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 음악
  • 1) 궁중음악의 변천과 새 경향
  • (1) 양란 이후의 장악원

(1) 양란 이후의 장악원

 인조 15년(1636) 병자호란 직후부터 영조 29년(1753)까지 일어났던 장악원의 어려웠던 실태가≪樂掌謄錄≫에 자세히 전한다. 병란 때 부서진 악기의 제조와 무역에 관한 일, 종묘제례악의 복설에 관한 일, 악공과 악생에 관한 여러 사정들이 매우 상세하게≪악장등록≫에 기록되어 있다.754)宋芳松,≪樂掌謄錄硏究≫(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0), 93∼134쪽.

 악기제작이 필요할 때마다 나라에서는 樂器都監과 같은 임시관청을 세워서 필요한 악기를 제작했는데, 인조 2년과 24년의 악기도감, 그리고 인조 5년의 樂器修改廳이 그 실례이다. 숙종 8년(1682)과 36년 및 영조 22년(1744)에 설치된 樂器造成廳도 궁중음악의 필요한 악기를 제작하기 위해서 설립됐던 임시관청이었다.755)宋芳松, 위의 책, 97쪽의 주 246·249 참조. 그런데 그 당시의 악기도감이나 악기조성청에서 제작할 수 없는 笙簧과 같은 아악기는 중국에서 무역할 수밖에 없었다.756)宋芳松,≪韓國音樂史硏究≫(영남대 출판부, 1982), 513∼552쪽의 주 16∼25의 원전 참조. 인조 이후 영조 때까지 한 세기 동안 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북경에서 생황을 들여다가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종묘제례악은 궁중의 제례의식 중에서 가장 중요시됐던 제례음악이었지만, 나라의 재정 형편이 어려웠을 때에는 종묘제례악마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 14년부터 병자호란 직후 인조 23년까지 종묘제례악은 10년 동안이나 못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나라의 재력이 바닥을 드러냈고, 악공과 악생들이 전란중에 잡혀 죽었거나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궁중음악의 연주가 중단됐던 10년 동안 장악원은 악공과 악생 100명을 그것도 50명씩 둘로 나누어 봄·여름 및 가을·겨울에 각각 궁중음악을 연습시켰다.757)宋芳松, 위의 책, 445∼448쪽. 장악원의 이런 상황 아래서 궁중음악은 역사적 변천과정을 걷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궁중음악의 하향세는 불가피한 대세였다.

연 대 악 공(명) 악 생(명) 합 계(명)
성종(1469∼1494)
임진왜란(1592)
선조 37(160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영조(1724∼1776)
572

427(감 145)
441(감 131)
429(감 143)
446(감 126)
339

397(감 2)
185(감 214)
190(감 209)
195(감 204)
971
837(감 134)
824(감 147)
626(감 345)
619(감 352)
641(감 330)

<표 1>장악원 소속 악공과 악생의 역사적 변천일람표

宋芳松,≪韓國音樂史硏究≫, 457쪽의 표 Ⅲ-8에서 옮김.

 조선 초기 성종(1468∼1494) 때 장악원에 소속된 악공과 악생은 모두 971명이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많이 감원됐고, 영조조에는 330명이나 감원된 641명이었다. 양란 이후에 감소된 악공과 악생의 수는 궁중음악의 변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양란 이후 축소된 등가악현과 헌가악현은 바로 여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장악원에서 활동했던 악공과 악생들은 그들의 奉足들이 나라에 바치는 價布로 한양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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