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4. 불교계의 동향
  • 5) 국가적 활동
  • (2) 승역의 추세

(2) 승역의 추세

 17세기 이후에는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徭役制가 점차 동요되면서 요역의 물납세화가 진전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는 군역의 布納化 그리고 軍役稅 개편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동법의 실시로 요역은 물납세로 개편되고 지방요역은 잡역세로 개편되어 갔으며, 요역이 아직 있기는 하나 그 운영에는 변화를 보여 지방관의 역민에 제한이 가해지고 부역대가로 役糧이 지급되며, 그 요역마저도 현물이나 화폐로 대납하는 것이 보편화되는 추세이었다.

 그런데 비해 僧役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295)윤용출, 앞의 책, 129∼139쪽. 더구나 승역은 일시적인 부담이 아니라 상례적이고 고정적인 역이 되어 갔으니 이는 승역의 강화를 통해 역제를 재편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처럼 승역이 강화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良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시 피역의 무리로 인식되었던 승려의 억제가 지속적으로 필요하였으며, 양란 이후 농민경제의 안정책으로 인해 농민의 징발이 어려워지게 되자 농사철과 무관하게 수시로 징발이 가능한 승도의 노동력에 주목하게 되었고, 기율이 엄정하고 근실하며 고된 작업도 능숙하게 해내는 役僧의 노동력에 대한 질적인 우수성 인식이 도리어 승역을 강화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민간의 부역노동은 쇠퇴하는 대신 사회적으로 천시되던 승도들을 국역체계에 재편성하여 종래 민호가 부담하던 요역노동을 대신하려 하였고, 요역 대신 시행된 募軍에 지출하는 재정부담 때문에도 무상으로 강제징발이 가능한 승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물론 승군의 징발은 관부가 장악하였고, 부역승군의 통제는 領役部將의 지휘하에 내부에 領僧·首僧을 임명하여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승려들은 각종 역사에 赴役軍으로 동원되어 山陵役과 築城役 또는 산성·제언의 축조에도 징발되었다.296)윤용출, 위의 책, 141∼172쪽.

 산릉역으로는 인조 8년(1630)부터 영조 33년(1757)까지 23회에 걸쳐 매회마다 750∼3,600명의 승군이 동원되었고, 삼남 특히 전라·경상도에서 7∼8할이 징발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 승도가 많았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7세기 중엽 이후에 같이 동원되던 군인과 요역농민은 징발이 폐지되었으나 승군만은 18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것이다.

 궁궐의 조영사업에는 광해군 13년(1621)부터 현종 8년(1667)에 이르도록 6회에 걸쳐 매회 950∼2,840명이 동원되었는데, 현종대 이후 궁궐역에서 승도가 사라진 것은 도성출입금지의 억불책과 관련이 있다.

 義僧은 남북한산성에 각 350명씩 立役하는 것으로서 이는 의승 자신은 물론 사찰피폐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산성도 승병을 편성하여 수축하고 수호하게 하였으니, 인조 18년과 숙종 44년(1718)에 거듭 수축된 무주 赤裳山城과 숙종 36년에 수축하여 유승을 모아 僧軍을 편제한 龜城府城 그리고 영조 7년에 경상 65읍에서 7,901명을 징발하여 쌓은 東萊府城과 정조 19년(1786)에 戊申亂의 반군을 방수하기 위해 요해인 속리산에 승군을 편제한 것들이 그 주요한 것들이다.

 그 밖에도 군현의 승역 사역이 큰 부담이 되었고 이들 승역이 사찰몰락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승역의 강화에 따라 승도의 피역도 심화되자 승역의 강화는 한계에 이르게 되고 사찰의 부담능력 또한 약화되어 승역도 완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조 33년을 마지막으로 산릉부역은 종식되고, 지방부역은 식량을 자담하던 것이 급량으로 바뀌었으며 의승 上番役이 영조 32년에 番錢代納制 즉 義僧防番錢으로 바뀌고 국가 大役에 징발도 폐지되었다. 한편 승도를 모아 役糧과 자재를 수집하는 방편으로 공명첩을 급여하였는데, 이는 신분제에 기초한 부역노동 강화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鄭炳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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