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4) 역사학의 발달
  • (3) 국사의 체계화와 개별 왕조에 대한 인식

(3) 국사의 체계화와 개별 왕조에 대한 인식

 정통론의 발전 및 화이관의 변화 등은 우리 역사의 체계화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국사의 체계화 역시 정통론적인 것과 비정통론적인 것의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정통론적인 것은 다시 강목체적 입장의 것과 비강목체적 입장의 것으로 나누어진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통론 가운데 강목체 사학자는 홍여하·유계·임상덕·안정복 등이며 정통론 가운데 비강목체 사학자는 홍만종·이익 등이다.

 17세기 중엽 홍여하는≪동국통감제강≫에서 기자-마한-신라를 정통으로 하는 체계를 확립하였다. 마한을 정통으로 한 것은 명분론의 강조이다. 같은 시기의 유계의 경우≪여사제강≫만을 지었으므로 체계를 살필 수 없다. 유계가≪여사제강≫만을 지은 것은 고려 이전의 시기는 주자학적 입장에서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역시 강한 명분론적 입장이다.

 18세기 초엽 임상덕은≪동사회강≫에서 삼국무통-통일신라-통일고려로 체계화하였으며 마한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삼국무통과 마한 부정은 현실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18세기 중엽 안정복은≪동사강목≫에서 단군-기자-마한-삼국무통-통일신라-고려(통일 이후)로 체계화하였다. 삼국무통은 역시 현실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강목체 사학의 국사의 체계화는 17세기에 비해 18세기는 현실 중시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음 비강목체적 입장의 국사의 체계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18세기 초엽 홍만종은 단군-기자-마한-삼국무통-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체계화하였다. 단군을 정통에 놓은 것은 삼교회통의 비강목체적 입장의 반영이며 삼국무통은 현실중시의 입장이다. 18세기 전반 이익은 단군-기자-마한-삼국무통-통일신라-고려(통일 이후)로 체계화하였다. 홍만종은 소론계이며 이익은 기호남인인데 국사의 체계화가 같게 되었다. 이상 정통론적 입장의 체계화는 강목체이든, 비강목체이든 일원적 체계화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우리 역사의 체계화는 비정통론적 입장에서도 이루어졌다. 먼저 17세기 중엽의 허목은 우리 고대사를 기자-마한의 흐름과 단군-부여-고구려의 흐름이라는 이원적 체계로 파악하였다. 18세기 후반의 이종휘는 단군-부여-고구려의 흐름에 중점을 두면서 기자-마한의 흐름이 고구려에 계승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다. 이원적으로 보는 것은 허목과 같으나 허목이 두 흐름을 대등하게 본데 비해 단군-부여-고구려의 흐름에 중점을 두었으며 기자-마한의 흐름이 고구려에 연결되는 것으로 본 점에서 서로 다르다.

 다음 역사지리학에서의 체계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韓百謙은 17세기 초엽≪동국지리지≫에서 三朝鮮-四郡-二府-高句麗의 흐름과 삼한-삼국(백제·신라·가야)의 남북 이원체계로 정리하였다. 이런 이원체계는 유형원도 마찬가지였다. 18세기 중엽 申景濬은 45세 때 편찬한≪疆界誌≫(영조 32:1756)에서 한백겸의 남북 이원체계를 그대로 따랐다. 또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정약용은 50세에 저술한≪我邦疆域考≫(순조 11:1811)에서 역시 한백겸을 따라 이원체계로 정리하였으며570)≪我邦疆域考≫는 이후 많은 내용이 증보되었다(조성을,<我邦疆域考에 나타난 丁若鏞의 歷史認識>,≪奎章閣≫15, 1992. 참조). 발해는 우리 역사에 넣지 않았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지 않은 것은 당시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자는 주장에 대한 의식적인 비판이다. 이것은 우리 고대사의 무대를 한반도 중심으로 보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국사의 체계화와 더불어 각 시대에 대한 인식도 심화되었다. 먼저 단군조선의 경우 홍여하의 단계에서는 夷문화로 보았으나 이익은 요순과 夏나라의 영향을 받은 華로 파악하였다. 홍만종의 경우는 단군조선의 문화를 도가적인 관점에서 보고 그 자체로서 긍정한 느낌이 있다. 이종휘는 단군을 유교의 성인으로 보는 한편 우리 역사의 주류를 단군족으로 파악하고 부여-고구려로 연결되는 흐름을 강조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하여 홍여하는 중국과 독립된 개체로 파악했으며, 임상덕은 조선중화의 기원을 여기서 찾았고, 이종휘는 기자조선을 중국의 삼대와 맞먹는다고 보았다.

 다음 삼한에 대하여 이익은 箕準의 남하 이전에 마한이 이미 존재했다고 하였다. 또 삼한의 위치비정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었으나 대체로 한강 이남 또는 고조선의 남쪽에 비정하였다.

 삼국에 대해 홍여하 단계에서는 신라를 정통으로 보았으나 점차 무통으로 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만 허목은 신라를 중국의 三代 이상으로 보았으며 이익은 단군·기자의 문화전통이 한강 이남으로 이어진다고 보았고, 안정복은 고구려가 사대외교를 하지 않고 중국과 마찰을 빚은 것을 비판하였다. 이에 비해 이종휘는 단군·기자·마한의 전통이 고구려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통일신라에 대하여는 이종휘가 통일신라 하대의 난정을 비판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전 시기에 비해 고구려에 대해 관심이 더 커지고 보다 강조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발해의 경우 柳得恭의≪渤海考≫등 발해사를 우리 역사에 넣으려는 흐름이 나타나는 한편 정약용은≪아방강역고≫에서 이에 대해 반대하였다. 다만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발해에 대한 관심은 전체적으로 점차 커져 갔으며 실증적 연구가 진전되었다.

 고려에 대해서 홍여하는≪고려사≫에 비해 명분론적 관점을 보다 강하게 보이는 한편 유계에 비해서는 군주권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유계는 신권을 강조하였으며 고려의 대외항쟁을 강조하였다. 이종휘는 고려의 고구려 故土회복을 위한 노력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하였고, 고려의 강인한 대외항쟁에 주목하였다.

 조선에 대하여는 자기 시대에 대한 해명이라는 점에서 접근되었다. 이와 같이 동시대에 대한 관심은 조선 후기 당쟁이 격화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특정 정파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저서가 많이 나왔으며 이것은 중국에 비해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객관적으로 사실에 입각해 사건의 본말을 이해하려는 저술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李肯翊의≪燃藜室記述≫이다. 또≪大東野乘≫이나≪稗林≫과 같이 기존의 野史를 모은 총서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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