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3. 국학의 발달
  • 5) 백과전서학의 발달
  • (4) 박물학적 백과전서

(4) 박물학적 백과전서

 이익의 백과전서학의 전통은 安鼎福의≪雜同散異≫라는 저술로도 이어졌다. 이것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단편적 지식을 잡다하게 모아놓은 것이다. 따라서 안정복의 경우 그의 백과전서적 지식은 적극적인 개혁사상과 연결되지 못하였다. 또 여기에서는 영남학파의 학문적 계승을 생각하는 그의 견해가 드러나 있다. 이런 것들은 이익과는 다른 안정복의 보수적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丁若鏞은 이익의 학문적 흐름을 계승하였지만 백과전서를 저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 모두가 하나의 백과전서학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즉 개별 저술들이 백과전서학의 각 분야에 대한 전문연구서이며 각 분야가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일관된 체계를 이루고 있다. 또 여기에는 국가제도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개혁론이 정리되어 있다. 즉 정약용은 여러 학문분야에서 행해진 조선 후기의 새로운 연구와 개혁론을 집대성해 거대한 백과전서적 학문체계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이수광 이래의 백과전서학의 흐름과 유형원의 전반적 국가제도 개혁론의 흐름을 훌륭하게 결합시킨 것이기도 하다.

 정약용 이후 백과전서학은 어떠한 개혁의지와 연관되기보다는 잡다한 사실을 단순히 수집하는 기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李圭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를 통해 그것을 볼 수 있다.582)≪五洲衍文長箋散稿≫는 1820∼30년대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며 간행되지 않고 필사본으로 있었다. 그 부록인 五洲書種은 1839년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19세기 세도정치하에서 실학적 분위기는 쇠퇴하고 단순한 고증학적 취미만이 커지는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이규경의 학문은 그 연원이 조부 李德懋에게 있다. 이덕무는 정조대에 규장각의 檢書官으로서≪文苑黼黻≫·≪武藝圖譜通志≫등 여러 서적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이덕무의 아들 李光葵와 이덕무의 동생 李功懋도 검서관을 지냈다. 한편 19세기 전반기는 조선학계가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들이는 시기였다.

 18세기 말부터는 박물학적 관점에서의 백과전서도 나오게 되었다. 박물학적 관심은 이미 권문해의≪대동운부군옥≫이나 김육의≪유원총보≫등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나 독립적인 저술이 나타난 것은 이 무렵부터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저서의 효시로 여겨지는 李晩永의≪萬物譜≫(정조 22:1798)는<太極>·<天譜>·<地譜>·<人譜>·<物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부분적으로 한글로 된 풀이가 보인다. 이를 뒤이어 柳僖는≪物名考≫(物名類考)를 지었다. 이것은 앞서 이만영의<地譜>와<物譜>에서 표제어와 해설을 취사선택한 것이다.<물보>는 다시 유정류·무정류로 나누고<지보>는 부동류·부정류로 나누었다. 유정류에는 곤충·짐승·어류·벌레 등을 싣고, 무정류에는 풀·나무 등을 실었으며, 부동류에는 흙·돌·금·물·불 등을 수록하였다. 오늘날의 용어로 유정류는 동물, 무정류는 식물, 부동류는 무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자 표제어 뒤에 개별 물명을 한글로 달아 일종의 국어사전적인 성격도 갖는다. 이 밖의 정약용도≪物名考≫를 지었으며 李嘉煥의≪物譜≫도 있다. 이가환의≪물보≫는 그의 아들 李載威가 순조 2년(1802) 아버지의 초고를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규경의≪오주연문장전산고≫의 부록인<五洲書種>(헌종 5:1839)도 박물학적 관점의 백과전서적 성격을 갖는다.

 19세기 전반의 백과전서학적 관심은 개항 직후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는 매개적인 기능을 하였다. 이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개화사상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다만 개화사상의 경우 문물에 대한 고증학적 또는 박물학적 관심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제도개혁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향성이 갑오개혁으로 귀결되고 그 결과가 다시≪증보문헌비고≫로 정리되었다.

<趙誠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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