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17세기 전반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아울러 양반사회에 불어닥친 가장 중대한 변화는 宗法의 본격적인 수용이었다. 이후 同姓村落이 형성되는가 하면 촌락 재산의 대부분이 宗家로 모아지는 등 異姓雜居村落, 男女均分相續과 같이 오랜 관행으로 내려오던 양반층의 생활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026)崔在錫,<17世紀 親族構造의 變化>(≪韓國古代史硏究≫, 一志社, 1987).
李樹健,<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朝社會史의 一硏究>(≪韓國史學≫9, 1987).
―――,<朝鮮前期의 社會變動과 相續制度>(≪韓國親族制度硏究≫, 一潮閣, 1992).
宗家型 地主가 새롭게 등장하고 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班村이 생겨난 것은 宗法 수용의 결과였다. 이러한 현상은 성리학의 심화에 따른 양반층의 성장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양반층의 성장에 따른 자기 분열 과정이기도 했다. 16세기 이래 국가 혹은 상민층에 대해서 공동 대응하던 양반층이 17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됨에 따라, 작게는 향촌 주도권을 둘러싸고 크게는 중앙 권력을 두고 他姓 양반층과의 본격적인 분쟁을 시작한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 경남우도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양반층의 분열 양상은 17세기 중, 후반 무렵에는 서북, 양계지방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鄕權을 둘러싸고 발생한 鄕戰은 양반층의 주도권이 일찍이 확립된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어 士族勢가 강한 여타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향전은 당시 극렬하게 전개되는 중앙의 당쟁과도 직, 간접으로 관련을 맺음으로써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그렇지만 양반층의 동성촌락으로의 집결 현상은 양반층의 상호 대립, 분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앙법의 보급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라는 상황에서 점차 경제력을 축적해나간 상민층과의 대응에 있어서도 양반층의 조직화는 필요했다. 16세기 이래 양반층의 상민 지배 방식은 農庄主로서의 신분적, 경제적 권위를 앞세워 作人 혹은 隷農을 지배하는 일대일 대응이었다. 이러한 대응이 가능했던 것은 鄕約, 鄕案과 같은 조직과 기구를 이용한 양반층 상호간의 유대와 결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양반층의 분열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그에 따라 향약과 향안이 변질되는 시점에서, 그리고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던 극심한 당쟁에 직, 간접으로 간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형태로는 상민층에 대한 지배가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상민층에 대한 양반층의 공동대응방식을 대신하여 동성촌락에 의한 유력 성씨의 타성 지배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즉 班村의 성세에 힘입어서야 상민 촌락 곧 民村에 대한 지배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소빙기에 의한 17세기 위기의 도래 이후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이 간접지배 형태로 전환하면서 상민층이 신분적 굴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가 한층 커져 갔다. 각종 부세가 공동납으로 운영되는가 하면 신분세로서의 양역세는 公·私役의 균일화 추세 아래 과세부담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게다가 대동법 실시 이후 양역세가 貢物防納을 대신하여 국가 기관의 주요 수세원으로 등장하면서 양역 대상층의 관청 및 군문으로의 투속이 훨씬 쉬워졌다. 각 관청과 군문이 자체 재정 조달을 위해서 필요 재원을 경쟁적으로 유입하는 상황에서 양역 자원의 투속을 부채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부가 서원, 향교, 군문, 관청 등에 冒屬하여 종래의 직역을 버리고 院生, 校生, 軍官, 胥吏 등을 冒稱함에 따라 중인 직역을 획득하는 자들도 늘어났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 이들의 사회적 성장이 가능하면서, 이들은 균역법 실시 단계에서 양반층과 아울러 면역층으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027)金盛祐,<조선후기 ‘閑遊者’層의 형성과 그 의의>(≪史叢≫40·41, 199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이 함축하는 국가의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곧 간접 지배방식으로의 전환 이후, 양안과 호적의 작성과 부세징수의 책임이 지방관에게 대폭 위임되었다. 부세체제의 운영, 징수와 관련되는 한 수령권은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 병작제로의 이행,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조응하여 재부를 축적하는 신흥 부민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구래의 양반층이 기피하던 面任, 里任職을 수행하는가 하면, 鄕廳에서 지방관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면서 점차 수령 행정의 하위 조직으로 포섭되어 갔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 일부는 一鄕 양반층의 배타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던 鄕案入錄을 시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양반층과 갈등, 대립하는 양상을 빚기도 했다. 그리고 사족세가 약한 지역에서는 지방관의 지원 아래 그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구래의 양반층과 신흥 부민들 사이에서 향안입록과 향권 주도권의 향방을 둘러싸고 향전이 진행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18세기 전반기를 경과하면서 양반층과 신흥 부민층 사이에서 향전이 격렬하게 진행된 지역에서는 儒·鄕 分岐 현상이 발생하고, 新·舊鄕의 대립과정에서 향안이 罷置되거나 더 이상 작성되지 않는 사례도 나타났다.028)金仁杰,≪조선후기 鄕村社會 변동에 관한 연구-18, 19세기「鄕權」담당층의 변화를 중심으로-≫(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수령권의 지원 아래 향권 장악을 시도한 이들 신향층은 부세징수와 관련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守令-吏·鄕收奪構造 아래 편제되어 갔다.029)高錫珪,≪19세기 鄕村支配勢力의 변동과 農民抗爭의 展開≫(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신향층은 부세징수와 관련하여 대민 수탈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신향층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면서 구래의 양반층, 곧 구향층은 대응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종법 수용 이후 마을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친족제도 혹은 경제구조에도 많은 변화가 초래되면서 신향층에 대한 양반층 상호간의 공동 대응이 거의 불가능했다. 중앙의 권력장악을 목표로 양반층은 수많은 당파로 분기되어 격렬하게 당쟁을 벌이는가 하면, 一鄕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서도 타성 양반층과 갈등을 빚었다. 문중을 기초로 한 양반층의 결집과 조직화 현상은 양반층 내부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대결구도에서 더욱 가속을 받아 동성촌락의 형성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반층 상호간의 분열, 대립 양상은 수령권과의 긴밀한 유대 아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키워나간 新鄕層과의 대결구도에서 효과적인 공동 대응기구의 마련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전유물처럼 여기던 향안 작성과정에 지방관의 개입을 허용하는가 하면, 향권의 주도권을 두고 신향층과도 힘겨운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립, 분산성을 극복하지 못한 양반층은 향교의 주도권을 확보하거나, 문중 書院과 祠宇를 건립함으로써 門中을 단위로 일정 지역에서나마 그들의 지배를 유지하려 했다.030)李海濬,≪朝鮮後期「門中書院」硏究-全南地域 事例를 중심으로-≫(國民大 博士學位論文, 1993). 18세기 이후 서원, 사우의 濫設이라는 현상의 출현 배경에는031)鄭萬祚,<17∼18世紀의 書院·祠宇에 대한 試論-特히 士林의 建立活動을 中心으로->(≪韓國史論≫2, 서울大, 1975). 이처럼 양반층에게 결코 유리할 것이 없는 당시 상황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양반층과 상민층의 일대일 대응에서는, 특히 신향층과의 대립구도 아래에서는 그들이 양반층이라고 해서 반드시 신분적, 경제적 우위가 확보될 수 없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032)이윤갑,<조선후기의 사회변동과 지배층의 동향>(≪韓國學論集≫18, 1991).

 이처럼 18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구래의 신분질서가 동요하고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는가 하면 구세력과 신흥세력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17세기 이래 확립된 사족지배구조는 점차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양반층의 경우 18세기 이후 老論의 일당 전제화 과정 속에서 관직을 독점, 정국을 전횡하는 소수의 閥閱家門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당쟁에서 패배한 대부분의 양반층, 특히 南人과 少論은 관직진출로가 구조적으로 막힌 채, 동성촌락을 기초로 혹은 지주제를 배경으로 일정 지역에서나마 영향력을 행사하는 鄕班으로 자리잡아 갔다. 향반층 가운데 다수는 적장자상속이 강화되는 추세 아래 피지배층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우위의 확보라는 지난날의 영광을 상실하고 자영농민, 심지어 작인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양반층이라고 해서 모두 지주로서의, 혹은 특권층으로서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반면 이 시기 새롭게 성장한 부민층은 수령권과의 결탁 아래 점차 부세행정의 말단 기구에 참여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들은 鄕所에 출입하거나 향안입록을 시도하면서 구래 양반층이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향권을 점차 획득해 나갔다. 특히 사족세가 약한 지역에서는 향권의 주도권을 두고 양반층과 대립하는가 하면, 끝내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정법 실시로 인한 공동납체제로의 전환 이후 戶政 운영방식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호적상의 직역 조작이 한결 쉬워진 상황을 이용하여 상민층의 직역을 모칭하거나 모록, 조작하는 행위도 이전보다 많아졌다. 상민 직역으로부터 중인 직역, 그리고 양반 직역으로 모칭하는 자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面任, 里任으로서 守令-吏·鄕收奪構造 아래 편입되어 대민 수탈을 담당했으며, 일부는 향안입록을 통해서 혹은 양반층과의 교류를 통해서 양반사회에 편입되어 양반층으로의 실제적인 행세가 가능하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양반층에 의한 배타적인 향촌 지배, 혹은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의 일방적인 행사가 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양반층의 특권적 지위가 다방면에서 위협받는 상황에서 17세기에 확립된 사족지배구조는 동요하고 있었다. 李重煥은 18세기 중반 무렵의 각 신분 및 계층을<표 6>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033)李重煥,≪擇里志≫ 總論.

신 분 계 층
兩 班 士大夫 朝廷縉紳之家(大家·名家)
(下) 士大夫 鄕曲品官·中正·功曹
中 人 庶孼(士庶)
雜色人(將校·譯官·算員·醫官·方外閑散人)
下 人 良民·軍戶·京外吏胥
奴婢·公私賤

<표 6>18세기 중반 신분에 따른 계층 분류

 이중환은 양반층의 극심한 자기 분열 및 분화, 중인층의 새로운 신분층으로서의 자리매김, 양인과 천인의 동일 신분으로의 고정 현상이라는 신분구조의 변화 추세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사회현상으로서의 반상제의 고착화, 양반층의 분열, 호적상에서의 직역 모칭자의 사회적 성장, 公·私役 균등화 및 동일화와 같은 다양한 변화를 수용한 결과였다. 18세기 중반 당시 사회가 인정하는 계층별 신분구성은 이처럼 다기했다.

 그렇지만 호적상에서 양반 직역과 중인 직역의 가호가 급증하고 상민 직역의 가호가 급감하는 양상이 대체적인 경향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18, 19세기 조선사회의 신분구조가 본격적으로 해체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경상도 언양지역에서 그러한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언양지역은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단 1명의 문과급제자만을 배출할 정도로 사족세가 미약한 지역이었는데도, 순조 13년(1813)에 작성된 호적에 의하면 양반호 59.5%, 중인호 9.2%, 상민호 31.3%로 나타나는 등 다른 지방의 직역 변동 추이와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18, 19세기 언양의 향촌사회는 남인 계통의 경주 김씨, 동래 정씨, 경주 이씨, 밀양 박씨, 진주 강씨, 영안 송씨 등 6대 성씨와 노론 계통의 안동 권씨, 영산 신씨 등 2대 성씨로 구성된 8대 성씨가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들 8대 성씨들은 향교와 서원, 사우 조직을 통해서, 상호간의 교류와 결속을 도모하고 조직화를 시도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신분적 우위를 유지해 나갔다. 따라서 언양 지역에서 이들이 주도하는 집단에 속하기 위해서는 通婚을 바탕으로 하거나 향촌조직의 각종 有司職을 역임하는 형태로 주도 집단의 사전 승인이 필요했다.034)南延淑,<朝鮮後期 鄕班의 居住地 移動과 社會 地位의 持續性(I·II)-彦陽 못안골 昌寧 成氏 家門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83·84, 1993·1994). 이러한 양상은 사족세가 강한 지역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전라도 순천의 경우 7大姓이 향교를 중심으로 서원과 사우를 통제하면서 향권을 주도하는가 하면, 나주의 경우 토착세력과 유입 사족세력인 ‘客班’이 향촌 주도권을 둘러싼 알력과 극심한 당색에 의해서 각 문중별로 서원과 사우를 설립, 운영하면서 향권을 분점하기도 했다.035)鄭勝謨,<書院·祠宇 및 鄕校 組織과 地域社會體系(上·下)>(≪泰東古典硏究≫3·5, 1987·1989). 따라서 사족세가 강한 지역이든 그렇지 않은 지역이든 향촌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大姓, 곧 유력한 양반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호적상에 양반호로 기재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바로 주도 양반세력에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순조 13년(1813)에 작성된 언양호적에서는 직역 변동 추세 이외에도 挾人, 挾戶가 호적상에 기재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호당 구수가 8.7명에 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호적이었다.036)李榮薰,<彦陽戶籍을 통해 본 主戶-挾戶關係와 戶政의 運營狀況>(≪朝鮮後期 社會經濟史≫, 한길사, 1988). 대부분 호적상의 가호는 主戶만이 등재된다는 점, 그리고 호당 평균 구수가 4∼5명 안팎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협인, 협호의 기재와 호당 구수의 상대적 고비율이라는 특징이 언양지역 호적에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은 바로 19세기 전반까지 이 지역에 할당된 호총, 구총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정조 8년(1784) 언양 지방의 호총은 1천 100여 호였는데, 雜頉戶를 제외한 應役戶는 656호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들 응역호가 부담해야 하는 軍摠은 1천 780명으로서 1호당 평균 3∼4명의 군역을 져야 했다. 이와 같은 극심한 호총과 구총의 불비례 관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호총을 구성하는 주호뿐만 아니라 그 예하의 협호까지도 군역부담이 불가피했다. 이 때문에 여타의 호적에는 누락되었을 협호, 협인이 순조 13년 언양호적에는 기재되었던 것이며, 그에 따라 1호당 평균 구수가 상대적으로 과다책정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서 조선 후기 양역변통의 추이와 호적 기재 방식의 변화, 양자의 상관성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양역변통 과정에서 양반층은 신분세로서의 양역세 유지를 고집하는 한편 균역법에서 면역층으로의 법적 추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대가로서 양반층은 이정법, 노비종모법의 실시와 공·사역의 均一化 추세를 용인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노비와 양인의 신분적 계선이 사라지게 되었고, 면, 리 단위에서 결정되고 摠額制로 운영되는 호총과 구총이 유지되는 한 호적상의 직역 기재는 문제되지 않았다. 양역변통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숙종 30년대 이후, 특히 이정법의 실시가 확정된 숙종 37년(1711) 이후 양반호의 급증, 중인호의 증가, 상민호의 급감이라는 호적상의 변화는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언양지역처럼 호총과 구총의 비례관계가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는 지역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호총과 구총의 비례관계를 맞추어야 했다. 여기에서 다른 지방의 호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협인, 협호가 기재되는가 하면, 협인, 협호들까지도 양역세를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언양호적은 부세징수, 특히 양역세를 원활하게 징수하기 위해서는 호적의 오랜 관행이 파기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037)主戶와 挾戶가 동시에 기재되어 있는 언양호적은 이 지역에 할당된 戶摠과 口摠을 맞추기 위한 목적에서 元戶를 인위적으로 분할, 등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호의 인위적인 분할, 곧 分戶 현상은 18세기 중반 무렵에 고정된 호총 및 구총의 총수를 채워넣을 수 없던 잔폐한 군현에서는 보편적으로 시행되던 방식이었다(≪增補文獻備考≫권 161, 戶口考 1, 歷代戶口, 朝鮮, 영조 35년).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양호적에서 나타나는 60%에 가까운 양반호 모두가 실제로 이 지역 향촌사회를 주도하는 양반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호적에 양반호로 등재된 수많은 양반호 가운데 향교와 서원, 사우를 장악, 운영하고 폐쇄적인 신분혼을 통해서 사회를 조직화시켜 나간 8大姓만이 언양사회를 주도하는 실제적인 양반층이었던 것이다.

 18세기 전반 이래 공동납이 양역세 징수의 원칙으로 채택된 이후, 호적상의 직역 기재는 호총과 구총의 상호 비례관계 아래 조절되고 있었다. 호총과 구총이 일정한 비례관계로 징수되는 상황에서는, 따라서 양역세 징수가 원활한 지역에서는, 호적상의 직역이 免役層으로 기재되든 有役層으로 기재되든 문제되지 않았다. 18세기 전반 이후 양반호와 중인호의 급증, 상민호의 급감이라는 호적 기재의 양상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호적상에 양반호로 기재된 자들이 모두 그 지역 양반층으로 행세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일정 지역을 대상으로 향권을 행사하는 실제 양반세력은 향교나 서원, 사우를 장악하고 그들만의 사회를 조직화하고 있던 특정 성씨집단 뿐이었다. 그들이 해당 지역의 6대 성씨, 7대 성씨 등등으로 불리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물론 동성촌락을 기초로 반촌을 형성하면서 여타의 민촌들을 장악하는 경제외적 강제, 곧 신분적 강제를 행사하면서 향촌사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상 신분제의 해체는 2가지 요소가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노동의 객관적 조건인 토지, 즉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고 또한 인신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임노동자의 출현과정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19세기 최말기까지 조선사회는 소유와 점유에 대한 구분이 불명확했으며, 이 때문에 생산관계 측면에서 경제외적 강제가 작용할 여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038)박명규는 개항 이전인 1872년과 甲午改革 이후인 1897년의 民狀 분석을 통해서 1897년에는 경작권의 移作, 奪耕에 대한 畓主 권한이 한층 강화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점유권보다는 소유권 우선이라는 자본주의적 배타적 소유권이 갑오개혁 이후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이전 시기에는 여전히 점유권과 소유권이 불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박명규,<19세기 후반 향촌사회의 갈등구조-영광지방의 민장 내용분석>,≪韓國文化≫14, 1993). 그리고 이앙법의 확대 보급과 이모작, 상업적 작물의 재배 등을 통한 농법의 집약화 경향은 한편에서는 廣作을 가능하게도 했지만 그 대세는 경지 규모에서의 상·하층의 영세균등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039)李榮薰,<19세기 農民經營의 分化趨勢와 階層別 存在形態-慶尙道 南海 龍洞宮庄土에 관한 事例分析->(≪韓國의 社會와 文化≫13, 1990). 그리고 경영분해 측면보다는 소유분화 형태로 富益富 貧益貧이 재편됨으로써, 경영의 합리화를 통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과정과는 거리가 먼, 토지 집적에 의한 지주제의 확대·강화 추세가 또다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040)都珍淳,<19세기 宮庄土에서의 中畓主와 抗租>(≪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후기 농촌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품생산과 사회적 분업관계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발달하고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자연경제의 일부분으로서 농가의 자급자족적 생산구조를 補足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041)李憲昶,≪開港期 市場構造와 그 變化에 관한 硏究≫(서울大 經濟學科 博士學位論文, 1990). 게다가 19세기 세도정권기에 접어들면서 국가의 대민 수탈 강도가 더욱 강화되어 자영농민층일지라도 가중된 부세를 다내고 나면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심지어 국가의 대민 수탈 양상은 호적 등재시 양반호로의 기재를 강제하면서 幼學錢을 강제 징수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042)≪慶尙道監營啓錄≫고종 6년(1869) 12월. 19세기 이후 幼學戶의 급증은 상민층의 신분상승 욕구 이외에도 신분상승을 강제하는 지방관의 대민 수탈 행위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유 분화의 결과이든 대민 수탈로 인한 재생산 기반의 박탈의 결과이든 농민층이 토지로 방출되어 향촌사회를 유리하더라도, 이들을 흡수할 새로운 산업기반이 조성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지역사회로부터 이탈된 유리민들은 재래의 산업기반인 농촌사회로 재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세기 최말기까지 조선사회의 현실은 경제외적 강제로서의 신분제가 기능을 상실할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지 않았다. 호적상의 양반호의 급증 현상과는 상관없이 지역사회의 주도 세력은 동성촌락을 중심으로 향교와 서원, 사우를 조직, 운영하면서 향촌의 주도권을 내놓지 않았다. 게다가 향촌 주도 세력의 주요 기반이었던 서원과 사우는 국가의 빈번한 금지령과 훼철 지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증설되고 있었다. 대원군 집권기에 전국적으로 47개 소만을 남겨두고 대대적으로 훼철된 서원들은 대원군 실각 이후 계속해서 향촌사회를 주도하는 지배세력들에 의해서 복설되었으며, 서원과 사우의 복설을 주도하고 운영권을 장악한 세력들이 향촌사회를 실제로 주도하고 있었다. 향촌사회를 주도한 이들 양반층이 일본 제국주의의 주권 침탈에 맞서 저항하는가 하면 의병활동을 주도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 노력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金盛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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