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4) 역사학의 발달
  • (2) 중세적 화이관의 변화

(2) 중세적 화이관의 변화

 조선 중기 이래에는 신분제의 동요 및 해체와 더불어 중세적인 화이관이 변화되어 갔다.563)조선 후기 화이관의 변화에 대한 개략적 검토로는 조성을,<朝鮮後期 華夷觀의 變化-近代意識의 成長과 關聯하여->(≪근대국민국가와 민족문제≫, 지식산업사, 1995)가 있다. 17세기 전반 홍여하의 화이관은 그의≪동국통감제강≫과≪휘찬여사≫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기자로부터 중화의 문화가 시작된다고 보았으나≪휘찬여사≫에서 고려의 국왕을 세가에 넣는 등 중국의 우월성을 전제로 하였다. 다만 우리 역사서로서는 처음으로 外夷라 하여 오랑캐라는 관점에서 주변국가를 다루었다. 이것은 주변국가에 대한 우리의 우월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또 명나라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조선 중심의 중화적 질서, 국제질서를 생각해 보는 단초로도 생각된다.

 영남남인인 홍여하와 대척적 위치에 서 있던, 서인의 대표적 역사가 유계의 화이관은 그의≪여사제강≫에서 살필 수 있다. 홍여하의 화이관이 尊華의 명분에 보다 충실한데 비해, 유계는 존화의 측면과 더불어 자주성을 보다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양자는 기본적으로 종족적 화이관과 지리적 화이관을 벗어나면서도 주자학적 입장에서의 문화적 화이관을 갖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일치된다.564)이 세 가지 華夷觀에 대해서는 조성을, 위의 글 참조.

 18세기 초엽 임상덕의 화이관은 ≪동사회강≫에서 살필 수 있다. 그는 17세기 서인의 對明義理論·尊華攘夷論의 연장선상에 서서 中華와 夷狄을 엄밀히 구분하고 왜와 胡(청나라)를 멸시하였다. 즉 그는 주자학적 입장의 문화적 화이론자이다. 다만 우리의 문화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우리를 중국과는 분리된 개체로 인식하였다. 18세기 중엽의 안정복 역시≪동사강목≫등에서 우리를 중국과 분리된 개체로 인식하였다. 18세기의 임상덕과 안정복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적 입장의 문화적 화이론자이지만 우리의 개체성을 명확히 인식한 점에서 17세기의 강목체 사학보다는 발전된 것이다.565)이것은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의 보유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우리 역사 전체에 대한 존중으로 발전되어 간 결과이다. 즉 조선 中華主義가 우리 역사 전체에 대한 존중으로 확산되어 중국과 다른 개체가 애초부터 존재하였다고 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安鼎福의 경우는 그에 앞서 이미 우리를 중국과의 별개의 개체로 본 李瀷의 영향도 있다.

 다음으로 비강목체 사학자 許穆·홍만종·李種徽의 화이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허목의 화이관은 그의 ≪東事≫에서 엿볼 수 있다.≪동사≫를 편찬한 것은 73세 때이다.566)현종 8년(1667)에 해당된다. 禮訟은 있었으나 아직은 남인과 서인 朋黨 사이에 공존이 유지되던 시기이다. 17세기 중엽 허목은 古學(원시유학)의 입장에서 우리의 고유문화를 고학과 통한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그 역시 문화적 화이론자이지만 중화의 개념이 정통 주자학자와 다른 유학이라는 점에서 실학자의 문화적 화이론의 선구를 이룬다.

 18세기 초엽 홍만종은≪동국역대총목≫에서 유교·불교·도가의 삼교회통적인 입장에서 우리를 중국과 대등하게 보았다. 18세기 후반 이종휘는 그의≪東史≫에서 나름의 화이관을 제시하였다.≪동사≫는 그의 문집인≪修山集≫에 들어 있으며 저술시기는 42세(정조 즉위년:1776) 때로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이전으로 추정된다.567)영조 말 노론계 蕩平派의 戚臣들이 발호하여 차후 정조의 등극마저 위협받고 있던 시기이다. 이종휘는 비주자학적 입장의 문화적 화이론자로서 중국과 우리의 대등성을 생각하였다. 다만 소론인 그는 청나라와 일본을 이적으로 보고 우리만을 중화로 보는 점에서 기호남인 실학자 이익과 다르다.

 다음으로 이익·洪大容·朴趾源·朴齊家·丁若鏞 등 실학자의 화이관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柳馨遠 단계에서는 아직 화이관의 변화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았다. 실학자에서의 화이관의 변화는 이익에게서 명확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전반의 이익은 중국에 대해 우리의 개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안정복이 개체성을 명확히 한 것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익의 영향이었다. 다만 이익은 비주자학적 입장의 문화적 화이론자이고 안정복은 주자학적이라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가 있다. 또 이익은 지리적인 측면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였으며 종족에 따른 차별을 부정하였다.

 18세기 후반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의 북학파는 비주자학적 입장의 문화적 화이론자이다. 홍대용은<毉山問答>에서 종족적·지리적 화이관의 극복을 가장 명확히 표명하였으며 대명의리론을 완전히 벗어났다. 다만 그가 화이관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며 아직 중화 특히 유교를 문화의 척도로 생각하였다.568)洪大容의 화이관에 대하여는 조성을,<洪大容의 歷史認識-華夷觀을 中心으로->(≪震檀學報≫79, 1995) 참조. 박지원·박제가는 대명의리론을 그대로 유지하고 청나라를 멸시한다는 점에서 홍대용의 개방적 자세와는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의 북학론은 청나라 조정과 그 문물을 분리하고 후자를 청나라 이전의 중화로 보아 그 수용을 생각한 것이다.

 정약용의 화이관은≪與猶堂全書≫에 수록된<東胡論>·<拓拔魏論>같은 글에서 살필 수 있다. 정약용 역시 비주자학적 입장의 문화적 화이론자이다. 그는 홍대용과 마찬가지로 종족적·지리적 화이관을 완전히 극복하는 동시에 대명의리론을 전혀 갖지 않았다.

 한편 조선 후기 화이관의 변화, 발전은 역사학자 아닌 노론계열의 정통 주자학자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宋時烈·韓元震·李恒老 등이 있으며 각기 17세기·18세기·19세기에 활동하였다.569)조성을, 앞의 글(1995a) 참조.

 송시열의 화이관은 그의≪宋子大全≫에 실린<雜錄>이라는 글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기자를 매우 높이면서 공자와 같이 존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자를 유교의 성인으로 존중하는 것은 16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의 견해이지만 송시열은 그들보다도 한걸음 나아가 공자와 기자를 동일한 수준으로 보았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이미 기자의 단계에서 공자의 유교와 대등한 유교가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송시열은 이퇴계와 이율곡 등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주자학이 명나라의 그것보다 앞섰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그를 崇明事大論者라고만 볼 수 없게 한다. 즉 송시열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당시 조선문화에 대해 극단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한편 그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인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당시 상황에서 조선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중화문화의 유일한 담당주체로서 그 본류가 된다.

 한원진은 송시열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이론적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南塘集≫에 실린<拙修齋說辨>이라는 글에서 중화에 대립되는 것을 禽獸·夷狄·亂賊·異端으로 세분하고 “금수의 폐해는 얕고 이적의 폐해는 깊으며 이적의 폐해는 얕으나 난적의 폐해는 깊고 난적의 폐해는 얕으나 이단의 폐해는 깊다”고 하였다. 원래 송시열의 화이관은 이적을 배척하기 위한 것, 즉 외세배척이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 있었으나 한원진 단계에 와서는 이단을 배척하기 위한 대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만 기능하게 되었다. 아울러 한원진은 이적은 중화로 변화될 수 없다고 보았다.

 외세배척의 의미를 상실하였던 18세기 한원진 단계의 화이관은 19세기에 들어 외세가 밀려오자 다시 외세배격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이항로의 화이관이다. 그의 화이관은≪華西先生雅言≫에 실린<堯舜>·<洋禍>와 같은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항로는 이적과 금수를 구분하였다. 한원진이 금수보다 이적의 폐해가 더 크다고 한 것에 비해 이항로는 청나라는 이적이므로 오히려 말이 통하지만 서양은 금수이므로 말이 안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적에 대한 배척이 서양에 대한 배척으로 전화한 것이다. 송시열 이래의 존화양이론이 이항로 단계에서는 근대적인 반외세사상으로 발전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항로는 청나라를 어느 정도 긍정하면서 이적의 중화로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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