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5. 민간신앙
  • 1) 도교·도참신앙
  • (1) 국가도교의 쇠퇴

(1) 국가도교의 쇠퇴

 도교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국가의식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였으며 정치적·사회적 중요성도 잃었다. 특히 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齋醮儀式297)조선 초기에 행해진 齋醮의 종류로는 성수초, 태양성·화성초, 남·북두초, 금성초, 태음초, 진무초, 직성초, 형혹기초, 혜성기초, 개복신초, 청명초, 도병초, 기우초, 본명초재, 진병초, 삼원초, 삼계초 등이 있다.은 유교적 이념과 이에 따른 정치적 질서를 추구하던 유신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건국 초에 태조는 圓壇을 한강 서쪽에 설치하고 강화도 摩尼山에도 단을 설치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냈다. 그리고 靈星壇과 老人星壇을 서울 南郊, 즉 청파역 부근에 두었다.

 원단에서의 제사는 태종 때 중단되었다. 고려 이래 도교신에 대한 醮祭를 관장하던 昭格殿은 세조 12년(1466)에 그 규모가 축소되어 昭格署로 개칭되었고, 중종 13년(1518)에 三司에서 이를 파하도록 청하고 부제학으로 있던 趙光祖가 상소로써 간하여 잠시 혁파되었다가 곧 복구되었는데, 결국 임진왜란 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298)소격서는 한성부 북부 鎭長坊에 있었다(≪東國輿地勝覽≫). 이 곳은 지금의 삼청동이다. 三淸殿에서는 七星·玉皇·老君·天尊·帝君·閻羅 등의 도교신을 모셨다. 마니산 단은 인조 17년(1639)에 이를 수리하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임란 이후에도 폐지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경상도 善山府에서 서쪽 5리 떨어진 곳에 祭星壇이 있다. 고려 때 南極老人星이 이 곳에 나타났다고 하여 매년 봄가을의 中氣日을 정하여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에 들어와 폐지되고 지금은 석단만 남아 있다.299)≪增補文獻備考≫권 61, 祭壇 1, 祭明星辰. 제성단은 함흥부 남쪽 40리의 都連浦에도 있다. 태조가 등극한 후 太白星에 제사지내기 위해 창설하여 매년 단오절 中貴人을 보내 御衣와 鞍馬로 致祭하였으나, 후에는 本宮別差로 儀仗을 설치하고 치제하였다.

 충청도 문의현 九龍山 마루에 노인성전 터가 있다. 老人星祭는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노인성에 드리는 도교제례다. 노인성이란「남극성」·「壽星」·「壽老人」·「남극노인」 등으로 불리는 별로 도교에서는「南斗」라고 부른다. 고려 때는 도교식 초제로 제사지내다가 조선에 들어와서는 郊社의 제례, 즉 星辰에 대한 제사의 하나로 지내 그 성격이 바뀌었다.

 ≪漢京識略≫祠廟條에는 “木覓神祠가 남산 꼭대기에 있어 해마다 봄과 가을에 초제를 지낸다”고 하였다. 목멱신사란 國祀堂(또는 國師堂)을 말한다. 당 안에 화상이 있는데, 속칭 神僧 無學大師의 초상이라고 한다.≪東國輿地備攷≫에는 목멱산에서 초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 순조년간까지는 이 곳에서 초제를 지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식적인 국가행사로서의 도교의식은 조선 후기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도교는 역사상 교단이 형성된 적이 없으므로 더욱 그 실체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현상 어디서나 ‘도교적’ 요소는 발견된다. 정치적 혼란기에 살았던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양생법, 신선사상 등 도교에 근원을 둔 지식들이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한 형태로 남아 있었고, 특히 임란 후에는 關帝信仰의 유입으로 關王廟가 설립되는 등 도교신앙이 잔존하였거나 또는 새롭게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광무 원년(1897)에 圜丘壇이 건립되고 五星과 二十八宿을 종향하는 등 국가도교가 일시적으로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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