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4. 무용·체육 및 연극
  • 1) 무용
  • (1) 궁중무

가. 정재무

 조선 초기의 찬란했던 악무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사화로 인하여 국가질서가 몹시 어지러웠고 따라서 그 문화 또한 발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쇠퇴해 있었던 악무는 영·정조에 이르러 다시 전시대의 것을 부흥하고자 노력했으나 세종조의 예악문물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영조(1724∼1776) 때 內宴에서 쓰던 呈才로는 獻仙桃·壽延長·五羊仙·抛毬樂·蓮花臺·夢金尺·鳳來儀·牙拍·舞鼓·處容舞·尖袖舞 등이 있고, 外宴에서 쓰던 정재로는 初舞·牙拍·響鈸·舞鼓·廣袖·處容舞(<그림 1>)가 있었는데, 宴享에서 추는 정재의 單子는 왕에 의해 결정되었다. 장악원에서 향악·당악정재의 舞單을 왕에게 바치면, 왕은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낙점하였다. 그리고 내연에서는 무동 대신에 女妓들이 참여하였는데 이 여기들 중에는 내의원과 혜민서의 女醫까지 합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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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處容舞
<그림 1>處容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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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년간(1766∼1800)에 이르러서도 영조 때의 정재와 거의 같아 여기에 의한 내연에서의 정재로는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몽금척·하황은·봉래의·아박무·향발무·무고무 등이며, 무동에 의한 외연에서의 정재로는 초무·아박·향발무·무고·공수무·처용무 등이었다.

 영조·정조 때에 정비된 악무는 순조(1800∼1834) 때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여 궁중정재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이는 순조 27년(1827) 부왕의 명으로 승정대리로 정무를 맡아 보게 된 왕세자 효명의 무용에 대한 탁월한 재능과 식견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효명세자에 의해 새로 창작된 정재는 순조 28년 6월에 進爵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는데 내연·외연에 모두 무동이 참가하였고, 그 이름을 들면 다음과 같다.

望仙門·寶相舞·萬壽舞·獻天花·春坮玉燭·慶豊圖·影池舞·撲蝶舞·春鶯囀·疊勝舞·舞山香·沈香春·蓮花舞·春光好·催花舞·佳人剪牡丹·高句麗舞·響鈴舞·抛毬樂·公莫舞·舞鼓·牙拍·響鈸舞.

 이상 23개의 정재 중 망선문에서 향령무까지의 18개 정재가 세자의 睿製인 것이다.

 순조 29년 2월에 또 進饌이 있었는데, 이 때는 내연에서 여기가 맡았으므로 비로소 女伶呈才가 부활되었다. 이 때 연출된 정재로 새로운 것으로는 長生寶宴之舞·劍器舞·般遊樂·尖袖舞·佳人剪牡丹(<그림 2>)·初舞 등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진찬에서는 외연만이 있었기 때문에 무동들만 참가하여 演百福之舞·帝壽昌·催花舞·長生寶宴之舞·佳人剪牡丹·舞鼓·牙拍·響鈸·四仙舞·無㝵舞 등 11종을 연출하였다. 이 가운데 장생보연지무·연백복지무·제수창·최화무의 네 가지는 많은 향악정재를 창작할 즈음, 당악정재의 특징의 하나인 竹竿子를 도입하여 당악정재로서 창작된 것으로, 죽간자와 구호의 형식을 택했을 뿐, 춤사위·반주음악 등은 향악정재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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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佳人剪牡丹
<그림 2>佳人剪牡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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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향·당악정재의 구별이 없어지고 춤이 외적 구성에서가 아니라 내적 구성에 보다 중점을 둔 예술성 높은 춤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1834∼1849)·철종(1849∼1863)을 거쳐 고종대(1863∼1907)에 이르기까지 무악제도는 대개 순조 때에 연무되던 정재를 썼으며 새로운 것이 창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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