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2) 서예
  • (1) 고법의 다양한 전개

(1) 고법의 다양한 전개

 17세기 후반 대청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중국과의 서예교섭이 재개되었고 18세기 이후로 점차 진전되어 중국의 서예가 폭넓게 수용되었다. 당시 청의 康熙·雍正·乾隆·嘉慶年間(1662∼1820)은 대체로 해행초 중심의 帖學이 성행했던 시기이다. 물론 건륭(1736∼1795) 말년에 이른바 碑學의 조짐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佩文齋書畵譜≫(1708)가 간행되고 건륭년간에≪三希堂法帖≫이 간행되는 등 명대 이래로 첩학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董其昌(1555∼1636)을 위시한 첩학의 서예가 유행하였는데 특히 역대서법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우리 나라 서예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위진고법 이외에도 당·송·명의 서예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여러 서풍이 혼재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보인 대표적인 서예가로서 白下 尹淳(1680∼1741)을 들 수 있다. 그는 王羲之의 진체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필법을 그것에 한정하지 않고 역대의 명서가를 널리 수용하였는데 특히 행초에서 송대 米芾體의 진수를 터득하여 특유의 白下體를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 洪良浩(1724∼1802)가 윤순을 신라의 金生을 이은 명서가로 평한 글이 주목된다(<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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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古詩(부분)
<사진 1>古詩(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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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白下 尹公이 천년 뒤에 태어나 뛰어남과 빼어남으로써 偏方(조선)의 고루함을 단번에 씻어냈다. 김생 이하 여러 서가를 다 취하여 그 빛나는 것을 가려냈으며 唐宋元明을 깊이 터득하여 이를 永和(王羲之)에 절충하였다(洪良浩,≪耳溪集≫권 16, 題尹白下淳書軸).

 윤순은 미려한 자태와 유연한 운필로써 서예의 심미적 측면을 제시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서법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그의 서예는 당시에 영향을 미친 듯 그의 형 尹游(1674∼1737)나 李眞洙(1684∼1632)·李眞淳(1678∼1738) 등의 글씨도 유사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백하체는 후손 尹得聖(1699∼?)을 비롯하여 李周鎭(1691∼1749)·鄭羽良(1692∼1754) 등으로 이어졌고 그의 문하에서 이광사·徐懋修(1716∼?) 등의 명서가가 배출되었으며, 이 밖의 姜世晃·曺允亨·曺允大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717)李完雨,<白下 尹淳과 中國書法>(≪美術史學硏究≫206, 韓國美術史學會, 1995), 29∼66쪽.

 그 중에서 18세기를 대표하는 서화감식가로서 서화에도 뛰어났던 豹菴 姜世晃(1713∼1791)은 自撰墓誌에서 자신의 서법을 “書法二王 雜以米趙”라고 하여 二王을 토대로 후대의 서법을 수용하였듯이, 그는 二王을 본받아야 하지만 위작이나 변형된 이왕의 법첩을 배우는 것은 옳지 않으며, 송인은 당인을 배웠고 원·명인은 송인을 배웠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원·명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서론은 윤순과 유사한 성향을 띠는데 그의 글씨에서 미불의 필의가 짙게 나타나는 것도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된다(<사진 2>).718)邊英燮,≪豹庵姜世晃繪畵硏究≫(一志社, 1988), 158∼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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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唐詩絶句
<사진 2>唐詩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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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는 달리 초년에 윤순으로부터 필법을 배웠던 員(圓)嶠 李匡師(1705∼1777)는 이후 鍾繇와 왕희지로 대표되는 위진고법에 몰두하면서 당나라 이후의 글씨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전래되던 법첩이 거듭된 모각으로 원형에서 멀어졌음을 인식한 그는 그 돌파구를 모색하다가 마침내 중국에서 전래된 篆隷碑拓을 통해 古碑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따라서 왕희지를 배우려면 왕희지 이전의 전예를 아울러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시각을≪書訣≫전·후편으로 제시하면서 전예의 필의를 해행초에 응용하는 등의 시도를 보였다. 특히 그가 주장한 전예비탁의 학습은 금석학연구를 서예의 기본으로 삼았던 김정희의 서론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서예사적 의미도 크다(<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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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李羽成墓碣
<사진 3>李羽成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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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員嶠體는 아들 李肯翊(1736∼1806)·李令翊과 조카 李天翊 및 후손 李勉愚·李鐸遠 등에 의해 이어졌으며, 曺允亨·尹師國·秦鍾煥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중 信齋 李令翊(1738∼1780)은 원교체의 일인자로서 아버지와 흡사한 서풍을 보였으며(<사진 4>) 松下 曺允亨(1725∼1799)과 直菴 尹師國(1728∼1809)은 백하체와 원교체를 바탕으로 일가를 이룬 서가로 이름이 높았다(<사진 5>).719)李完雨,<員嶠 李匡師의 書論>(≪澗松文華≫38, 1991), 53∼75쪽.
―――,<員嶠 李匡師의 書藝>(≪美術史學硏究≫190·191, 1991), 69∼124쪽.
예술의전당 편,≪員嶠李匡師展≫:원교서예의 형성과 전개(19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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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歸去來辭
<사진 4>歸去來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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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七言律詩
<사진 5>七言律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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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 위진고법을 추종한 서예가로 徐命均·李宜炳·嚴漢朋·曺命敎(1687∼1753)·金相肅·黃運祚·羅烈(1731∼1803)·羅杰형제·李至和(1773∼?) 등이 있다. 그 중 嘯皐 徐命均(1680∼1745)은 윤순에 버금가는 명서가로서 진체해서에 뛰어나 많은 비문을 썼고, 晩香齋 嚴漢朋(1685∼1759)은 이왕을 추구하여 石峯 이후 제일인자로 평가받았으며 그의≪草書千字文≫이 간행되어 유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坏喬 金相肅(1717∼1792)과 道谷 黃運祚(1730∼?)는 鍾·王의 필법을 깊이 천착하여 고박한 서풍을 이루었고, 호남에서 활약한 蒼巖 李三晩(1770∼1847)은 독학으로 행초에서 독특한 경지를 이루어 徐弘淳·牟受明·朴文會(순조대∼?) 등으로 이어졌다. 이 밖의 許佖(1708∼1768)·朴允黙(1771∼1849) 등은 거칠고 방일한 필치로 개성적 서풍을 보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唐代의 글씨가 다시 유행하였는데 그 중 顔眞卿體가 가장 널리 수용되었다. 안체는 고려 후기에 나타나 송설체가 득세한 뒤 일부만이 명맥을 이어가다가 조선 중기 말엽에 들어서 南九萬(1629∼1711)·崔錫鼎(1646∼1715)·朴泰維(1648∼1710)·朴泰輔(1654∼1689)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서 李縡(1680∼1746)·尹鳳五(1688∼1769)·李亮臣(1689∼1739)·閔遇洙(1694∼1756)·洪啓禧(1703∼1771)·李麟祥·李徽之(1715∼1785)·元仁孫(1721∼1774)·鄭東浚·曺匡振 등 다수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안진경이나 그 맥을 이은 柳公權의 글자를 모아 새긴 集字碑도 다수 조성되었다. 이후 안진경체는 해서뿐만 아니라 행초도 널리 유행하여 근대서예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또한 통일신라·고려시대에 걸쳐 풍미했던 歐陽詢體 등도 19세기 이후로 다시 수용되었는데, 특히 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김정희와 같은 서예가들에 의해 점차 수용폭이 넓어져 沈熙淳(1819∼?)·柳湘(순조대∼?)·韓應耆(1821∼1892) 등의 구양순체 서예가를 낳게 되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명대의 동기창체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명말청초 이래로 풍미하여 많은 영향을 미쳤던 동기창체는 이미 윤순시대 서예가들의 글씨에서 부분적인 영향을 보이다가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正祖(1752∼1800)·南公轍(1760∼1840)·李復鉉(1767∼1853)·申緯·李南軾·李尙迪 등이 이를 수용하였다. 이 가운데 詩書畵 三絶로서 유명한 紫霞 申緯(1769∼1845)가 대표적인데, 그는 당시 청에서 일어난 새로운 서풍보다는 帖學을 근간으로 미불·동기창을 수용하였으며 한때 청대첩학의 대가로 동기창체를 수용한 翁方綱(1733∼1818)의 글씨를 따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蘇軾 이래의 文人書畵論에 바탕을 두고 서예에서 개성과 인품을 중시한 그의 예술관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서풍은 제자 李晩用(1802∼?)과 아들 申命準(1803∼1842)·申命衍(1809∼1886) 등으로 이어졌다(<사진 6>).720)金炳基,<詩書畵 三絶 紫霞 申緯의 書藝觀-中國的 淵源을 중심으로>(≪紫霞 申緯 回顧展≫, 예술의전당, 1991), 130∼149쪽.
金泫廷,<紫霞 申緯의 書畵硏究>(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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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蓼花詩(부분)
<사진 6>蓼花詩(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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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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