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4) 역사학의 발달
  • (1) 정통론의 발달

(1) 정통론의 발달

 17·18세기에 발달한 綱目體 史學은 정통론을 가장 뚜렷하게 내세운다. 원래 정통론은 명분질서를 세우는 것이고 강목체 사학은 다른 역사학에 비해 보다 엄격하게 명분질서에 토대하여 양자는 서로 밀접히 관련된다. 17세기의 대표적인 강목체 사서로는 영남남인인 洪汝河의≪東國通鑑提綱≫및≪彙纂麗史≫, 서인인 兪棨의≪麗史提綱≫이 있으며, 18세기의 대표적인 강목체 사서로는 林象德의≪東史會綱≫과 安鼎福의≪東史綱目≫이 있다.

 ≪東國通鑑提綱≫은 홍여하가 서인의 공격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고 있던 만년에 저술하였다. 조선 초기의≪東國通鑑≫을 주자의 강목법에 의거해 재정리한 것으로 여기에는 箕子-馬韓-新羅를 정통으로 보는 영남남인의 입장이 들어 있다.≪彙纂麗史≫(인조 17:1639)는 홍여하가 19세에 시작해 몇 년 사이에 지은 초년의 저작이다. 조선 초기의≪高麗史≫를 저본으로 하여 이를 주자의 강목법의 입장에서 재정리한 것이다. 다만 형식은 紀傳體를 취하였다.

 유계의≪麗史提綱≫은 30∼33세 사이에 지은 것이다. 이 시기는 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있던 때이다.≪여사제강≫은 주자의 강목법에 의거하되 서인의 입장에서 고려시기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홍여하가 후삼국시기 신라를 정통으로 본 것과 달리≪여사제강≫에서는 無正統의 시기로 보았다. 이것은 유계가 속한 서인의 기반이 畿湖지방에 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다만 유계의≪여사제강≫과 홍여하의≪휘찬여사≫는 모두 병자호란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 두 저술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과 민족적 위기의식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명분의 강조로 표출되었다.

 다음으로 임상덕의≪東史會綱≫(숙종 37:1711)은 그의 나이 29세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동사회강≫은 유계의≪여사제강≫을 계승하는 한편, 조선 초기의≪동국통감≫을 저본으로 하여 고대사 부분을 보충하고 강목체 사학의 체제를 보다 정비하였다. 마한은 나라를 잃은 기자의 후예가 피난을 와서 세웠다는 이유로 정통에서 제외하고 삼국을 무정통으로 보았다. 이것은 홍여하의 입장과 다르다. 임상덕이 강목체의 명분론에 서면서도 현실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유계의≪여사제강≫이 고려말 기사가 조선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비판하였다. 당시≪여사제강≫은 노론계열에서 추앙되던 역사서였다. 임상덕이 이를 비판한 것은 소론계열로서의 그의 입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동사회강≫의 저술시기는 숙종 후반 노론의 집권이 점차 공고해져 가던 때이다.

 ≪東史綱目≫은 안정복이 43세에 시작하여 5년에 걸쳐 저술되었다.≪동사강목≫은 기자-마한-삼국무통으로 되어 있다. 마한을 정통으로 보는 것은 홍여하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을 무정통으로 본 것은 영남남인과는 달리 기호남인으로서의 입장이며 삼국의 현실을 보다 더 고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같은 강목체의 정통론이라 하더라도 17세기에 비해 현실성이 보다 중요시되었다. 이 점은 임상덕과 안정복이 서로 같다. 그러나 안정복은 마한을 정통으로 보는 점에서 임상덕에 비해 명분론에 보다 충실하였다.

 한편 정통론은 강목체 사학자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洪萬宗·李瀷 등은 강목체 사학이 아닌 입장에서 정통론을 전개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18세기 이후이다. 홍만종의 사서로는≪東國歷代總目≫이 있으며 이익은 역사서를 저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星湖僿說≫등에서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독창적인 사론들을 전개하였다.

 먼저≪동국역대총목≫은 홍만종이 63세에 저술하였다. 그는 소론계로서 노론계가 중시하던≪여사제강≫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동국역대총목≫을 지었다. 이 점은 임상덕의≪동사회강≫과 같다. 그러나 임상덕의≪동사회강≫은 17세기의 강목체 사서와 달리 주자학적 명분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요소를 보다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강목체의 주자학적 명분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이와 달리≪동국역대총목≫은 실세 위주로 역사를 파악하였다. 또 우리 역사를 단군을 정통으로 하여 시작하였다. 홍만종의 부친 洪株世는 서인이지만 명분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漢黨계열이었다. 또 홍만종은 도가와 같은 이단적 사상도 포용하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잡은 것과 관련이 있다.

 이익의 역사학은 유계의≪여사제강≫에 대한 비판 및 홍만종의≪동국역대총목≫에 대한 부분적인 불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성호사설≫에 실린<三韓正統論>등의 여러 사론의 저술시기는 대체로 40세 이후로 추정된다. 이익은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견주면서 우리 역사의 정통을 단군-기자-삼한-삼국무통-통일신라-고려로 확립하였다. 즉 이익의 정통론에서는 중국과 우리의 문화적 대등성을 전제로 하여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개체성을 인정하였다. 또 홍만종이 삼국 가운데 신라를 정통으로 하는 것을 비판하고 무통으로 처리하였다. 이익이 역사에서 현실성을 중시한 것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서서는 비강목체적 정통론이 나타났으며 18세기의 정통론은 강목체이든, 비강목체이든 17세기에 비해 대체로 현실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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