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5) 건축
  • (2) 도성과 궁궐

(2) 도성과 궁궐

 조선 초기에 축조되어 중기에 이르면서 기틀을 잡은 도성의 성곽건축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큰 조영활동은 없었다. 다만 문루들이 개수되거나 창건되었다.

 도성의 서북 소문인 彰義門은 영조 17년(1741)에 개수되면서 이 때 새로이 문루를 세웠다. 문루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단층의 우진각지붕을 이루고 있다. 공포는 이익공양식으로 익공의 끝단은 수서로 되어 있고, 가구는 5량이다. 이 때 동소문 역시 문루가 창건되어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으나, 1980년대 그 옆의 빈터에 복원하였다.

 도성의 사대문 중의 하나로 동대문인 興仁之門은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어, 단종 원년(1453)에 개작되고 후기까지 내려오다가, 고종 6년(1869)에 새로이 지었다(<도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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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1>興仁之門(동대문)
<도면 1>興仁之門(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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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武砂石으로 바른층쌓기하여 陸築을 쌓고 육축 중앙에 아치(虹霓)를 쌓아 출입구를 만들고, 커다란 대문짝을 달았다. 특히 성밖으로 옹성을 쌓은 것이 도성의 다른 대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축대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집으로, 공포는 1층은 외 2출목 내 3출목, 2층은 내외 3출목의 다포식 공포이다. 초제공·2제공의 살미첨차는 섬약한 앙서로, 3제공은 수서로 되고, 안쪽으로는 운형을 조각하여 극히 장식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기둥 웃몸과 주두의 앞뒤로 운형의 장식부재인 안초공을 두었다.738)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서울특별시사-고적편≫(서울시, 1963), 335∼343쪽.

 궁궐건축은 고종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중창역사가 시작되었다. 경복궁은 태조 3년(1394)에 창건되어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그 후 방치되어 왔는데, 고종 2년 4월에 대왕대비로부터 중건의 하교가 있어 궁성을 쌓고, 교태전 정초를 하면서, 고종 4년에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고종 13년의 대화재로 25년에 다시 중건하게 되었는데, 그 후 1917년 일제가 수천칸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이른바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었다.

 경복궁의 배치는 중심영역의 전각들과 문들, 광화문·홍례문·근정문과 근정전·사정전과 좌우의 만춘전·천추전·강녕전들의 중심축은 남서방향으로 약간 기울어 癸坐丁向의 좌향을 이루면서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타의 내전들과 각종 행각들이 자유롭게 배치되고 궁성 또한 주변 지세에 맞추어 쌓은 관계로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비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도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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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2>경복궁 배치도
<도면 2>경복궁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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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 좌우로는 궁장이 뻗어 좌우의 동서 십자각까지 이르고, 여기서 ㄱ자로 꺾이어 북쪽으로 뻗어 전체적으로 부정형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궁성의 4대문으로 남문인 光化門, 동문 建春門, 서문 迎秋門, 북문 神武門을 세웠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弘禮門이 자리잡고 이 좌우로 행각(월랑)이 뻗어 있어, 좌우에 쌓은 담장과 만나며 장방형의 옥외공간을 이루고 있다. 홍례문을 들어서면 禁川이 서쪽 월랑의 밑으로 흘러 들어와 동쪽 월랑 밑으로 흘러 나가며, 이 위에 놓은 금천교인 永濟橋를 건너 정전의 정문인 勤政門을 들어서 정전 앞뜰에 이른다.

 정전의 옥외 공간은 월랑으로 사방을 둘러막고 중심 안쪽으로 월대를 두고 정전을 세운 장방형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정전 월대의 정면에는 세 폭의 돌계단을 만들었는데 중앙은 왕이 연을 타고 다니는 곳이니만큼 봉황을 조각한 면석을 두었고, 근정문까지의 사이는 중앙이 제일 높고 좌우가 한 단 낮은 御道를 만들었다. 어도의 좌우에는 정1품부터 정9품의 18품계를 나타내는 품계석들을 늘어놓아 동쪽 마당에는 문신들이 서쪽에는 무신들이 품계에 맞추어 늘어선다. 이 정전의 마당은 부정형의 薄石들을 깔고 가장자리는 장대석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또한 遮日고리들이 행사할 때를 대비하여 바닥 곳곳에 박혀 있다.

 정전인 勤政殿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두 단의 넓은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 초벌 대의 기단을 두고 이 위에 건립하였는데, 월대는 다른 궁궐 창덕궁·창경궁의 정전 월대와 달리 돌난간을 두르고, 난간의 엄지기둥마다 방위에 맞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여 세웠으므로 화려하면서도 위엄을 갖추었다.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의 전각으로 다포식구조를 이루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4출목으로 살미첨차는 섬약한 쇠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아래위가 하나의 판처럼 붙으면서 끝은 운형으로 조각되어 후기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2층의 가구는 1층의 평주와 고주 사이의 퇴보(退樑)위에 2층의 평주를 세우고 이 평주와 1층에서 연장되어 올라온 고주 사이를 퇴보로서 결구하였다. 고주와 고주는 1·2층에서 고주끼리 보로서 결구하여 중층건물의 일반적인 가구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1층과 2층은 통간으로 뚫려 있고, 1층 내진 안쪽 어칸에 목조로 층계와 높은 단을 만들어, 이 위에 어좌를 두고 日月五岳屛風이 둘러쳐져 있다. 지붕은 팔작 겹처마로 용마루 양단에 취두를 놓고, 합각마루와 추녀마루에 용두와 잡상들을 늘어놓아 장식하였다(<도면 3>·<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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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3>근정전 입면도
<도면 3>근정전 입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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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3>근정전 평면도
<도면 3>근정전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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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월 대
<사진 1>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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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뒤편 회랑의 중앙에는 사정문이 서 있어 이 문을 통하여 편전인 思政殿에 이른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사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萬春殿, 서쪽에 千秋殿을 두어 세 전각으로 구성된다. 사정전 뒤로 權五門을 통하여 왕의 침전영역으로 들어선다. 침전의 正寢은 康寧殿이고 동서에 동소침인 연생전, 서소침 경성전 등으로 구성된다. 강녕전의 뒤에는 왕비의 침전인 交泰殿이 자리잡고, 교태전 뒤로 왕비의 후원인 동산 峨嵋山이 자리잡고 있다.

 내전 중의 으뜸 전각인 왕의 정침 강녕전은 정면 11칸 측면 5칸의 단층의 팔작기와집으로 앞쪽에 월대를 둔 높은 기단 위에 이익공양식으로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헐어내어 1991년 다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강녕전은 팔작겹처마의 지붕이나, 용마루 없이 기왓골과 마루들이 둥그런 모습으로 뒤로 넘어가는데 이는 침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로 온돌방들을 두었으며, 전각의 좌우 끝단의 온돌방 옆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또 대청과 온돌방의 전면에는 퇴마루를 뒤편에는 퇴와 협실들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평면은 조선시대 궁궐침전의 기본형식이다.

 대비전인 慈慶殿은 교태전 동북방에 위치하며, 궁중연회처인 경회루와 그 연못은 강녕전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경회루는 넓다란 方池를 파고 그 속에 방형의 섬을 두어 이 섬에 중층루인 경회루를 세웠다. 땅에서 돌다리를 건너 루에 이른다. 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아래층은 48개의 돌기둥을 세웠는데 외진기둥은 방주이고 내진기둥은 원주이다. 2층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퇴간 바닥이 가장 낮고, 다음 고주와 내고주 사이가 좀더 높게, 내고주와 내고주 사이의 가장 안쪽 바닥을 가장 높게 하여 연회할 때 위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공포는 이익공식이고, 겹처마의 팔작기와지붕으로 취두·용두·잡상들을 늘어놓아 장식하였으며, 특히 큰 합각을 이루고 있다(<사진 2>).739)朱南哲,<景福宮의 宮制와 建物의 機能>(≪景福宮-復元整備基本計劃報告書≫, 문화재관리국, 1994), 4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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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경회루
<사진 2>경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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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에 건립된 궁궐의 중요 전각으로 창덕궁의 정전 仁政殿과 仁政門을 들 수 있다. 인정전은 태종 5년에 초창되어, 태종·단종 때 다시 고쳐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타 광해군 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지금의 전각은 순조 3년(1803)에 화재를 만나 순조 4년에 중건된 것이다.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장대석으로 한 벌 대의 기단을 만들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기와집을 세웠다. 공포는 외 3출목 내 4출목의 다포식 공포로서 살미첨차의 끝은 섬약한 앙서로 되고 안으로는 운형을 조각하였으며 안초공을 두어 장식하였다. 가구는 내진의 고주와 1층의 변주 사이에 걸린 퇴보 위에 2층의 변주를 놓아 1·2층을 통간으로 하였으며, 1층의 고주는 그대로 2층의 고주가 된다. 현재 바닥은 쪽마루로 되어 있고, 전등시설과 커튼박스·커튼 등 서양식적인 실내장식이 가해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 서양식건축의 영향을 받아 변화된 것이다(<도면 4>).740)朱南哲,≪韓國建築美≫(一志社, 1983), 235∼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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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4>인정전
<도면 4>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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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내에 건립된 후기의 궁궐건축으로는 영조 21년(1745)에 중건된 인정문, 순조 34년(1834)에 중건되어 1917년 화재로 1920년에 중건된, 왕비의 침전인 大造殿, 정조 9년(1785)에 건립된 壽康齋, 헌종 12년(1846)에 건립된 樂善齋 등이 있다. 이 중 수강재와 낙선재는 중간에 석복헌을 두고 연이어져 건축된 궁궐의 전각양식이 아니고, 사대부집과 같은 성격의 건축이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육모뿔대의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주두를 놓았으며 그 주두 위에 대량을 건 납도리집이나 창방머리를 초각하여 장식하였다. 평면은 온돌방과 마루·누마루로 구성되었고, 앞뜰에는 노둣돌(下馬石)이 놓여 있고, 뒤뜰에는 석단을 쌓아 花階를 이루어 화초를 심으니 사철 절기에 따라 잎이 돋아 무성하고 낙엽지며 눈꽃이 만발하는 활엽수들을 심고, 또 바닥에는 커다란 石蓮池를 놓아 물을 담고 연꽃을 기른다. 바닥과 화계 위에는 여러 개의 石函들을 늘어놓았다. 굴뚝을 화계 위에 만들고, 벽면에는 무늬로 장식하고 煙家를 놓아 연기를 내면서 아울러 장식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외부 공간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높은 터에 단을 이루면서 둘러쳐진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담장이 포용하여 변화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 전통정원의 후정양식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실례의 하나이다(<사진 3>).741)朱南哲, 위의 책, 116·125∼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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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낙선재 후정
<사진 3>낙선재 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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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때 조성되기 시작하였던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禁苑·秘苑) 안에 영조 53년에 건립된 奎章閣은 장서를 보관하고 또 열람하던 궁궐의 도서관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의 누각이다. 기둥은 외진주는 방주이고 내진주는 원기둥으로 공포는 이익공양식을 이루고 있다. 아래층의 천장은 모두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나, 이층에서는 내진주 안쪽만 우물천장을 하고 외진에는 서까래를 노출하여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지붕의 용마루 끝단에는 취두를 놓고,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놓아 장식하였다.742)朱南哲,≪비원≫(대원사, 1990), 34∼37쪽.

 德壽宮은 본래 선조 26년(1593)에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함으로써 궁궐이 되었고, 그 후 광해군 3년(1611)에 慶雲宮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광무 11년(1907)에 고종황제가 순종황제에게 양위하면서 고종의 궁으로서 덕수궁이라 개칭하였다. 이 궁내에는 건양 2년(1897)에 咸寧殿·璿源殿·普文閣 등이 건립되고 광무 10년에는 중화전이 중건되었으며, 융희 4년(1910)에는 석조전이 완공되었다. 이 가운데 함녕전은 고종의 정침으로 그 평면양식은 경복궁의 강녕전과 같은 모습이고, 공포는 몰익공식이다.

 정전인 중화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팔작기와집이다.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두 단의 월대 위에 장대석 한 벌 대의 기단을 쌓고, 쇠시리가 된 원형의 다듬은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워 외 3출목 내 4출목의 공포를 짜 얹은 다포식건축이다. 공포의 살미는 섬약한 앙서와 운궁으로 구성되고, 기둥에 안초공을 두어 조선 후기의 다포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단층이나 천장을 높이 가설하고, 옥좌 위에 닫집을 만들어 위엄을 더하였다.743)朱南哲, 위의 책, 39∼40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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