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4. 과학과 기술
  • 1) 조선 후기의 전통 과학기술
  • (1) 과학기술의 제도와 기관

(1) 과학기술의 제도와 기관

 조선시대 과학기술과 관련된 기관은 모두 정부기관이었다.584)박성래,<조선시대의 과학기술>(≪한국사회론≫, 사회비평사, 1995), 441∼464쪽.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이런 기관들은 대체로 그대로 조선 후기로 이어졌다. 초기의 주요한 과학기술기구로는 內醫院·軍器寺·繕工監·觀象監·典醫監·典艦司·昭格署·平市署·掌苑署·司圃署·司畜署·造紙署·惠民署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몇몇 기관을 제외하고는 과학기술기관이라기보다는 과학기술관계 사무만을 담당한 기관이라 할 수 있을 뿐, 전문적 연구나 체계적 교육이 전혀 실시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잡다한 기관에서도 지금과는 다르지만 초보적인 연구와 교육은 언제나 진행되었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처음으로 공표된 정부조직 가운데에는 이들 밖에도 여러 관련기관을 들 수 있는데, 수학자 또는 계산전문가를 배치한 기관은 앞에 든 기관보다 훨씬 많고, 그 밖의 여러 기술 관련기관도 더 들 수 있으며, 司農寺와 司僕寺 등 농업과 목축기술과 관련된 기관이 추가될 수 있다.

 조선의 이와 같은 기관은 고려 때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고, 또 이들 기관은 대개가 그 이름만 약간씩 바꾸는 범위에서 조선 후기까지 계승되었다. 과학기술 관련기관은 전통사회에서 거의 변화없이 지속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전통사회가 그만큼 변화없는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들 잡다한 기관 가운데 실제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과학기술기관은 거의 드물었다. 즉 수많은 정부기관에 수학자가 배치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갖가지 행정상의 필요에 따른 계산업무를 담당한 인원이었을 뿐 오늘과 비슷한 뜻에서의「수학자」라 부르기 어렵다. 똑같은 의미에서 여러 기술 관련기관이란 것들도 지금으로 치면 그런 분야의 기술을 담당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그 방면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기술자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서울에는 동빙고와 서빙고의 두 氷庫가 있었고, 이 국가기관에는 제조·별좌·별제·별검이 각각 1명씩 모두 4명의 관원이 소속되어 있었다. 빙고는 겨울에 한강에서 켜낸 얼음을 여름에 사용할 수 있게 저장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기술상의 과제가 없지 않았다. 지금과 같으면 여러 가지 보고나 장소의 설계와 시공, 그리고 보관방법에 걸쳐 많은 기술상의 문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는 기술자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빙고에서의 관원들은 때에 맞춰 인부를 동원해서 얼음을 켜다가 창고에 보관하는 일을 해마다 똑같이 반복했을 뿐, 그 개량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사회의 기술 관련기관이 모두 이런「化石化된 기술」을 그대로 답습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한, 그 곳에서의 기술의 발달은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그런 전통 속에 존재했던 기술기관을 오늘과 같은 뜻의 기술기관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도 어느 정도 개량지향의 초보적 연구개발이 진행되었던 書雲觀·典醫監 등은 손꼽을 만한 대표적인 과학기관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서운관은 고려 때부터의 기관으로 세종 때에는 그 이름을 다시 觀象監이라 고쳤다. 천문·기상·지리·卜筮 등을 담당하는 기관인 서운관은 그 기원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통일신라 때 漏刻典이란 기관을 둔 것이 처음인 것처럼≪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전부터 삼국에 모두 그런 기관이 있었음은 여러 가지 증거로 분명하다. 그 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경주의 첨성대는 그런 증거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고려 초에는 이 기관은 太卜監·太史局의 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태복감은 현종 14년(1023) 司天臺, 그 후로는 司天監·觀候署 등으로 이름을 바꾸다가, 충선왕 원년(1308) 태사국과 통합하여 비로소 서운관이 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다시 둘로 갈라졌다가 재통합되었다.

 서운관은 조선왕조의 개창과 함께 그대로 내려오다가, 세조 12년(1466)에는 관상감으로 개명되었다. 연산군 12년(1506) 잠깐 동안 司曆署란 이름으로 격하된 일이 있지만, 관상감은 조선시대를 통해 가장 오래 사용된 공식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관이란 옛 이름이 애용되었던 것은 분명해서, 관상감이란 이름 이외에도 서운관이란 옛 이름이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갑오개혁과 함께 고종 31년(1894) 관상감은 觀象所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관상감이 어떤 직제를 가지고 어떻게 움직였던가에 대해서는 순조 18년(1818) 成周悳이 쓴≪書雲觀志≫를 통해 그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관상감에는 영의정이 領事를 겸하게 되어 있고, 그 아래 종2품 이상의 겸직으로 提調가 2명, 그리고 몇 명의 당상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최고 직위에 있던 관상감정은 그 직급이 정3품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관상감에는 215명 정도의 인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행정관리 이외에 기술관리들과 敎授·訓導·生徒 등이 天文·地理·命課의 세 분야로 나뉘어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매일같이 하늘을 관찰하여 특이한 천문현상을 관측했을 때는 보고규정에 따라 즉시 또는 다음날 관측결과를 정리해 보고하게 되어 있었고, 그 형식이 엄격히 갖춰져 있었다.

 또한 이렇게 관측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고, 중국의 천문역산학 문헌을 연구하여 조선에 맞는 천문계산법을 고안해 내고, 또 해마다 조선에 맞는 역법을 제작했다. 그것은 실제 천문관측과 그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이들 인원 가운데에는 생도 60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천문학 40명, 지리학 10명, 명과학 10명 등이다. 그에 상응하는 교수와 훈도들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관상감은 바로 국가의 천문역산학 교육기관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천문·역산·지리학 등에 관한 국가적인 연구 및 교육의 기관이었던 것이다.

 관상감은 이 연구에 필요한 기구 등을 제작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태조 4년(1395)에 만든 천문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관상감 주도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관련자들이 관상감의 관리들이었고, 숙종 때에 다시 돌에 새긴 복각천문도는 분명히 관상감 주도로 되어 있다. 또 지금 속리산 법주사에 소장되어 있는<新法天文圖>역시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서양천문도를 영조 19년(1743) 관상감이 모사해 제작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세종 때의 수많은 천문기구들을 비롯해 혼천의·자격루·자명종 등이 대체로 관상감 관리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혼천시계는 17세기 후반에 관상감 교수 宋以穎이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연구를 위해서는 중국에 끊임없이 천문역산전문가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역법을 얻어 오고, 또 필요한 천문학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해마다 1회 이상 중국에 파견되는 燕行使 일행에 반드시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수집해 온 정보는 국내의 연구를 더하여 책으로 편찬하여 발행되는 일이 많았으며, 이 작업 역시 관상감에서 담당하였다. 앞에 소개한≪서운관지≫역시 관상감의 관원이었던 성주덕이 저술한 것을 관상감에 의해 발행된 경우이었고, 조선시대의 천문학사라 할 수 있는≪國朝曆象考≫(정조 20:1796) 역시 관상감에서 펴낸 것이었다. 이 책의 편찬을 주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성주덕과 金泳은 모두 관삼감 관원이었는데, 김영은 그 밖에도≪新法中星記≫·≪漏籌通義≫등 많은 책을 펴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도 남아 있다.

 비슷한 연구·교육기관으로서 典醫監 등의 의학기관을 들 수 있다. 전의감은 앞에 소개한 관상감과 마찬가지로 정3품관이고, 역시 관상감과 마찬가지로 교수·훈도·생도 등의 정원이 설정되어 있으므로 의학교육을 전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관상감이 단 한 가지 천문역산 관계기관으로 존재했던 것과는 달리, 의학기관으로는 전의감 이외에도 초기에 전의감에 속해 있다가 분리되어 나간 內醫院 그리고 濟生院·惠民局·東西大悲院·活人署 등 여러 의학 관련기관들이 많다. 다만 이들 여러 기관 가운데 의학의 연구교육을 위한 중심기구는 단연 전의감이었고, 다른 기관은 대개 실제 임상의료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의감은 왕실과 관리들을 위한 의료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학연구교육의 중추기관이었다. 전의감에서는 또한 약재의 채취시기와 방법, 약재의 수량과 말리는 방법까지를 모두 연구하고 그 재배정책을 확정하여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약재를 기르는 밭을 관리하고, 약재정책에 위반자가 생기면 처벌하는 권력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중국의 연행사 편에 해마다 의원을 함께 파견해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외국의약품을 구입해 들여오기도 했다. 또 청심원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의약품에 대한 독점적 제조판매를 담당하기도 했다. 물론 의학에 관한 거의 전반적인 책임을 맡고 있던 전의감이었기 때문에 이 기관은 또한 필요한 의학서를 편찬하고 발행하는 주체가 되는 일도 많았다. 또 의학교육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수업을 성취한 결과를 시험보아 인재를 선발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는 양반의 학문이었던 천문학과 의학 등이 중기 이후 중인의 전업으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세종 때에 가장 많은 천문·역산관련 책을 남긴 李純之는 관상감 소속의 천문학자가 아니라 보통의 문과에 급제했던 문신이었다. 마찬가지로 세종 때의 의학에서 뚜렷한 저술활동을 벌인 일부 학자들은 역시 문과급제자들로 집현전 학자들이 포함되고 있었다. 세종 때에는 천문역산학과 의학이 양반층 문과급제자들이 연구할 수도 있는 말하자면「존중되었던」 분야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천문역산학과 의학의 위치는 차츰 하락하여 갔다. 유명한≪東醫寶鑑≫의 시대에는 이미 의학연구란 주로 중인층의 전문분야로 천시되고 있었다.≪동의보감≫을 지은 許浚은 평생을 주로 임금의 侍醫로 지낸 의학자였는데, 庶出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제대로 된 양반노릇은 할 수 없는 중인층이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대의학자로 四象의학의 창시자이며≪東醫壽世保元≫의 저자인 李濟馬도 전문의학자로서 이 책을 지은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상 살펴본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과학기술 관계기관은 거의 전문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나마 어느 분야의 종사자들은 제한된 특권을 주어 전문성을 지속할 수 있게 신분층을 형성해 주었고, 그들이 조선시대 과학의 주요 부분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생산기술분야는 하층신분층을 동원하게 마련되었는데, 그들은 정해진 교육과정을 거쳤다기보다는「어깨넘어공부」로 기능을 익혀 그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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