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5) 건축
  • (3) 읍성과 관아·객사

(3) 읍성과 관아·객사

 후기 읍성건설의 대표적인 예는 수원 華城이다. 본래 수원읍의 주산이었든 花山에 정조가 부친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으로부터 옮겨 오게 되면서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길 것을 정조 13년(1789)에 명하게 되었다. 신읍에는 구읍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관아·향교 등의 공공건물을 짓게 되었다. 정조 14년에 신읍에 성곽을 축조하는 문제를 논의하였고, 정조 17년에는 새 읍을 화성이라 하고, 정조 18년에 본격적인 공사를 시행하여 정조 20년에 완공을 보았다(<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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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화 성
<사진 4>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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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조선의 성곽은 실상 전쟁이 발발하면 성내에 살던 사람들이 주변의 산성으로 피난하여 적을 방어하여 왔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 전쟁을 겪고 난 후 중국과 일본 성제의 장점들을 연구하여 조선의 성곽을 보다 견고하고도 합리적으로 쌓을 것을 제안한 사람들로 趙憲·姜沆·柳馨遠 등이 있었다. 즉 주민들이 살기에 충분한 크기를 가지며, 전쟁 때에는 살던 곳에 그대로 살면서 적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포루 등을 많이 설치하고 치성과 옹성을 쌓도록 하였다. 특히 후기 실사구시를 주창한 실학파들은 중국의 문물제도를 둘러보고 벽돌 사용을 적극 권장함으로써 화성의 축조에 벽돌쌓기가 적극 도입되었다. 丁若鏞은 수원성축조를 위하여 城說·甕城도설·砲樓도설·縣眼도설·漏槽도설·起重도설·총설 등을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는데, 지금까지 축조되지 않았거나 적극적으로 축조되지 않고 있던 포루·옹성 등등을 적극 축조할 것을 권하여 砲樓 7, 敵樓 4, 敵臺 9, 鋪樓 2, 弩臺 1, 角城 7개소로 하고, 성 둘레는 3, 600보, 성벽 높이 2장 5척으로 계획하였다. 실제 성곽의 성벽은 지형에 따라 높이의 차이가 있으나, 4m 내지 6m로 아래쪽에 큰 돌, 위쪽에 작은 돌로 쌓으면서 중앙부가 들어가는 圭形으로 쌓았다. 성문은 남에 팔달문, 북에 장안문, 동 창룡문, 서 화서문을 세우고, 필요한 곳에 暗門과 水門을 세웠다. 또 將臺와 포루 등을 세워 방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수원성의 축조는 비단 새로운 축성술을 집약한 것일 뿐만 아니라 축조 후 이 때의 공사기록을 집대성한≪華城城役儀軌≫는 한국건축사에 있어서 당시의 시공방법, 소요물자의 종류와 수량, 건축용어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인 것이다.744)김동욱,≪수원성≫(대원사, 1989).

 조선 후기에 축성된 성곽으로는 영조 7년에 종전보다 더 크게 쌓은 동래읍성, 영조 12년에 쌓은 대구읍성 등이 있다.

 성곽의 안에는 당연히 관아와 객사 등이 건축되는데 조선 후기에 건립된 관아로는 충청감영 선화당, 충주동헌, 연산아문 등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한양 성곽내에 건립된 관아로 현존하는 것은 종친부와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청헌당 등이 있는데 이 중 총무당과 청헌당은 고종 5년(1868)에 조선 초기 군무를 통괄하던 옛 자리에 새로이 건립한 것으로 지금은 모두 다른 곳에 이건되어 있다. 총무당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워 이익공공포를 짜 올린 익공양식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단층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이다. 전후면 깊은 퇴를 두고 중앙에 6칸의 대청을, 좌우에 1칸 크기의 마루방을 앞뒤 하나씩, 좁은 마루방을 앞뒤 하나씩 두어 결국 온돌방이 하나도 없음이 특징이라 하겠다. 청헌당 역시 이와 흡사한데, 다만 초익공공포를 둔 것이 다르다.

 충청감영 선화당은 순조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장대석 바른층쌓기 세 벌 대의 기단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워 익공을 2개 놓아 결구한 이익공양식의 단층 겹처마의 팔작기와집이다. 전면에는 석계 세 폭을 놓고,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후 좌우로 퇴간을 둘러 일부는 개방하고 일부 온돌방 주위로는 창호를 두어 온돌방의 협실(마루바닥)로 하였으며, 동쪽 4칸을 온돌방으로 서쪽 8칸은 대청으로 구성하였다.

 충주동헌은 충주목의 관아로서 고종 7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공포의 짜임은 이익공양식이다. 평면의 동쪽에는 창호를 들여 마루방 3칸을 꾸미고, 중앙 6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으로, 또 서쪽에는 사이를 벽과 창호로 구획하여 여러 개의 온돌방을 만들었다(<도면 5>).745)주남철,<관아건축에 관한 연구>(≪建築≫28-116, 대한건축학회, 1986), 79∼89쪽.
―――·김종영,≪韓國傳統建築-官衙建築≫(대한건축사협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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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5>충주동헌
<도면 5>충주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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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5>충주동헌
<도면 5>충주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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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淳昌客舍는 영조 35년에 건립되었는데, 본래 주관과 좌우익헌이 있었고 중문과 외삼문·고직사·루 등이 건립된 것이 일반적 객사의 구성이었으나, 주관과 동익헌만이 남아 있다. 주관은 단층 맞배집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양식이며, 동익헌은 단층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주관 쪽으로는 맞배지붕이고 동쪽은 팔작지붕을 이루는 이익공양식의 건축이다(<사진 5>).746)주남철,<客舍建築의 硏究>(≪大韓建築學會論文集≫통권 5, 대한건축학회, 1986), 79∼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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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순창객사
<사진 5>순창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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