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1. 학술의 진흥
  • 2) 인쇄문화의 발달

2) 인쇄문화의 발달

 고려시기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 조선조에 들어서도 태종 3년(1403) 癸未字가 주조된 이후 庚子字(세종 2:1421), 甲寅字(세종 16), 庚午字(문종 2:1452), 乙亥字(세조 원년:1455), 甲辰字(성종 15:1484), 癸丑字(성종 24), 癸酉字(선조 6:1573) 등 조선 초·중기 여러 차례에 걸쳐 활자가 주조되었다. 이런 활자주조는 국가 주도에 의한 것이었으며 금속활자가 자주 주조됨으로써 조선 초기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서적의 종류가 늘어나게 되었다. 다만 16세기에 들어서서는 목활자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다. 조선 초기 이래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을 다시 목판으로 복각하여 간행하는 일도 많았다. 이것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소수의 부수를 인쇄한 뒤 다시 지방의 관아 등에서 필요에 따라 행한 경우가 많았다. 서적의 수요가 증대하였기 때문인데 이런 현상 역시 16세기 이후 많아졌다. 이런 수요의 증대는 서적의 상품화까지 초래하였다. 이것은 16세기의 사회경제 및 유통경제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이래의 인쇄문화의 발전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많은 활자가 유실되었으며 인쇄기술자도 사망이나 왜병의 납치 등의 이유로 줄어들고 금속활자를 주조하기에는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다.363)조선 후기 인쇄문화의 발달과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震檀學會,<活字>(≪韓國史≫近世後期篇, 제14장 1절의 3항, 乙酉文化社, 1965).
孫寶基,<韓國印刷技術史>(≪韓國文化史大系≫5,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5).
金斗鍾,≪韓國古印刷技術史≫(探求堂, 1981).
尹炳泰,≪朝鮮後期의 活字와 冊≫(汎友社, 1992).
金東旭,<坊刻本에 對하여>(≪東方學志≫11, 1970).
이리하여 임진왜란 직후에는 국가에서 금속활자 대신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주무부서도 교서관이 아니라 재정과 인력의 여유가 있었던 훈련도감이 맡았다. 여기서 만들어진 글자체는 대체로 갑인자·경오자·을해자 등 조선 초기 이래의 금속활자체를 모방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대신한 목활자의 사용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서적인쇄에 힘을 기울여 인쇄활동은 곧 임진왜란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광해군 10년(1618)에는 다시 금속활자를 주조하게 되었다. 이것을 戊午字라고 한다. 다만 이 무오자는 李适의 난 또는 병자호란에 의해 소실되어 정부에서는 다시 목활자를 사용하였다. 보다 본격적인 금속활자의 주조는 현종대에 金佐明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밖의 洛東契에 의해 개인차원의 활자주조도 이루어져 숙종 3년(1677)≪현종실록≫을 간행할 때에는 낙동계의 활자를 일부 차용하였다.

 이 시기 금속활자의 주조가 이미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점이 주목된다. 아울러 한번 활자의 주조가 이루어지면 장기간 동안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조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초·중기에 걸쳐 한번 주조된 활자가 장기간 사용되지 않은 것은 글자체에 대한 취향의 변화라든가,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외에 장기간 사용하면 글자가 마모가 심하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를 장기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마모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기술이 발전하게 된 것은 상평통보 등 동전의 주조와 관련이 있다. 동전주조와 더불어 금속주조의 기술이 전반적으로 발전하였다고 생각된다. 금속활자를 주조한 김좌명의 경우는 그의 부친이 金堉으로 동전의 주조를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이런 전통이 그에게 이어져 활자를 주조하게 되었으며 김좌명의 아들인 金錫冑도 활자를 주조하였다. 김석주는 韓構의 글자를 본으로 하여 숙종 8년경 개인차원에서 韓構字를 주조하여≪潛谷先生年譜≫·≪春沼子集≫등을 간행하였다. 이렇게 금속활자의 복구가 쉽게 이루어지고 한 단계 더 높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중기 우리 인쇄문화의 수준이 매우 높았고 양란 후의 사회경제의 재건 및 새로운 발전이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18세기 특히 영·정조대에는 다시 국가차원에서 활자의 주조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영·정조대의 탕평정국하에서 국왕의 주도로 학술과 문화의 진흥이 활발하게 꾀해지던 것과 관련이 있다. 더욱이 정조는 높은 학식과 새로운 학문적 지향을 갖춘 데다가 서적의 간행과 활자의 주조 등에 관심이 깊었다. 영조 48년(1722)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갑인자 글자체로 활자를 만들어 교서관에 두고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壬辰字라고 부르며 戊申字가 三鑄 갑인자이므로 그 다음인 이 임진자는 四鑄 갑인자에 해당된다.364)임진자는 세종 16년 주조된 갑인자가 아니라 金佐明이 주조하였던 무신자(三鑄 甲寅字)의 글자체를 본떠 활자를 주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자는 영조가 하사한≪심경≫·≪만명회춘≫등을 글자본으로 하였다. 또 세종조 갑인자를 본으로 한 목활자 3만여 자도 임진자의 글자본이 되었다. 이 임진자의 주조에는 徐命膺의 기여도 매우 컸다. 임진자는 15만자이며 그 字譜인≪新訂字藪≫가 현존한다. 임진자로 인쇄된 서적으로는 실록에서 언급된≪易學啓蒙集箋≫·≪經書正文≫외에≪易學啓蒙要解≫·≪資治通鑑綱目續編≫·≪雅頌≫등이 있다.365)≪正祖實錄≫ 권 4의 정조 원년 8월 병신조에는 임진자로 간행된 서적에 대해 ‘印行經書正文啓蒙集箋 是爲壬辰字’라 하여≪경서정문≫과≪역학계몽집전≫둘 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尹炳泰에 의하면 본문에 든 세 책이 더 있다(윤병태, 앞의 책, 제4장 160쪽 및 제5장 참조).

 정조가 즉위한 뒤 규장각이 설립되자 서적간행과 활자주조 사업은 보다 활발해졌다. 정조 원년(1777) 평양감영에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이를 규장각에 두고 서적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정조가 즉위한 이후 처음 주조한 글자로서 丁酉字라 한다. 정유자는 약 15만자(대자 10만 5천, 소자 4만 5천)로서 그 자보인≪奎章字藪≫가 현존하며 갑인자 글자체로 임진자 다음에 주조되었으므로 五鑄 갑인자라고도 한다. 정유자로 인쇄된 서적으로는≪明義錄≫(정조 원년),≪通文館志≫(정조 4),≪唐宋八家百選≫(정조 5),≪李忠武公全書≫(정조 19),≪斥邪綸音≫(헌종 5:1839) 등이 있다.366)임진자는 外閣(奎章閣의 부속기관인 校書館)에 보관하고 정유자는 內閣(규장각)에 보관하여 내각과 외각의 활자 총숫자는 30만자나 되었다. 임진자와 정유자는 모두 갑인자를 글자본으로 하였으므로 글자체가 같아 구분되지 않는다. 실제 인쇄과정에서 임진자와 갑인자를 뒤섞어 사용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정유자가 주조된 정조 원년 이후 갑인자 글자체로 인쇄된 것은 모두 정유자 간행본으로 간주되고 있다(김두종, 앞의 책, 제8장 제1절 참조).

 정조 6년에도 평양감영에서 다시 8만여 자를 주조하여 규장각에 두고 서적을 간행하였다. 이것을 壬寅字라고 하며 한구자를 다시 주조한 것이므로 再鑄 한구자라고도 한다. 이 임인자로 주조한 서적으로는≪文苑黼黻≫(정조 11),≪正始文程≫(정조 19),≪文苑黼黻續編≫(철종 3:1852) 등이 있다.

 한편 정조 16년에는≪康熙字典≫을 글자본으로 목활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生生字라고 한다. 정조 20년 이 생생자를 글자본으로 하여 다시 동활자를 만들었다. 이것을 整理字(대자 16만자, 소자 14만자)라고 하며, 이 정리자로 간행된 서적으로는≪華城城役儀軌≫(정조 21),≪五倫行實≫(정조 21),≪弘齋全書≫(순조 14) 등이 있다.367)整理字가 주조된 이후에도 生生字는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양자는 글자체가 서로 같아 잘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생생자로 인쇄된 것을 편의상 정리자 간행본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生生字譜≫(정조 18),≪御定人瑞錄≫(정조 18) 등은 정리자 주조 이전에 간행되었고 생생자로 주조된 것이 확실하다. 정조 19년에 간행된 몇 종의≪賡載軸≫도 생생자로 간행되었으며, 순조 29년에 간행된≪文史咀英≫도 목활자이므로 생생자 간행본으로 여겨진다.

 목활자인쇄 또한 활발하였다. 영조대 이후 목활자가 다시 출현하여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었다. 영조대부터는 중앙의 교서관 외의 다른 부서와 지방의 관아에서도 독자적으로 서적을 간행하는 일이 활발하였는데 이 때 목활자가 많이 사용되었다. 지방관아에서 독자적으로 서적을 간행하는 일 역시 18세기 이후 학술과 문화의 진흥에 따른 현상이었다.

 먼저 교서관 외의 중앙의 다른 부서로서 독자적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간행한 곳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런 부서로는 觀象監·司譯院 등이 있는데 이들은 독자적으로 서적을 간행할 필요가 많은 곳이었다. 관상감에서는 영조 28년(1752) 간행한‘大淸乾隆十七年壬申 內用三書’외에 여러 책력과 천문관련 서적을 간행하였다. 사역원에서는≪攷事撮要≫(영조 19),≪同文彙考≫(정조 12),≪同文考略≫(정조 말),≪同文考略續≫(고종조) 등을 간행하였다.≪고사촬요≫는 백과전서로서 교서관의 간행업무를 대행한 것이지만≪동문휘고≫·≪동문고략≫은 외교관련 서적으로서 사역원과 관련된다.368)중앙정부 차원에서도 목활자에 대한 관심이 컸다. 숙종 초 무렵에 교서관에서 목활자를 제작하여≪周書國編≫(숙종 2),≪濂洛風雅≫(숙종 4) 등을 간행하였다. 이 목활자의 제작은 다시 교서관으로 하여금 금속활자를 주조하도록 자극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정조 14년과 15년 두 차례에 걸쳐 규장각에서는 청나라의 목활자를 수입하기까지 하였다. 또 정조 18년에는 생생자를 제조하였다.

 다음으로 지방의 관아 가운데 대표적인 곳은 평양감영이다. 평양감영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재정이 풍부하고 기술이 축적되어 정조대에 중앙 조정의 금속활자 주조를 대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 15년 평양감영에서는 감사 洪啓禧가 목활자를 새로 만들고≪五山集≫을 간행하였다. 이 목활자로 간행된 서적은≪오산집≫외에≪牧民大方≫(정조 16),≪聞韶世稿≫(정조 22),≪斗庵先生文集≫(헌종 2),≪蘆峯先生文集≫(철종 14) 등이 있다. 또 이 시기에 대구·전주·공주·해주감영 등에서도 목활자가 있어 서적을 간행하였다. 해주감영에서 간행된 것으로는≪栗谷全書≫가 있으며 공주감영에서는≪醇言≫·≪孤靑先生遺藁≫등을 간행하였다.

 민간차원에서도 목활자의 제조가 활발하였다. 이는 대체로 개인문집과 족보 등을 인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대에는 숙종 초와 그리고 숙종 말부터 경종 초에 걸쳐 두 차례 주조된 교서관 인서체활자의 글자체를 본뜬 목활자를 제작하였다. 지방에서도 이와 유사한 목활자로 많은 서적이 간행되었다. 이 활자의 간행본으로는 영조 17년의≪大學章句≫·≪中庸章句≫·≪詩經≫·≪書經≫·≪易經≫외에≪南坡先生文集≫(정조 6),≪石菱集≫(광무 2:1898) 등이 있다.369)이 활자의 제작 주체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종대까지 사용되었으며 경서간행 외에는 개인문집의 간행에 이용되었다. 따라서 민간의 수요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민간차원의 것으로 간주하기로 한다.

 정조 말, 순조대 무렵 서명응의 손자인 徐有榘의 집에는 목활자가 수만개나 소장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개인이 목활자를 소유하는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씨가문 소장의 목활자로 인쇄된 서적으로는≪瓢翁先生遺稿≫(정조 17),≪種藷譜≫(순조 34:1834),≪桂苑筆耕集≫(순조 34) 등이 있다.

 순조대에는 정조대에 주조된 정리자의 글자체를 본뜬 목활자가 제작되어 고종년간까지 의학서 및 유가경전 외에는 주로 개인문집의 간행에 이용되었다. 이 활자는 소유주가 민간인으로 활자의 제작 자체가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특히 의학서·유가경전의 간행을 통한 영리추구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개인문집의 간행은 주문생산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정리자체 목활자로 간행된 서적으로는≪家禮集考≫(순조 원년),≪麻方統彙≫(순조 2),≪心經附註≫(순조 초) 등이 있다. 이렇게 민간에서 상업적 생산으로 출판한 서적을 坊刊(刻)本이라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한 결과이다.

 다음으로 조선 후기에는 족보간행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진행된 신분제의 동요와 해체가 진행된 데에 기인한다. 새로이 신분변동을 한 계층에서는 새 족보의 인쇄를 통해 신분변동을 보다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고 신분변동을 막으려는 입장에서도 족보의 간행을 통해 기존 신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각지에서 여러 계통의 목활자로 많은 족보가 인쇄되었다. 이런 족보는 대체로 발행부수가 가문의 일족에게 제한되었으므로 주로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또 족보의 성행은 민간으로 하여금 족보 전용의 활자를 갖게 하였으며 금속활자는 주조에 많은 비용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므로 족보를 위한 활자는 나무로 제작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활자제작에 신소재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경종 3년(1723)에 교서관에서는 인서체 철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 철활자의 사용은 보다 빈번하게 되었다. 또 경종 2년 청해의 도자계에서는 도자기활자로 서적을 간행하였다. 민간부분의 경우 활자의 주조는 한 개인이 하기 어려워 계의 형태를 취한 경우가 많았다.

 이상 조선 후기에는 화폐주조 등에서 비롯된 기술발전을 토대로 중앙정부가 금속활자를 여러 차례 주조하였고 개인 또는 민간차원에서도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또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는 이전 시기에 비해 대체로 장기간 사용되었다. 활자가 장기간 사용되었음에도 여러 차례 주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서적간행의 횟수가 증가하고 활자가 개선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만큼 조선 후기에 서적의 수요가 증대하고 학술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서적 수요의 증대는 금속활자 외에 목활자의 각성, 목판본의 판각, 그리고 민간의 상업적 출판인 방간본의 간행도 활발하게 하였다. 방간본의 간행은 서적·활자·인쇄문화가 특정한 양반계층에서 보다 넓은 계층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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