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2. 실학의 발전
  • 2) 실학사상의 전개
  • (1) 실학적 왕도정치론

(1) 실학적 왕도정치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학경전을 해석하는데 주자 유일기준을 고수하는 성리학적 학풍에 대한 비판이 시도되었다. 주자성리학을 거부하고 원초유학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상체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상의 경향과 관련하여 실학자들은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이기·심성론을 새롭게 탐구해 갔고, 원초유학의 입장에서 왕도정치론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사실 조선성리학은 이기론보다는 인간의 心의 문제를 중요시하는 心學의 경향을 취하고 있었다. 실학은 성리학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그 차이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기심성론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켜 나갔다. 실학자들은 성리학과는 다른 입장에서 심성론을 제기해 나갔고, 이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했다. 성리학과 실학의 심성론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성리학적 심성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황이나 이이는 氣質之性의 선천적 규정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러므로 선천적 氣의 차이에 따라서 인간은 이미 귀천과 현우 그리고 선악을 규정받고 태어나는 존재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인간의 숙명을 변화시키기란 어려운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 결과는 세계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갖는 독자성이나 자율성이 왜소화되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선천적 기질지성에 구애되는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 주체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실학은 인간의 심이 활성인 것임을 강조했고, 인간의 본질이 性이 아니라 심인 것에 확신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실학의 인간관은 인성이 선으로 정향되었다고 단정하는 성리학적 도덕률의 허구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430)金泰永, 앞의 글, 199∼204·331쪽.

 실학에서는 인간의 심은 모든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靈明性과 스스로 好惡와 선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율성을 타고났다는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율과 각자의 책임 및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가능하게 되었다.431)琴章泰,≪東西交涉과 韓國近代思想≫(성균관대 출판부, 1984), 180쪽. 실학자들은 인물성론의 재해석을 근거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독자적 이해에 도달했다. 또한 실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귀에 대한 욕구가 인간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실학이 부귀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긍정했던 당연한 결과로 현실개혁적인 과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을 실학적 왕도정치론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실학자들은 사회·국가제도 전반에 걸쳐 통일된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입각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432)金駿錫,<柳馨遠의 變法觀과 實理論>(≪東方學志≫75, 1992), 70쪽.

 실학에서 왕도정치론을 제기하게 된 것은 실학의 근거인 유학사상이 그 본질상 국가통치의 敎學이었고 일종의 政論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초유학 단계에서부터 국가통치에 관한 이론이 모색되었고, 왕도 또는 왕정이란 개념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書經≫의<洪範>편에 ‘王道’라는 단어가 나타나 있고,≪論語≫의<學而>편에는 ‘先王之道’가, 그리고≪孟子≫의<梁惠王 下>편에 ‘王政’이란 용어가 제시되어 있다.

 왕도정치론은 맹자에 의해서 가장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그는 ‘왕정’이란 용어 외에도 ‘仁政’·‘王道’·‘堯舜之道’·‘文王之治’와 같은 용어를 통해서 왕도정치론를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왕도정치의 요체가 ‘仁王’에 의한 ‘인정’임을 내세웠다. 그는 인정의 구체적 내용으로 군주 개인을 위한 사사로운 부의 축적을 억제하고, 농업의 장려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정전제에 의해 부세제도를 확립하고, 관세를 철폐하여 상품유통을 보장하기를 제안했다.433)이승환,≪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고려대 출판부, 1998), 81쪽.

 이렇게 나타난 왕도정치의 원형은 유학사상이 각 시대에 따라 발전·전개되는 과정에서 꾸준히 부연 설명되고 재해석되어 갔다. 유학적 정론에서는 이 왕도·왕정 혹은 왕도정치의 개념을 떠날 수 없었다. 유학의 발전이 성리학의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는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434)金泰永, 앞의 글, 148쪽. 王道 또는 王政에 대해서 우리 나라 학계에서는 玄相允의≪朝鮮儒學史≫이래 ‘王道政治’란 용어를 주로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존중하여 ‘王政論’ 혹은 ‘王道論’이라는 용어 대신에 ‘王道政治論’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주자는 王道란 곧 仁義이다. 군주가 王道를 행한다는 것은 仁義를 가자고 천하를 안정되게 한다는 것이다(朱子,≪朱子大全≫권 73, 雜著 李公常語 하).

 그는 王政·王道의 기준을 仁義라는 도덕적 가치에다 설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리학은 한당의 유학에 비해서 세계와 현실을 좀더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것으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三代의 왕정이라는 이상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이 입장에서 趙光祖(1482∼1519)나 이황·이이 등과 같은 조선 중기의 관료와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을 자신의 정론으로 전개해 갔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經國大典≫의 경우에도 이 왕도정치의 구현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대한 회의의 과정에서 16세기 후반 내지는 17세기 중반기 사회에 이르러 조선의 사상계는 원초유학으로 회귀하려 했던 이수광과 허목의 단계를 경과했다. 이 단계를 거쳐 원초유학에 입각한 본격적인 왕정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조선 후기의 실학은 그 면모를 나타내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왕도정치론을 성리학자들과 공통적 명제로 삼았지만 그 접근방법상 차이가 있었다. 중세사회 해체기를 살았던 실학자들은 성리학적 왕도정치론과 입장을 달리했다. 그들은 주자가 정리한 성리학의 이론이 아닌 선진유학 또는 원초유학의 왕도정치론에 직접 근거하고자 했다.435)金泰永, 위의 글, 148∼150쪽. 실학에서 원초유학적 왕도정치론을 제기한 지점은 중세 해체기의 사회에서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의 파탄으로 인해 중세사회의 병폐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던 시점에서 원초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실학은 당시까지 알려진 최고의 이상사회였던 삼대의 왕도정치가 제시한 이념에 입각하여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지양하고자 했다. 실학은 현실의 국가체제를 개혁하여 궁극적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이상을 추구했다. 실학은 성리학의 경우보다 현실을 좀더 역사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현실을 추수하지 않고 그 현실에 적체되어 있는 비리와 인습을 근원적으로 지양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가장 이상적인 삼대의 왕도정치가 구현되었다는 古聖人의 본의를 탐구하여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객관적 기준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현실의 문제점을 초극하려는 기준은 고성인의 경전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깨쳐 얻어낸 것이었다. 그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서 실학은 새로운 국가론을 전개하고 있었다. 실학의 왕도정치론적 국가론은 이상적 국가공동체를 실현하려는 전근대 우리 나라 국가론의 최후의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436)金泰永, 위의 글, 324∼328쪽.

 그들의 왕도정치론은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고 경색된 현실의 타개를 주장하는 개혁론적 사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실학에서는 왕도정치를 현실사회에서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들을 모색해 나갔다. 여기에서 그들은 성리학적 왕도정치론과는 입장을 달리해서, 왕도·왕정의 기준을 仁義와 같은 도덕적 요소에 설정하기보다는 ‘安人’을 주요시하기에 이르렀다. 안인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은 국가재조론적 차원에서 전개되어 갔다. 사실 그들의 사상에서는 양란을 겪은 이후 17세기 사회에서 제시되었던 戰災극복의 논리인 국가재조론의 발전적 특성이 드러난다. 실학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조선왕조의 현실이 전쟁을 치른 직후나 마찬가지로 일대 변혁이 요청되는 상황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국가를 재조하는 방략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실학사상은 원초유학의 교학을 바탕으로 해서 이상적 왕도정치의 구현을 추구하던 현실과 이상의 會通論으로서 이 양자를 합일시키려던 지적 노력의 표현이었다.437)金泰永, 위의 글, 229·323쪽. 그리하여 국가재조를 희구하던 실학자들은 모순에 찬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이 弊法의 변혁에 있다고 보고 그 방략을 ‘變法’의 차원에서 모색하고 있었다.438)金駿錫,<柳馨遠의 變法觀과 實理論>(≪東方學志≫75, 연세대 국학연구원, 1991), 88쪽. 그들은 비록 정치현장에서 자신의 정론을 개진하여 이를 관철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광범한 분야에 걸쳐 개혁방안을 모색해서 제시해주었다.

 요컨대 17세기 이후 조선사상계의 변화에 수반하여 인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의 구현에 목적을 두었던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관한 재검토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원초유학에 입각한 실학적 왕도정치론이 제시되었다. 실학적 왕도정치론은 성리학의 理氣心性論에 대한 비판의 과정에서 그 면모를 드러냈다. 이 비판을 통해서 실학자들은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관에 도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세사회 해체기의 사회에서 위기에 봉착해 있던 인간과 사회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도정치의 핵심을 ‘안인’에 두고서, 국가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서 국가재조론의 차원에서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실학은 중세사회 해체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제시되고 있던 국가재조론이었다.

 여기에서 실학자들은 왕도정치를 총론으로 한 실학의 각론이 제시되었다. 실학에서 제시하는 모든 개혁론은 왕도정치론이라는 큰 틀 안에서 상호 구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실학의 개혁론은 그 하나 하나를 독립적인 경제이론이나 사회이론 등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왕정의 구현이라는 총론에서 파생된 다양한 갈래의 사회개혁적 사상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사회에 참여해야 했던 유학적 소양의 실학자들은 이 개혁안의 제시를 통해서 조선 후기의 사회에 참여하고자 했다. 개혁안의 제시는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참여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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