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3) 민중조직의 활성화

 16∼17세기의 향촌사회에서는 사족들을 중심으로 동계나 동약이 광범하게 실시되고 있었지만 향촌조직이 사족들의 동계나 동약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족지배체제가 강화되는 속에서도 기층 촌락민의 생활문화 기반 위에 존속하던 향도, 음사 등의 촌계류 조직들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조직이 향촌사회에서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사족들에 의해 그 기능이나 역할이 크게 위축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하층민의 요구에 따라 분동이 널리 이루어지면서 민중조직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게 되었다.

 그간 향촌사회의 운영원리로 작용해오던 동계·동약이 더 이상 기층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면서 민의 촌계류 조직들이 새롭게 부상하였다.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18세기 말, 19세기의 향촌사회에는 각종 조직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19세기 중엽 전라도 무주의 경우에는 다음의 평가가 있다.

우리 東國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촌마다 계가 있고 각 집안마다 계가 있으니, 이르기를 科契·筆契·墨契·紙契·洞契·射契라 하여 그 이름이 다단하다. 혹 서로 모여 추렴해서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며 웃고 즐김으로써 한때 비용을 다 써버리고 하룻나절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오직 宗契와 譜契가 효의 정신에 가까운 것이나 이 또한 순정치 못한 것이다(≪裳谷八里孝稧鄕約節目≫茂州, 철종 7년).

 또한 19세기 전반 李圭景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契라는 것은 王逸少의 蘭亭修契에서와 같이 상서롭지 못한 것을 떨치는 모임이 아니다. 옛날의 里社와 같이 一里가 서로 모여 식리하는 것을 계라고 한다(예를 들면 漁夫契·四亡契·四寸契 등과 같이 일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36, 香徒辨證說).

 이와 같이 민간에서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각종의 계조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자료들은 일반 민들 사이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계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농사에 관련된 일을 공동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農契·農具契·牛馬契, 상례를 치르기 위해 결성된 喪契·喪輿契 등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지역 단위의 계는 사족주거의 동(리) 아래에 예속되어 있다가 조선 후기 촌락의 분화과정에서 독립되어 나온 하위의 마을을 기본단위로 하여 운영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조직이 각 촌락사회에서 갖는 위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또 구체적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는 관련자료가 많지 않아 명확히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일반적으로 계는 구성원들의 요구에 따라 일정한 자금을 마련하고 그것을 취식하는 것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또 동제나 당제 등과 같은 공동체적인 祭儀 역시 계조직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민중조직의 활성화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공동노동조직으로서의 두레이다. 두레조직은 수전농업지역에서 17세기 후반 이후 이앙법이 보급되고 있던 상황에 조응하여 발달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구성의 기본단위를 각 동, 촌락으로 하고 있던 두레는 황두군과 같은 이전의 직파법 아래에서의 공동노동조직이 벼농사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두레는 조직의 구성에서도 지주층의 참여와 간섭을 배제하고 자작·소작농민을 성원으로 하였기 때문에 농민사회의 자율성을 높이는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자·소작농만을 구성원으로 한 것은 황두군도 마찬가지였지만 두레는 지주와의 관계를 철저하게 賃銀 관계로 처리하여 농업경영으로부터 봉건적·신분제적 강제를 배제하였던 것이다. 신분제적 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이전의 노동조직도 바라는 것이었을 것이나, 조선 전기에서처럼 그것들이 지방관의 직접적인 통제대상으로 오르거나, 16∼17세기 사족층이 주도하는 동계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는 상황에서는 달성되기 어려운 것이었다.062)李泰鎭, 앞의 글(1989). 그것은 두레 자체의 향상된 경제력을 발판으로 보다 더 공고한 결속을 발휘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었다.

 두레는 집약적인 노동력의 필요와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이전의 공동노동조직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촌락사회 내에서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그 비중은 18세기에 稻麥 이모작이 보급되면서 더욱 높아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두레조직은 기본적으로 마을 단위의 조직이었던 데에다 지주층의 간섭을 배제하고 있었으므로 두레를 통한 공동노동 과정에서 농민들의 자의식은 고양될 수 있었다. 이것은 이후 촌락공동체적 질서체계와 연관관계를 지니면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마을의 두레와도 연대감을 가질 수 있는 단계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조건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 민중들이 합법적 공간을 이용하여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명하고, 국가에서도 이에 대한 일정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이전까지의 민중저항의 일반양상은 유리, 도망이었고 이것이 가장 강력한 저항 수단이었으며, 조직적인 항쟁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농촌에서 유리된 층이 중심이 된 도적이나 명화적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18세기에도 이같은 현상이 지속되고 일층 강력해지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제 이 시기에 이르면 농촌에 토착해서 사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수령이나 감사를 상대로 等訴, 議送을 제출하는 것이 빈번해졌다. 여기에서의 중심 내용은 토지, 부세문제 등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 활발하게 작성되는 목민서에 여러 이유로 제기되는 소장에 대한 처리, 특히 등소 처리에 관한 ‘套書’, 즉 사건의 처리방식에 관한 형식이 실리고 있는 것은 이제 생활기반을 가지고 토착해서 사는 이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집단적으로 표출할 만큼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민의 요구가 증가되자 국왕의 입장에서도 16세기 중엽까지 ‘四件事’, 즉 자신이 직접 刑을 받는 일, 父子 관계를 가리는 일, 嫡妾을 가리는 일, 良賤을 분간하는 일 등 4가지의 경우에만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 밖의 사안은 擊錚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 대상을 확대하여 일반 民隱 전반에 대해 호소함을 허락하여 합법적 공간에서의 민의상달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 하였다.063)韓相權,≪朝鮮後期 社會와 訴寃制度-上言·擊錚硏究-≫(一潮閣, 1996). 이같은 조치로 인해 일반 민인들이 수령, 감사, 나아가 비변사에까지 자신들의 집단적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 당시 민중은 합법적인 등소 외에도 집단행동을 통한 ‘호소’도 많이 행하였는데, 이같은 방법을 통해 부세감면, 민전침탈, 상업적 이익 등 공동의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이같은 등소와 호소를 통한 집단항쟁의 경험이 이후 ‘민란’과 같은 대중투쟁의 토양이 되었다.

 이상과 같이 18세기의 일반 민들 사이에서는 여러 조직이 발전하고 있었고, 민중의 집단적 목소리가 사회 전면에 나타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이 변화되는 조건에 상응하여 촌락사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운영원리를 제시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틈을 이용하여 관권이 깊숙히 침투하고 있었고, 향촌사회 내부에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층민들은 각종 목적계나 두레를 자체적으로 결성 운영하면서 자신들의 자치력과 결속력을 다져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획득된 자치력이나 결속력은 이후 사족이나 관권과 갈등이 생겼을 때 자신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 또 계나 두레의 조직은 대중동원을 위한 조직으로 바로 전화될 수 있었다. 때문에 정부측에서는 민인들의 집단행동을 흔히 ‘作契’라는 용어로 표현하였고, 그것이 집단행동으로 나타날 경우 ‘結黨作亂’으로 크게 문제삼게 된다.

 18세기 ‘결당작란’의 주체는 일반 민인, 아전, 토호 등 다양하였고, 그것에 동원되는 층이 주도자의 족당이나 수하인이 일반적이었지만, 그 가운데 토호가 주체가 된 경우에는 다수의 민인을 동원하고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조 17년(1741) 밀양부에서 발생한 ‘汨蕫契’사건을 들 수 있다.064)≪英祖實錄≫권 53, 영조 17년 정월 갑술. 이는 밀양지방의 토호가 수백 명의 민인과 더불어 돈을 모아 골동계라는 조직을 결성한 후 수령을 바꾸고 향임을 차출하는 등 실력행사를 하여 큰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정조 6년(1781) 함창 토호가 수령의 체형에 반발하여 무리를 모아 단체를 결성하고 돈을 거두어 수령축출을 도모한 것065)≪正祖實錄≫권 13, 정조 6년 정월 신해. 역시 마찬가지 사건이다. 토호들이 주도하였던 사건들에서 민인을 모으는 데 계를 이용하였던 것은 당시 계조직이 민중의 결속에 일반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체를 통해 결집된 힘은 수령을 교체할 정도로 향촌사회 내부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촌계류나 두레가 촌락사회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지만, 촌락사회 내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던 부류들이 조직화되고 있던 현상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와 함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치는 기간에는 농지에서 유리되거나 도시로 유입된 하층민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유망민은 어느 시기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 시기에 오면 그 수가 크게 급증하여 정부 내에서도 유망민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생활근거지를 잃고 도성이나 읍성 주위에서 거주하던 이들은 생계의 수단으로, 혹은 자위적인 집단조직으로 향도계를 조직하여 잡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악한 조건으로 인해 그들 가운데에는 도적화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수한 목적의 조직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7세기 말 서울 지역의 하층민 중심으로 결성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劍契’이다. 검계는 유망하여 서울로 흘러들어온 자들이 중심이 된 조직으로서, 여기에는 평민뿐만 아니라 사대부가나 궁가의 종까지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떤 행동목표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사로이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조직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한편 노비들 가운데에는 자기 주인뿐만 아니라 양반 일반을 대상으로 살육과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殺主契’를 조직하는 경우도 발견되는데,066)鄭奭鍾,<肅宗朝의 社會動向과 彌勒信仰>(≪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3). 이들의 성격 역시 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영조 초년의 戊申亂을 거치면서 무신란에 동원되었던 사회세력의 경험과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확산되고, 18세기에 들어 더욱 증폭되는 가운데 明火賊과 같은 보다 대규모적이고, 지속적인 항쟁활동으로 전개되어 나가게 되었다.067)영조 연간에 전개된 명화적의 성격과 활동에 대해서는 韓相權,<18세기 前半 明火賊 활동과 정부의 대응책>(≪韓國文化≫13, 1992) 참조. 물론 이들 세력이 사회적 전망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어서 바로 변혁세력의 주체로 부각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이후 사회변혁세력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17, 18세기에 사족이 주도하던 동계조직의 모순과 한계성에 직면하면서 기층민 조직들은 자체의 새로운 자생력과 진로를 획득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기층민이 중세 말기의 변혁주체로서 사회 전면에 나설 수 있게끔 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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