣 1707∼1785
雪坡尙彦 1707∼1791
雪潭自優 1709∼1770
野雲時聖 1710∼1776
鰲岩毅旻 1710∼1792
龍巖體照 1717∼1779
大圓   1714∼
黙菴最訥 1717∼1790
秋波泓宥 1718∼1774
蓮潭有一 1720∼1799



獅巖采永   ∼1764∼
碧潭譓諶   ∼1782∼
振虛捌關   ∼1769∼
月城費隱 1778∼
括虛取如 1720∼1789
沖虛指冊 1721∼1809
蒙庵箕穎
道峰有聞
雲潭鼎日 1741∼1804
鏡巖應允 1743∼1804
仁嶽義沾 1746∼1796

華嶽知濯 1750∼1839
澄月正訓 1751∼1823
玩虎倫佑 1758∼1826
楓溪賢正   ∼1821∼
海鵬展翎   ∼1826
白坡亘璇 1767∼1852


兒庵慧藏 1772∼1811
月荷戒悟 1773∼1849
草衣意恂 1786∼1866

華潭敬和 1786∼1848
鐵船惠楫 1792∼1858
暎虛善影 1792∼1880
應雲空如 1794∼1826
涵弘致能 1805∼1878
梵海覺岸 1820∼1896

優潭洪基 1822∼1881
雪竇有炯 1824∼1889
涵溟太先 1824∼1902
竺源震河 1861∼1925
奉琪
克庵師誠 1836∼1910
華曇法璘 1843∼1902
鏡虛惺牛 1849∼1912
混元世煥 1853∼1889
幻空治兆   ∼1870∼
正觀承宣   ∼1878∼
華甘知稀
淸虛休靜 1520∼1604


靜觀一禪 1533∼1608
暎虛海日 1541∼1609
浮休善修 1543∼1615
松雲惟政 1544∼1610
霽月敬軒 1544∼1633
靑梅印悟 1548∼1623
奇巖法堅   ∼1594∼
雲谷沖徽   ∼1613
懶庵眞一   ∼1636∼
逍遙太能 1562∼1649
中觀海眼 1567∼
詠月淸學 1570∼1654
碧巖覺性 1575∼1660
鞭羊彦機 1581∼1644
翠微守初 1590∼1668
虛白明照 1593∼1661
白谷處能   ∼1680
枕肱懸辯 1616∼1684
智禪     ∼1652∼
暮雲震言 1622∼1703
寒溪玄一
霜峰淨源 1627∼1709
栢庵性聰 1631∼1700

雲峰大智   ∼1686∼
月峰策憲   ∼1703∼
明衍     ∼1704∼
智還     ∼1709∼
月渚道安 1638∼1715
楓溪明察 1640∼1708
石室明眼 1646∼1710
雪巖秋鵬 1651∼1706
無用秀演 1651∼1719
龍岳慧堅
草堂
丁若鏞  1762∼1836
金大鉉    ∼1870
禪門五宗綱要1 喚惺詩集1
無竟集2 無竟室中語錄2 佛祖眞心禪格抄1<寶鏡三昧1>
影海大師詩集抄1 (文集3)
(頭輪堂詩集1)
<仔虁文節次條例>
虛靜集2
南岳集1
松桂大禪師文集3
都序科記2 節要私記1 (華嚴疏隱科) (諸經論疏句絶)
霜月大師詩集1
天鏡集3
請擇法報恩文1 念佛還鄕曲1
<梵音宗譜1>
月波集1
龍潭集1
<楓岳堂集1>
好隱集4 新編普勸文1
(華嚴淸凉疏隱科) (鉤玄記)
雪潭集2
野雲大禪師文集3
鰲岩集1
龍巖堂遺稿1
大圓集1
黙菴大師詩抄3 諸經會要1 (華嚴科圖1) (心性論3)
秋波集3 秋波手柬1
都序私記1 節要私記1 林下錄4 釋典類解1 (書狀私記)
(禪要私記) (楞嚴私記) (起信蛇足) (金剛鰕目)<圓覺私
記2>(華嚴遺忘) (玄談私記) (拈頌著柄) (諸經會要) (心
性論)
佛祖源流1
四溟堂枝派根源錄1
三門直指1 振虛集1
月城集1
括虛集1
沖虛大師遺集2
蒙庵大師文集2
法性偈科註1
<林間錄1>
鏡巖集3
仁嶽集3<書狀私記><楞嚴私記><起信私記><金剛私
記><圓覺私記><華嚴私記><拈頌記>
三峰集1 (風使錄2)
澄月大師詩集3
大芚寺志
日本漂海錄
<壯遊大方錄1>
禪文手鏡1 修禪結社文科釋1 作法龜鑑2<六祖壇經要
解><太古庵歌科釋><五宗綱要私記><禪要記><金剛
八解鏡><拈頌私記>
兒庵遺集3
伽山藁4
禪門四辨漫語1 艸衣詩藁2 茶神傳1 東茶頌1 震黙大師
遺蹟攷1<二禪來儀>
八陽經註1
鐵船小艸1
櫟山集1
遺忘錄1
涵弘堂集2
東師列傳6 梵海禪師文集2 梵海禪師詩集2 (緇門記) (四
碑記) (遺敎經記) (四十二章經記)
林下錄1 禪門證正錄1
禪源溯流1 山史略抄1
<緇門私記>
禪門再正錄
少林通方正眼1
克庵集3
聾黙集1
鏡虛集1
混元集1
淸珠集1
濟衆甘露4
般若心經註解1
禪家龜鑑1 三家龜鑑3 心法要抄1 禪敎釋1 禪敎訣1 說
禪儀1 淸虛堂集7 精選四家錄1 續眞實珠集1 三老行蹟1
雲水壇1<回心曲>
靜觀集1
暎虛集4
浮休堂集5
四溟堂大師集7 奮忠紓難錄1
霽月堂大師集2
靑梅集2
奇巖集3
雲谷集1
釋門家禮抄2
逍遙堂集1
中觀大師遺稿1 (竹迷記) 華嚴寺事蹟1 金山寺事蹟1
詠月堂大師文集1
(禪源集圖中決疑) (看話決疑) 釋門喪儀抄2
鞭羊堂集3
翠微大師詩集1
虛白集3 僧家儀禮文1
白谷集2 任性堂大師行狀1
枕肱集2
梵音集2
華嚴品目問目貫節圖1
寒溪集1
都序分科2<節要科文><水墮寺事蹟>
栢庵集2 淨土寶書1 淨土讚2 緇門警訓註3 四經持驗記4
起信論筆削記會編4
心性論1
月峰集3
念佛普勸文1
水陸齋儀梵音刪補集3
月渚堂大師集2<佛祖宗派圖>
楓溪集3
百愚隨筆1 般若心經略疏連珠記會編2 法會禮懺儀式1
雪巖雜著3 雪巖亂藁2 都序科評2 (節要私記)<妙香山誌>
無用堂遺稿2
龍岳堂私藁集1
草堂集1
大東禪敎考1<挽日庵志>
禪學入門2 述夢瑣言1

<표 3>영조 이후 승려저작(초)

숫자는 권수(≪韓國佛敎全書≫수록분),< >는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에 현존 표기분, ( )는 未傳分.

 이들 문집은 대체로 유사한 체제를 보이고 있어서 몇 가지 문집의 분석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부휴의 4대손인 無用秀演은≪無用堂遺稿≫2권을 남겼다. 제자들이 엮은 이 문집은 상권에 오언절구 4편과, 칠언절구 21편, 오언율시 16편, 칠언율시 37편 등 모두 82수의 시를 싣고 있다. 하권은 친교하던 문사들이나 지방수령들과 주고 받은 書 13편과, 경전 등을 간행한 序 4편, 여러 사찰의 중건에 즈음한 募緣文과 上樑文 7편, 건물을 새로 세우고 쓴 記 7편, 수륙재나 기타 행사에 대한 疏 5편, 그리고 선대 조사의 祭文 3편을 싣고 있다. 무용이 시문을 주고 받은 당대의 대표적 문사인 김창흡이나 최창대 등은 그들의 문집에서 역시 무용과 주고 받은 글을 찾을 수 있어, 이 시기 승려와 문인 사이에 이루어진 교유관계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무용의 神觀은 ‘일상적인 공부가 다만 마음을 거두고 풀어놓는 데 있을 뿐이라(日用工夫 只在收放心而已)’는 표현과 같이 평상심 속에서 마음을 닦는 것이었고 특히 ‘庭前栢樹子’와 같은 전통적인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었다.253)秀演,≪無用堂遺稿≫권 하, 上谷城倅·聖祈庵上樑文;권 상, 賽規上人之求話(≪韓國佛敎全書≫9, 353·357·345쪽). 그리고≪반야심경≫이 반 장밖에 안되는 적은 분량으로 글이 간략하지만 대장경의 모든 이치를 포괄하고 있어서 제불의 모체요 만법의 근원이라 할 만하다든가≪법화경≫이 부처가 있든 없든 항상 존재하여 그 자리를 내줄 수 없는 중요한 경전이며≪因明論≫의 宗·因·喩 三支나 現量·比量의 판단으로 제경론의 의의를 규명하여 심성의 본의를 깨우쳐야 한다는 것 등은 단편적이나마 그의 교학관의 일면을 보여준다.254)秀演,≪無用堂遺稿≫권 하, 心經疏記會編序·開興寺水陸齋晝疏(≪韓國佛敎全書≫ 9, 355·362쪽).
――,<重刊因明論跋>(1711년 개판≪因明入正理論解≫, 규장각도서 古1730-93).
이 밖에도 종밀의≪華嚴法界觀門≫을 중간하거나≪梵音集≫을 새로 간행하면서 쓴 발문이나≪염송설화≫ 간행문 그리고 행사 관련 다른 글에서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세간의 소유물은 우리를 험한 구렁으로 밀어 넣는 도구일 뿐이요 일념으로 서방을 발원하는 염불만이 의지할 바라는 말에서는 무용수연의 정토관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白居易와 같은 인물에 비유하여 충군하고 효친하며 仁民愛物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토로 회향하면 金色身으로 왕생할 수 있으리라고 儒者에게 권유하는 면모도 보인다.255)秀演,≪無用堂遺稿≫권 하, 寄崔正言書(≪韓國佛敎全書≫9, 351쪽). 무용의 문집을 통해서도 삼학수행의 풍토를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무용과 교유를 가졌던 인물 중에 특이한 이가 三淵 金昌翕(1653∼1722)이다. 당대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나 성리학의 정수에 통달하였으나 형인 夢窩 金昌集이나 農巖 金昌協처럼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지 않고 평생을 금강산을 중심으로 전국을 주유하며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으며 지냈던 隱逸之士 삼연은 자연 많은 사찰에 머물며 여러 승려와 교유를 가졌다. 그의 문집인≪三淵集≫에는 불교와 관련된 시가 323수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53수가 승려와 관련된 것이며, 丹丘일기·雪嶽일기·嶺南일기를 비롯한 기행문에도 사찰을 탐방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삼연은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불교는 眞妄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妙用이라 하여 원만함은 알지만 모가 남을 알지 못한데 비해 유교는 원만함에서 사물의 법칙인 모남을 안다고 비교하고, 주자와 율곡이 일찍이 불교를 잘 알아 유교와 불교의 분별에 가장 뛰어난 것처럼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 분별에 자못 뛰어남을 자부하였다.256)金昌翕,≪三淵集≫拾遺 권 31, 語錄(≪韓國文集叢刊≫, 167, 281∼282쪽).

 涵月海源(1691∼1770)은 서산의 5대손으로≪天鏡集≫3권을 남겼다. 함월은 영상 金相福(1714∼1782)이 비문을 짓고 봉조하 南有容(1698∼1773)과 대제학 黃景源(1709∼1787)이 眞贊을 지으며 문집의 서문을 洪敬謨(1774∼1851)가 쓸 만큼 유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의 상권은 오언절구 88수와 칠언절구 35수 그리고 오언율시 17수와 칠언율시 77수로 모두 합쳐 217수의 시로 이루어졌다. 중권은 사찰의 중창기를 중심으로한 記 10편과≪원각경≫·≪금강경≫·≪기신론≫·≪선문오종강요≫ 등의 여러 경전간행을 비롯한 序 11편 그리고 書 1편과 스승 환성의 제문 1편으로 이루어졌다. 하권은 사적이나 행장 등의 잡저 4편과 제문 1편 齋疏 등의 소 10편 그리고 상량문 등의 문 4편과 序 1편으로 이루어졌다.

 함월은≪금강경≫이 사람마다의 그대로 드러난 본래면목이라 한다거나 기신론이 斷常의 二執을 타파하여 중도실상의 이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성현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유교의 春秋와 대비시켜 소개하여 교선에 두루 밝은 면을 보이지만,257)海源,≪天鏡集≫권 중, 重刻金剛經疏記序·重刊起信論筆削記序(≪韓國佛敎全書≫9, 619·620쪽). 그가 이채롭게 내세운 견해 중의 하나가<二禪涇渭錄>에서 말하는 네 가지 선에 대한 구분이다. 즉 함월은 총림의 승려들이 格外禪 중에 如來禪과 祖師禪이 있고 圓頓門이 곧 義理禪이라고들 말하지만, 여래선과 조사선은 설한 사람에 따라 나눈 이름이요 의리선과 격외선이란 설한 법에 따라 나눈 구분이므로 그 구분 근거가 다른 이름을 한데 섞어 논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선과 교의 事體는 얼음과 목탄처럼 형상이 다른 것이나 그 法體는 파도와 물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본질이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258)海源,≪天鏡集≫권 하, 二禪涇渭錄(≪韓國佛敎全書≫9, 625쪽 상·중). 이는 순조대 이후에 전개된 三種禪 논쟁의 핵심주제를 이미 한 세기 전에 간명하게 정리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비중있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문집간행과 더불어 이 시기에 불교사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먼저 영조 40년(1764)에 월저의 5대손인 獅巖采永은≪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를 편찬하였다. 3년간에 걸친 각 문파의 문헌수집 끝에 이루어진≪佛祖源流≫는 과거칠불로부터 인도와 중국의 조사와 우리 나라의 역대 조사의 원류를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 사암은 여기서 고려 말에 중국의 임제종을 계승한 나옹파를 수록하기는 하였으나 태고를 ‘海東正脈第一祖’로 내세우고, 조선 후기 이후에는 서산과 부휴계의 각 파를 정리하였는데 특히 서산을 임제정맥 24세로 보고 이를 ‘海東禪脈正傳’이라 표현한 서산계 중심의 편찬이었다.259)采永,≪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韓國佛敎全書≫10, 100∼134쪽). 이는 불교사를 전체적으로 정리한 첫 저술이었지만 태고 이전의 고려까지의 승려를 모두「散聖」으로 처리하여 임제종을 이은 正傳과 구분하는 불교사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大東禪敎考≫는 삼국의 불교시말과 여러 자료에서 가려낸 승려 141인의 인명을 열거한 것이다.260)丁若鏞,≪大東禪敎考≫(≪韓國佛敎全書≫10, 505∼514쪽). 다산은≪불조원류≫보다 정확한 고증과 합리적인 해석을 보였으나 전대 자료의 인용에서 오는 오류는 여전하였으며,≪삼국유사≫를 배제하고≪삼국사기≫에만 의지하는 인식의 한계도 드러냈다.

 雪竇有炯(1824∼1889)은 고종 원년(1864)에≪山史略抄≫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석가의 생애에서 시작하여 불교의 제반 사항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특히 인도에서 중국·조선으로 이어지는 불교사를 포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유형이 삼국에서 고려불교까지를 소략하게 서술하고 태고보우에서 서산을 거쳐 자신의 문파인 백파에 이르는 계보를 간략하게 서술한 조선불교사는 서산문파의 인식을 잘 보여주며, 유교의 불교에 대한 비판에 반론을 제시하고 인도의 불교사를 정리하는 등 자신의 일정한 불교관에 따라 불교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의의를 지닌다. 특히 용어와 불교행사 및 의례에 대해 자세한 설명과 주석을 붙인 것이 독특한데, 카스트의 四姓을 사·농·공·상의 四民에 견주어 해석하고 그 가운데에 승려의 역할도 설정하는 등 당대의 인식을 반영하는 불교사서이다.261)山史(有炯),≪山史略抄≫(≪韓國佛敎全書≫10, 678∼689쪽).
金南允,<朝鮮後期의 佛敎史書≪山史略抄≫>(≪同大史學≫1, 동덕여대 국사학과, 1995).

 梵海覺岸(1820∼1896)은 고종 31년(1894)에≪東師列傳≫6권을 편찬하였다. 아도화상으로부터 당대에 활동한 승려까지 포괄하는 198인의 전기를 담은 이 책은 앞서의 두 사서와 달리 편을 세운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량의 서술을 빠짐없이 베풀었다.262)覺岸,≪東師列傳≫권 1∼6 (≪韓國佛敎全書≫10, 995∼1075쪽). 그러나 수록인물이 그가 활동하던 대둔사 위주로 짜여 있고 내용의 명확한 검증이 부족한 등의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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