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5. 민간신앙
  • 2) 기타 민간신앙
  • (1) 군·현제의

(1) 군·현제의

 조선 초기 이래 중앙정부가 지방통치 수단의 하나로 군·현에 설치하거나 시행한 祭儀로는 社稷祭·城隍祭·厲祭·祈雨祭·鄕校釋奠禮 등이 있다. 또한 지방에 따라서는 향리들의 주관으로 ‘府君堂’에서 부군제가 행해졌다. 그러나 성황제 등은 중앙에서 설정했던 당초의 실시 목적과 어긋나게 지방토호들이 여전히 여기에 개입하였으므로 중기에 이르러 이 제의의 폐지가 건의되고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 토호가 배제되는 등 군민행사로는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사직제를 지내는 사직단은 성 서쪽에 두었으며 社·稷이 단을 함께 하고 石柱와 配位는 없었다. 봄·가을로 그리고 文宣王 釋奠 때 이 곳에서 제사를 올렸다. 현종 때 황해도와 전라도의 모든 읍에 제목이 각각인 사직위판에 대한 개조를 명한 것이나, 영조 7년(1731)의 교지에 사직위판을 주머니에 담아 매달아 놓는 미신적 행위를 지적한 것319)≪增補文獻備考≫권 54, 禮考 1, 社稷. 등, 그리고 민간에서 后土神·后稷神 등이 동제의 대상신으로 등장하는 현상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이 제의에 대한 변형이 지역적 차원에서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성황은 주로「서낭」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에 민간화된 제의의 전형이다. 이규경은 ‘仙王堂’이라는 것은 성황을 잘못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320)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43, 華東淫祀辨證說. 군·현제의로서의 성황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사족들에 의해 淫祀로 몰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폐기되거나 유명무실해졌다. 그 대신 이것은 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촌락이 성장·확대되어 가면서 촌락단위의 행사로 주변화되어 갔다.

 여제는 厲疫 즉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인 厲鬼 또는 無祀鬼神에게 지내는 제사다. 민간화된 성황당에는 토지신·성황신·여역신의 3위를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은 군·현 단위의 사직제·성황제·여제가 마을 단위의 행사로 주변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 같다.

 기우제 역시 문헌상으로는 국가나 군·현의 사직단에서 행한 것으로 제사 날짜가 따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고 날이 가물 때만 지냈으며, 응답이 있으면 입추 후에 報祀를 하였다.321)李肯翊,≪燃藜室記述≫별집 권 4, 祀典典故 諸壇. 기우제 말고도 비가 많이 올 경우에 지내는 祈晴祭도 있었는데, 모내기철에 가뭄이 심한 우리 나라의 기상 사정으로 인해 기우제가 주로 행해졌다. 丁若鏞은≪牧民心書≫에서 당시의 수령들이 가뭄을 만나면 짚으로 용을 만들어 朱土를 칠하고 여러 아이들이 이것을 끌면서 매질하여 욕을 보이게 하고, 도랑을 파헤쳐 냄새를 풍기게 하기도 하고, 뼈를 묻으면서 주문을 외게 하기도 하는 등 기기괴괴한 짓을 하였다고 지적하였다.322)丁若鏞,≪牧民心書≫권 7, 禮典 祭祀.

 先牧·馬社·馬步壇 등도 재앙과 여역을 물리치기 위해 조선 초기에 정부에서 각 고을에 명하여 고을 중앙에 만든 단이다. 酺壇은 마보단과 같은 곳에 위치하며 酺神을 향사하였다. 각 고을의 포제는 포신을 단상 남향에 설치하고 邊과 豆는 각각 4개씩 놓았다.323)李肯翊,≪燃藜室記述≫별집 권 4, 祀典典故 諸壇.
≪增補文獻備考≫권 63, 禮考 10, 諸壇 3 先牧馬社馬步.

 ≪東國歲時記≫에는 3월의 풍속으로 충청도 淸安縣의 國師神祀를 소개하고 있는데, “현의 首吏가 읍인들을 끌고 동면 장압산 위의 큰 나무에서 국사신 부부를 맞아 읍내로 들어온다”고 하여 지금은 마을제로 행해지는 이 행사가 원래는 향리가 주관하던 현 단위 제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臨瀛誌≫에 의하면, “이 날은 국사신을 배송하는 날인 5월 5일이다. 戶長이 바야흐로 성황사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라는 기사를 통해서도 강원도 강릉의 단오제가 갖는 군·현제의적인 성격을 찾을 수 있다.324)洪錫謨,≪東國歲時記≫, 5월 端午.
江陵文化院,≪臨瀛誌≫(≪臨瀛文化≫15, 1991).

 충청도 진천군의 풍속에 매년 3월 3일부터 4월 8일까지 아녀자들이 무당을 데리고 牛潭堂·東西龍王堂 및 三神堂에 가서 아들 낳기를 빌었는데, 모인 사람들로 시장을 이루었다고 한다.325)洪錫謨,≪東國歲時記≫, 3월 3일.

 경상도 고성군에 있는 사당에는 매월 삭망일에 관아 주관으로 제를 지냈는데, 신의 가면을 만들어 당 안에 두었다가 臘月에 그 신이 읍에 내렸다고 하여 가면을 쓰고 관아와 읍내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면 각 가정에서는 이를 맞아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326)洪錫謨,≪東國歲時記≫, 12월 月內.

 군·현의 읍성은 대부분 산을 등지게 마련인데, 흔히 이 뒷산을 鎭山이라고 한다. 진산이란 陽氣를 진호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풍수설에 의한 풀이일 뿐이고, 이 산이 갖는 중요한 기능은 군사상 자연의 방어책이 된다는 점에 있다. 전라도 연해에 있는 네 곳의 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부안현이나 그 아래 지역의 고창현은 이러한 특성을 갖는 지역으로 각각 17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石檣」이라는 풍수물이 읍성에 건립되었다. 당시의 사정을 감안할 때 이 곳에 이러한 풍수물이 세워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濫伐에 의한 수재의 발생에 있었던 것 같으며, 이것은 읍성의 확장에 따른 인구의 증가 및 집중화와 이로 인한 생태적·경제적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327)鄭勝謨,<조선시대 석장(石檣)의 건립과 그 사회적 배경>(≪泰東古典硏究≫10, 泰東古典硏究所, 1993).

 석장은 고려 이후 조선 중기까지 주로 읍성을 단위로 건립되던 풍수물인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것 대신 주로 솟대(또는 짐대)가 장승 등과 함께 읍성 대신 마을 단위로 건립되었다. 즉 이것 역시 군·현 단위의 제의가 마을신앙화 또는 민간신앙화 한 조선 후기적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