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1. 문학
  • 4) 문학사상과 비평

4) 문학사상과 비평

 조선왕조의 중세적 질서가 심각한 모순에 당면한 18·19세기의 문학비평에서는 종래의 지배적 흐름을 벗어난 反正統的 조류가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그 가운데서 우선적으로 주목할 것은 국어문학의 가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대두라는 현상이다. 이에 관한 자각적 인식의 선구를 김만중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김만중은 국문문학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파악하여 사대부층 일각의 의식변화를 보여주었다. 한문을 빌어 쓴 시·부로 우리의 경험과 느낌을 표현한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한 그의 견해는 오랜 동안 한문문학에 매몰되었던 사대부들의 태도에 반성을 촉구하면서 다음 단계의 국문문학의 인식발전을 위한 서곡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의식은 중인층 가객들에 의해 가집이 편찬되는 단계에 와서 좀더 확실한 논리로 발전했다. 18세기 초에≪청구영언≫을 엮어낸 김천택, 이에 서·발을 쓴 정윤경·마옥노초, 18세기 중엽에≪해동가요≫를 편찬한 김수장(1690∼?), 그리고<大東風謠序>를 쓴 홍대용(1731∼1783) 등으로부터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시조를 風雅 즉≪詩經≫에다 비기면서, 민간의 진솔한 언어로 갖가지 경험과 감정을 노래한 시조야말로 본원적 진정성과 실감을 갖춘 문학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의식의 대두는 한문문학에 대하여 국문문학의 가치를, 상층문학에 대하여 하층문학의 존재 의의를 천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적 진전의 의미를 가진다.

 정윤경은<청구영언 서>에서 시와 歌의 원초적 합일상태를 이상적 경지로 설정하고, 시조야말로 이와 같은 합일성을 지닌 가치있는 예술이라고 옹호했다. 김수장 역시 마찬가지 논법을 바탕에 깔고, 시조 가운데에는 평탄 완만한 것과 애절한 것, 폭풍·소나기처럼 거센 것과 덩굴처럼 부드럽고 휘늘어지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모두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風敎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들은≪시경≫이라는 고전적 전범과 교화의 효용을 논리상의 발판으로 삼으면서, 국문시가인 시조의 존재가치와 문학적 의의를 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법의 가장 선명한 극점이 이정섭의<청구영언 후발>에 집약되었다. 여기서 그는 일체의 인위적 장식이나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본원적 심성을 ‘자연의 眞機’라 하고, 이를 시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제시했다. 역대의 한시는 외형적인 수식과 聲律의 연마에 치우침으로써 참다운 시의 이상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오히려 우리말로 된 시정의 노래인 시조가 이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616)金興圭,≪朝鮮 後期의 詩經論과 詩意識≫(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2), 160∼162쪽.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委巷人들의 시집 편찬취지를 밝히는 글들에서는 홍세태·고시언 등 위항인 자신과 일부 사대부문인들에 의해서는 위항문학이 가식되지 아니한 성정과 체험의 진실한 표현으로서 사대부들의 그것보다 고귀하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홍세태는 위항시인들이 학식과 교양에서 사대부들보다 부족하지만 오히려 이때문에 典故·格律·理趣에 구속되지 않고 天機·자연에 충실함으로써 진정한 시의 경지에 몰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宋詩나 明詩보다 唐詩를 높이 치는 시관과 함께 정감의 자연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의식이 담겨 있다. 이처럼 도덕규범에의 예속이나 수사적 세련보다 정감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중시한 이들의 문학관은 탈중세적 지향이 초기적인 논리형태를 띠기 시작한 징표로 이해될 수 있다.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사대부문인들에게서는 도학적 문학론이 요구하는 내면성에의 침잠이나 擬古的 문학관의 尙古主義로부터 벗어나 문학을 당대적 경험의 충실한 표현으로 재인식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이 박지원과 이옥이다.

 朴趾源은<楚亭集序>·<綠天館集序>등의 글을 통해 문학의 형식과 실질 양면을 규제하는 古文의 초시대적 전범성을 부인함으로써 변화·현실성·개성의 이념을 주창하였다. 그에 의하면 고문이란 옛적에 있어서의 일상적 언어(常語)를 기록한 것으로서, 오직 이를 항구불변하는 규범으로 삼아 모든 문학을 속박할 수는 없다. 참다운 문학의 길은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아울러, 그는<嬰處稿序>등에서 중국적 전례에의 추종을 비판하고 우리대로의 풍토와 역사·문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 즉<朝鮮風>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아!≪詩經≫삼백편은 새·짐승과 草木의 이름 아닌 것이 없으며, 閭巷의 남녀들이 노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邶와 檜의 사이에서도 서로 풍속이 같지 않고, 江水유역과 漢水유역과는 백성들의 풍속이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당시에 시를 채집하던 사람들이 이로써 여러 나라의 風謠를 삼아 그것을 통해 性情과 풍속을 살폈던 것이다. 그러니 懋官의 시가 옛스럽지 않다고 해서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만약 성인이 중국에 다시 나와서 여러 나라의 풍요를 살피려고 한다면, 嬰處의 詩稿를 살펴야 三韓의 鳥獸·草木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고, 貊나라 남자와 백제 여자의 性情을 볼 수 있을 것이니, 懋官의 시를 朝鮮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朴趾源,≪燕巖集≫ 별집 권 7, 序 嬰處稿序).

 박지원에 의하면, 사람들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옛것과 中華를 본받아야 한다고 하나, 조선은 중국과 자연적·인문적 환경이 같지 않으니 그들을 억지로 흉내내야 할 까닭이 없다. 조선의 진정한 시는 오히려 조선의 풍속과 생활감정에 충실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또한 直敍的 언어의 한계를 넘어 현실의 복잡한 양상을 우회적으로 혹은 반어적으로 조명하는 소설의 가치에도 주목하였다.≪兩班傳≫·≪虎叱≫·≪許生傳≫등의 창작적 실천이 그러한 의식의 산물이거니와,<騷壇赤幟引>같은 문학론이 추구한 바도 허구와 상상을 통한 문학적 탐구의 의의에 대한 적극적 변호에 있었다.617)趙東一,≪韓國文學思想史 試論≫(知識産業社, 1978), 262∼263쪽. 그의≪熱河日記≫가 세간에 널리 읽혀지면서 稗官雜書의 문체를 썼다 하여 정조의 질책을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이 ‘以文爲戱’했다고 변명했으나, 공허한 규범의 틀을 넘어서 문학적 진실을 구현하는 데에는 상상적 개성과 풍자의 방법이 불가결하다는 입장은 견지하였다.

 李鈺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비평문인<俚諺引>에서 이런 방향의 의식을 더욱 진전시켜 하늘 아래 같은 사물이 있을 수 없듯, 모든 시대와 지역은 각기의 절실한 요구에 따른 문학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철저한 개별성의 선언으로써 중세적 보편과 상고의 이념을 부정하였다. 그는 작품과 비평 양면을 통해 정통적 사대부문학의 가치관과 주제를 거부하고 시정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적 삶을 중시하였다. 세상만물을 살피는데 사람을 보는 것만한 일이 없으며 사람을 보는데 남녀의 정을 살피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한 데서 그의 시각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모든 문학에는 각기 그 시대에 따른 개별적 특성이 있어서, 이를 法古라는 틀로써 구속할 수는 없다. 이같은 논리에 보편적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그는「천지만물」의 개별성이라는 출발점을 설정했다. 문학창조의 근거가 되는 천지만물은 각각의 성질·모습·빛깔·소리가 있다. 이를 모두어 말한다면 하나의 총괄개념이 되지만, 나누어 살피면 모두 서로 다른 성질·모습과 작용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대신하거나 모방할 수 없는 개별자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의해 그는 理라는 형이상학적 보편자 안에 일체의 사물을 거둬들이는 理一元論 내지 主理論의 명제를 깨뜨리고, 다양한 삶과 시대적·지역적 개별성을 중시하는 문학론을 전개했다. 이처럼 한문문학의 오랜 관습과 예교주의의 통념을 깨고 새로운 문학세계의 당위적 근거를 제시한 점에서 이옥의 논리는 조선 후기의 문학론이 나아간 반중세적 의식의 가장 날카로운 극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경세적 실학자였던 丁若鏞은 이들과 또 다른 방향에서 조선 초·중기 이래 내면지향적 시의식을 극복하는 현실주의 시론을 추구하였다. 그는 문학이 그보다 더 우월한 상위의 가치에 종속한다는 ‘載道之文’의 기본전제를 계승하였으되, 그 상위의 가치 즉 道에 관한 구체적 파악에서 지향을 달리하였다. 정약용이 파악한 도는 16세기의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바 存心養性의 내면지향적 가치보다 구체적인 삶과 사회·정치적 차원에 있어서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대를 걱정하고 사회적 모순을 비판(傷時憤俗)하는 비판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여≪시경≫을 해석하고 많은 사회시편을 썼으며, 문학이란 작자의 내면에 갖추어진 진지한 志意가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적 言述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때문에 그는 바람직한 시의 지표로서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온 명제인 ‘溫柔敦厚’ 대신 ‘溫柔激切’을 중시하고, 이를≪시경≫의 근본정신이라 보았다.618)金興圭, 앞의 책, 213∼214쪽. 그가 생각한≪시경≫의 근본정신은 사회정치적 모순을 諷諫 또는 비판하는 데 있으므로, 현인이 그 시대를 근심하는 시는 그 근본 뜻이 온유함을 떠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판의 언어로서의 격절함 또한 없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정약용 역시 유학자였으므로 문학이 개인적 덕성의 함양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재도지문’이라는 명제에서 도의 의미를 좀더 현실적인 차원으로 해석하여, 당면한 사회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중시했다.

 李學逵는 정약용과 비슷한 현실주의적 문학의식을 펼치면서도 창작 주체의 진실한 감정(中情)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객관적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는 내발적 창작 충동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연스런 감정을 시적 탁월함의 근거로 보았다. 정약용의 경우에는 일정한 수련과 의지적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志意에 가치의 중심을 둔 데 비해, 이학규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흘러넘침을 더 중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차이이다. 그들의 견해는 모두 유가의 정통적 詩觀인 詩言志說의 범주에 들면서도, 정약용은「重志」의 입장에서 이학규는「重情」의 입장에서 각각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619)鄭雨峰,≪19세기 詩論 硏究 1≫(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2), 70∼74쪽.

 金正喜는 性靈·格調·神韻의 의의를 각기 긍정하면서 그것들의 한계를 보완하는 입장에서의 절충적 통합을 지향했다. 그의 시론은 18세기 실학의 경세적 개혁의식이 굴절·변질되는 19세기 전반기의 상황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그는 금석과 古董의 감상과정에서 길러지는 학식 및 교양의 습득을 통해 작가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시를 포함한 예술창작의 근본이라고 보았다.620)鄭雨峰, 위의 책, 186∼210쪽. 이처럼 문인귀족의 고상한 취미와 심미의식의 세련을 강조한 그의 문학론은 19세기 전반의 문예 동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金興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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