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2) 서예
  • (5) 한글서체의 극성

(5) 한글서체의 극성

 조선 후기에는 언해본의 간행과 활용이 늘어났고 또한 소설문학의 발달에 따라 한글소설이 유행하는 등 이전에 비해 한글의 사용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와 아울러 이들 서적을 베끼는 일도 빈번해졌는데, 특히 왕실에서는 이러한 謄書업무와 함께 윗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업무가 증가하면서 이를 전담하는 상궁까지 두었다. 이에 궁중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정갈하고 미려한 한글서체가 발달하였는데, 흔히 이러한 한글서체를「宮體」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같은 현상은 대략 18세기에 들어서 진전되기 시작되었고, 영·정조대를 거치면서 본궤도에 올랐으며, 19세기 후반에는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궁체의 최고봉을 이루었다.724)예술의전당 엮음,≪조선시대 한글서예≫(미진사, 1994), 93∼154쪽.
―――,≪한글서예변천전≫(1991) 참조.

 궁체의 필적은 소설이나 편지가 주종을 이루며 이 밖의 일기·기사 등도 있다. 소설류는 정연한 짜임과 숙달된 필치를 보이는데, 오늘날 전하는 藏書閣 소장의 한글등서본을 위시한 대부분의 것은 19∼20세기 초에 필사된 것들이다. 편지는 왕후를 비롯한 왕실여인들이 직접 썼거나 상궁이 대필한 것들로 대부분 흘림체이며 운필이 부드럽고 자형이 매우 아름답다. 왕후나 공주로서 궁체에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순조비인 純元王后(1789∼1857)와 딸 德溫公主가 매우 유명했다. 서사상궁으로는 익종비 神貞王后(1808∼1890)의 대필자인 천상궁, 헌종비 明憲王后의 대필자인 현상궁, 그리고 고종비 明成皇后(1851∼1895)의 대필자인 하상궁·서상궁 등이 뛰어난 필력을 보였다(<사진 16>). 한편 일반인의 글씨에도 궁체와 유사한 예가 있지만 대부분 자연스럽게 흘려 쓴 글씨체가 주종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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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6>封書(부분)
<사진 16>封書(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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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조선 후기에는 국가나 왕실에 의해 언해본을 위시한 다수의 한글서적이 간행되어 한글대중화에 큰 몫을 하였는데, 특히 영·정조년간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사찰·서원·개인에 의해서도 적지 않게 간행되었던 한글서적은 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전하며 매우 다양한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정조 21년(1797) 왕명으로 출간된≪오륜행실도≫는 붓으로 쓴듯 필선이 살아 있고 짜임이 매우 근정하여 조선 후기 한글서적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사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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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7>≪오륜행실도≫권 1
<사진 17>≪오륜행실도≫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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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完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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