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2. 미술
  • 5) 건축
  • (7) 양식건축의 도입과 양식건물

(7) 양식건축의 도입과 양식건물

 외래양식의 전파는 주택건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고종 13년(1876) 병자수호조약 이래 부산·원산·인천 등이 차례로 개항되면서 서양인과 일본인 거류민의 수적 증가로 양식주택과 일본식주택들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서양식 주택건축은 고종 21년 건립된 세창양행의 사택이다. 건평 173.15평, 일부 2층의 벽돌집으로 외벽은 회칠이고 붉은 기와를 얹었다. 인천 북성동의 죤스턴 별장은 석조 4층 연건평 452.98평으로 옥상에 물탱크를 마련한 스팀난방으로 새로운 난방법을 주택건축에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서양식 공공건물로는 부산의 日本管理官廳(고종 16)이었다.752)尹一柱,≪韓國洋式建築80年史≫(야정문화사, 1966), 22쪽. 그 후 원산·인천에 이어 서울과 부산의 일본영사관과 공사관들이 양식을 모방하여 건립되었다.

 전술한 세창양행의 양식건물이 세워진 이래 종교계 건물로는 고종 27년 종현에 주교관을 붉은 벽돌의 2층집으로 지었고, 고종 29년에는 약현성당과 용산신학교를 지었다. 특히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종현성당은 붉은 벽돌의 고딕양식의 건물로서 중국인들이 벽돌공사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한편 교육기관으로 고종 23년 배재학당과 강당이 붉은 벽돌조로 건립되었으며, 광무 4년에는 이화학당의 메인홀이 2층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조로 건립되었다.

 조선인 자율로 지어진 양식건축으로는 옛 영은문 자리에 서재필이 독립문을 세웠는데 이는 개선문의 양식을 이루고 있다. 또 궁궐내에 지은 양식건축으로 광무 4년에 착공하여 융희 4년(1910)에 완공을 본 덕수궁의 석조전은

 상해의 영국인 기사 G. R. Harding에 의하여 설계되었다. 3층 연건평 1, 226평으로 이오니아식의 고전주의양식 건물로 2층에 접견실과 홀, 3층에 황제·황후의 침실·거실·담화실·욕실 등을 두었다(<사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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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덕수궁 석조전
<사진 6>덕수궁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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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초반에 건립된 양식건물들은 상당수에 이른다.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들면 독일영사관(광무 5:1901), 천주교 원효로성당(광무 6), 정동 손탁호텔(광무 6), 벨기에영사관(광무 7), 세브란스병원(광무 10), 부산 일본상품진열관(광무 8), 인천 제임스 존스턴 별장(광무 8) 등이다. 이 중 벨기에영사관은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고전주의적 양식의 건물로 서울시문화재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을사조약(광무 9) 이후 탁지부에 건축소라는 부서를 두고 일본인 기술자들을 다수 고용하여 많은 관아건축을 지었다. 탁지부청사(광무 11)는 르네상스식을 모방한 건물이었고, 대한의원 본관(융희 2년:1908)은 붉은 벽돌조로 중앙에 네오바로크풍의 시계탑을 두었다. 부산세관(융희 4)도 붉은 벽돌조의 영국풍 르네상스식이다.753)朱南哲,<20세기초 건축>(≪文化財大觀-史蹟篇增補≫, 문화재관리국, 1991).

<朱南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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