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1) 민중세계의 각성

 민중이 자신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변혁의 주체로서 나서기 시작했다고 할 때, 그 첫째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의식의 변화였다. 18세기에 이르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의식은 확실히 종래와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의식의 변화는 조선 후기 심화되고 있던 농민층의 분화, 즉 농촌사회의 동요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농촌사회의 동요는 크게 보아서 두 측면에서 야기되고 있었다. 즉 조선왕조가 재정기반을 위해 규정한 봉건적 수취체제의 한계와 그 운영과정에서 나타난 봉건지배층의 횡포가 그 한 측면이었고, 또 하나의 측면은 17세기 이래 두드러진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로의 편입이 그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혹한 수취체제가 일차적으로 농촌경제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가혹한 수취체제로 인한 농민의 유망은 본래부터 간헐적으로 야기되고 있었는데, 18세기에 이르러는 자연재해의 빈발, 사회기강의 이완, 가치관의 변화 등에 의해 보다 조장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전후의 농촌사회의 동요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기본적으로 농업 생산력의 획기적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활성화의 토대에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조건은 전자와는 달리 농민들로 하여금 힘의 축적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게 했고, 삶의 방향과 주체적 의지의 상관관계를 헤아려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은 민중세계를 보다 합리적으로 깨우쳐 농민들로 하여금 보다 객관적으로 현실을 인식시켰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농촌사회의 동요를 갈등 구조로 전화시키는데 작용하였던 것이다. 농민층의 분화라는 모습으로 보여진 농촌사회의 동요는 여러 방면에서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다. 우선 토지소유관계의 변화가 농민층의 분화를 촉발하였다. 본래 조선 초기의 토지소유관계는 기본적으로 토지의 사적 소유를 토대로 하면서 科田法이란 토지분급제에 의해 그 사적 소유를 일정하게 제약하고 있었다. 즉, 소유권의 측면에서 지주전호제가 존재했는가 하면, 수조권의 측면에서 田主佃客制가 성립되고 있었다.158)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94쪽. 그런데 16세기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수조권은 제도적으로 소멸되고 지주전호제가 지배적 생산관계로 발전해 갔다. 지주제는 양반·토호 등이 토지를 집중함에 따라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17세기에 이르면 농법의 개량이나 농업 생산력의 발전 및 이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경영의 확대, 그리고 봉건적 지배층의 토지개간과 토지겸병에 의해 양적으로 지주제가 확대되어 갔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신분제와 관련하여 인신적 지배·예속 관계를 내포하고 있던 기존의 봉건적 지주제가 신분질서의 동요, 유통경제의 성장을 배경으로 佃戶의 신분적 외피가 제거되고 경제적 관계에 의한 새로운 지주제로 전개되어 갔다.159)李景植,<17世紀의 土地開墾과 地主制의 展開>(≪韓國史硏究≫ 9, 1973), 122쪽. 비특권적 서민지주에 의한 순수한 지주적 농업경영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이후 더욱 심화되어 갔고 따라서 토지소유에 있어서의 격차는 보다 현저해져 갔다. 토지는 극히 소수의 부유층에 의해서 소유되는 경향이 두드러져 갔고, 그에 반해서 대부분의 농민들은 영세한 토지를 소유하거나 토지가 없이 남의 땅을 소작해야 하는 無田農民으로 전락해 갔다. 18세기 초반 토지 소유의 상황은 약 6%의 농가가 농토의 약 44%를, 약 63%의 농가가 농토의 약 18%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토지가 없는 농가도 전 농가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었다.160)金容燮,≪朝鮮後期 農業史硏究≫ Ⅰ(一潮閣, 1970), 202쪽. 18세기 후반 농촌의 실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던 朴趾源도 자기 농토를 가지고 농사짓는 자는 열 사람 가운데 한두 명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161)朴趾源,≪燕巖集≫ 권 16, 課農小抄 限民名田議.

 그런데 18세기 이래 토지소유관계의 변화는 이전 시기와 달리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종래의 토지소유관계는 주로 정치적 권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졌고, 또 정치적 권력의 확장을 위해 토지를 획득하였으나, 이 시기에 와서는 그보다는 농촌사회가 상품화폐경제에 편입되는 분위기 속에서 화폐에 의해 토지를 구입했고, 토지를 정치적 권력을 얻는 수단으로 보다는 경제적 이익, 화폐재산의 증식을 위해 구입했다.162)전석담·허종호·홍희유,≪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이성과 현실, 1989), 107쪽. 15세기의 농업 생산력 증대는 16세기 상품유통을 촉진시켰고, 17세기 이래로 금속화폐가 유통되면서 그 경향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양반관료, 토호, 상인 등은 재화를 축적하였고, 그들은 축적된 재화의 많은 부분을 수익성이 비교적 안정된 토지에 투자하였다. 특히 봉건지주층은 경쟁적으로 토지집적에 힘썼다. 봉건지주들은 勒買를 하지 않아도 토지를 쉽게 겸병할 수 있었다. 당시 상품화폐경제가 전개되는 속에서 농민들은 경제가 파탄하여 농토를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지주들은 쉽게 토지를 집적하였는데, 대지주는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칠 만큼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경상도의 崔氏와 전라도의 王氏는 萬石꾼으로 알려지고 있었다.163)丁若鏞,≪與猶堂全書≫ 권 11, 田論.

 양반관료, 토호 등의 봉건지주뿐 아니라 상업활동으로 막대한 재화를 축적한 상인들도 토지집적에 힘썼다. 예컨대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던 松商은 향촌의 토호들과 결탁하여 토지를 겸병하여 대지주가 되기도 하였는데,164)≪松商日記≫ 을묘(1855) 7월 19일. 이같은 사례는 송상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토지의 상품화는 이 시기 이후 두드러진 사회현상의 하나였다.

 부유층의 토지집적 과정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농토로부터 배제되는 농민층은 더욱더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층은 이제 부농층과 빈농층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갔고, 그리하여 농토를 잃은 농민들은 머슴이나 품팔이 등 농업노동자로서 농촌에 계속 머물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도시·광산·포구 등으로 나가서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농민층의 계급분화가 이루어져 간 것이다. 토지소유관계로 인한 농민층의 분화는 지역차는 있었지만, 18세기에는 대체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농민층의 분화는 농업경영형태의 변화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각 산업분야에서 커다란 진전이 있었는데, 특히 농업분야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농업분야에서의 새로운 모습은 경영형태의 변화였다. 예컨대 廣作이 행해지고 상품작물이 재배된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농업분야에서의 변화는 생산력의 증대에 기초하고 있었다. 14·15세기에 이루어진 連作法의 일반화, 施肥法의 발달, 16세기의 수리시설의 개발은 생산력을 상당히 높여주었다.165)이태진,<14·5세기 농업기술의 발달과 신흥사족>(≪東洋學≫6,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78), 337쪽. 18세기에 이르면 농법이 크게 달라지면서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증대하였다.

 농촌사회는 봉건지배층의 중농정책에 의해 그 동안 완만하지만 진전을 보이고 있었는데, 양란을 맞으면서 전국이 전장화되고 그리하여 농토의 대부분이 황폐해졌고, 그에 따라 농민층은 생업의 기반을 잃었다.166)≪宣祖實錄≫ 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이러한 상황은 농업에 그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봉건지배층에게는 위기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서둘러 농경지의 확충에 나서 개간사업을 널리 장려하였다. 그러나 개간사업은 오히려 봉건지주층의 토지겸병과 지주세를 확대시켰을 뿐, 농민층은 오히려 소유지를 잃거나 감축당해야 했다.167)李景植, 앞의 글(1973), 123쪽.
宋讚燮,<17·8세기 新田開墾의 확대와 經營形態>(≪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293쪽.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즉 농법의 개량을 통하여 수확을 증대시킴으로써 활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농법의 개량은 논농사와 밭농사에서 두루 진행되었다. 논농사에서는 移秧法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어 갔고, 밭농사에서는 作付體系가 개선되었다. 특히 이앙법의 발달은 농가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모판을 만들어 싹을 틔우고 그것이 자라면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은 조선 전기에도 경상도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실시되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자연적 조건의 제약 등으로 인하여 볍씨를 뿌린 땅에서 그대로 키우는 直播法이 일반적이었다. 이앙법에 의해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모내기철에 충분하게 물을 확보해야 하는데, 봄에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우리 나라 기후조건에서 수리시설을 확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좀처럼 채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정부에서는 가뭄의 피해를 우려하여 이앙법을 금지하였으나, 농민들은 洑와 같은 작은 규모의 수리시설을 개발하면서 이앙법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에 오면 삼남지방의 경우 거의 90%에 가까운 지역에서 이앙법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하여 김매기, 피사리 등에서 노동력을 덜어주었고, 단위 면적당 생산력을 크게 높여 주었다. 또 이앙법은 논농사에 있어서 벼와 보리의 二毛作을 가능하게 하여 농민의 소득증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168)金容燮,≪朝鮮後期 農業史硏究≫Ⅱ(一潮閣, 1971), 34쪽. 밭농사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6세기 이래 다양한 쟁기가 개발되면서 땅을 깊이 파고 밭두둑을 높이하여 이랑과 두둑에 각각 알맞은 작물을 재배하는 작부체계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특히 畎種法이 널리 보급되어 갔다. 이로써 지역적 특성에 맞는 1년 2작, 2년 3작의 윤작체계가 정립되었고, 그에 따라서 토지생산성이 높아져 갔다.169)金容燮, 위의 책, 117쪽.
閔成基,≪朝鮮農業史硏究≫(一潮閣, 1988), 169쪽.

 농법의 변화는 생산력을 증대시켰을 뿐 아니라 농업경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른바 광작이란 새로운 농업경영양식이 나타난 것이다. 즉 이앙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을 덜게 되면서 농민 1인당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종래보다 약 5배로 늘어났고, 단위 면적당 경작 노동력을 약 80% 가량 감소시켰다. 이에 따라 경작능력이 증대하면서 농민들은 많은 농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지주들은 토지 자체의 확대를 통해서,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소작지 경영의 확대를 통해서 광작을 해나갔다. 직파법으로 10두락도 못짓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 20두락 내지는 40두락까지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170)宋贊植,<朝鮮後期 農業에 있어서의 廣作運動>(≪李海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0), 107∼118쪽.

 그러면 광작은 누구에 의해서 시도되었을까. 아마 광작을 처음 시도한 것은 직접 생산자인 농민, 즉 자작농 내지는 소작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작의 이로움, 즉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보다 많이 흡수할 수 있다는 이로움은 곧 지주층에 의해서도 파악되었고, 그리하여 광작운동의 주도권은 이내 지주층, 특히 在地 지주층에게 넘어갔다. 재지 지주들은 종래에는 자기 소유토지의 대부분을 소작농에게 대여하면서 한편 일부 농토는 자기 소유의 노비나 머슴을 사역하여 직접 경작하였는데, 이제 노동생산성이 발전하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크게 늘어나자 소작농에게 대여하던 토지의 상당부분을 自耕地로 돌려 노비·머슴 등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경작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는 지주에게는 소득을 높이는 것이었지만, 소작농민들은 그만큼 자신의 借耕地를 빼앗기는 것이었다. 지주와의 대립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소작농민들은 이제 그들 소작농민끼리 소작지를 확보하고자 경쟁관계에 돌입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차경지마저 전부 상실하게 된 무전농민들은 농업노동자로서 계속 머물기도 하지만, 농촌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171)≪備邊司謄錄≫ 90책, 영조 7년 8월 24일.

 농촌사회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보다 심하게 동요하였다.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농민들은 점차 소상품생산자로 전화되어 갔다. 15세기 후반 생겨난 장시는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설치되고 있는데, 또한 이 시기에는 교환수단으로 금속화폐가 널리 통용되고도 있었다.172)전석담·허종호·홍희유, 앞의 책, 65쪽.
元裕漢,≪朝鮮後期 貨幣史硏究≫(韓國硏究院, 1975), 104쪽.
이같은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상품화할 수 있는 농업생산품의 출하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인삼, 담배, 목화, 채소 등의 작물이 판매를 목적으로 재배되어 갔다. 생산물의 교환이 점차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면서 화폐는 누구에게나 긴요한 것으로 되었다. 지주나 부유한 농민은 물론 가난한 농민들도 어떠한 물건이던지 돈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화폐취득의 욕망이 컸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자기의 생산물을 시장을 목표로 하여 상품으로 생산하고자 하였다. 게다가 장시를 통한 거래에서 이득이 있음을 알게 된 일부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나타났다.173)전석담·허종호·홍희유, 위의 책, 136쪽. 이와 같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종래의 봉건적 경제질서를 해체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즉,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일부 농민들은 재화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농민들은 상업적 농업을 하기에는 제약이 너무 컸고, 비록 이윤을 추구했다고 하여도 이를 가로채는 봉건지배층의 탐학으로 인하여 파산의 길을 면할 수 없었다. 당시 농민에게 지워지는 부담은 전술한 바와 같이 가혹한 것이었다. 부세 외에도 관혼상제 등의 비용으로 고리대금업자에게 가산을 전당잡히고 돈을 빌려써야 했기 때문에 朴趾源은 해마다 땅을 팔아버리는 농민이 10에 7∼8이나 된다고 하였다.174)朴趾源,≪燕巖集≫ 권 16, 課農小抄 限民名田議. 농촌사회는 점차 부농과 빈농으로 양극화되고 있었다.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농법을 개량하면서 자구책을 강구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유익하게 전개한 것은 일부 농민층에 국한되었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오히려 더욱 몰락해 갔다. 더구나 농촌사회가 상품화폐경제에 편입되면서 농민의 계급분화는 보다 확연히 나타났고, 그러한 속에서 드러나는 봉건적 사회구성의 모순과 그 모순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일부 농민들은 점차 삶의 방향에 대하여 주체적 의지를 갖게 되었다.

 민중세계가 서서히 각성되고 있었지만, 봉건지배층의 현실감각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었다. 사회체제가 동요하는 속에서도 지배층으로서의 양반관료들은 여전히 미봉적 대책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간격은 날로 커갔다. 그 간격은 수취체제의 미봉적 개편에 의해서 한 때 조정되는 듯 하였으나, 모순을 본질적으로 시정하고자 한 것이 아니어서 18세기 이후 다시금 농촌경제를 악화시켰다. 농촌사회의 동요는 수취체제의 파탄에 의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왕조는 거의 만성적으로 재정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공적 경제기반은 기본적으로 토지에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이래로 토지의 사유화가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며, 양반관료들의 농장이 도처에 생겨났다. 이는 상대적으로 봉건국가의 공적 경제기반을 약화시켰다. 더욱이 사회변동에 따라 기강이 동요하면서 국가의 수취체제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중간에서 누탈되어 국가의 재정수입은 날로 감축되어 갔다. 그 상황은 양란을 겪으면서 매우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특히 7년간에 걸쳐 전국을 휩쓴 왜란은 농촌사회를 황폐화시켰고, 각 고을의 토지문서도 상당수가 소실되어 선조 34년(1601) 국가가 파악한 전국의 토지면적은 30만 결 정도였다.175)≪宣祖實錄≫ 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이에 왜란이 끝나고 나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국가가 조세를 부과할 토지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나, 쉽게 국가재정은 호전되지 않았다. 인조 2년(1624) 호조의 보고에 의하면, 녹봉으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 할 양곡이 쌀 10,500여 석, 콩 4,600석인데, 당시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것은 쌀 880석, 콩 230석뿐이었다고 한다.176)≪仁祖實錄≫ 권 4, 인조 2년 정월 기미. 국가의 재정형편이 이와 같이 파산 직전에 있었건만, 5군영의 설치 등 군비 증강에 따른 국방비의 증대와 국가 기구의 증설로 인한 행정비의 증대로 당시 국가의 경비는 오히려 팽창하는 추세에 있었다. 17세기 초 국가의 재정은 실로 왕조의 체제와 질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달리 재정수입의 방도를 강구하지 못하고 있던 봉건국가는 당면한 재정 위기를 賦稅의 징수로만 타개하고자 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양전을 시도하고 농민에게서 가외의 잡다한 명목으로 부세를 징수하였다.177)崔完基,<大同法 實施의 影響>(≪國史館論叢≫ 12, 1990), 217쪽.

 그러나 당시 농촌의 현실은 매우 피폐한 상태에 있었다. 양반관료들의 토지겸병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농토를 잃게 된 농민들이 다수 생겨났고,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가중되면서 농민들의 마음은 농토에서 떠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급급하여 농민으로부터 부세의 징수에 철저하였다. 田稅의 경우 법제적으로는 1결당 4두씩이었으나, 17세기 이래 농민들에게 부과된 세목은 삼수미, 역가미, 결미, 가등미, 작지미 등 잡다한 부가세가 있었고, 그 액수도 1결당 25두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외견상 가볍게 보이는 부담이었다. 17세기에 있어 가장 큰 부담이었던 군포 징수의 문제는 결국 그 폐단으로 均役法이 시행되었지만, 당시 군포 때문에 파산하는 농민들 가운데는 비단 가난한 농민들뿐만이 아니었다. 한 집이 파산되어 유망하면 인징·족징이 가해지기 때문에 끝내는 온 마을이 연쇄반응을 일으켰다.178)鄭演植,<17·18세기 良役均役化政策의 推移>(≪韓國史論≫ 13, 서울大, 1985), 137쪽. 한편 당시 농민의 대부분은 소작농이었는데, 그들이 지주에게 부담하는 소작료 역시 매우 과다하여 농민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병작농민은 명색이 半作이라 하였지만, 때와 곳에 따라서는 1년에 농사지은 수확 중에서 70% 이상을 고정적으로 수탈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179)전석담·허종호·홍희유, 앞의 책, 139쪽. 때로는 지주가 부담해야 할 전세까지 부담해야 했고, 그리고 정부의 각종 요역은 농민을 극도의 빈궁 상태로 몰아넣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는 재난이 유난히 심했는데, 정부와 지주들은 아무리 흉년이 심하고 질병이 만연되어도 부세 징수에 가혹하였다.

 그런데, 농민에 대한 수탈의 가혹성은 세액이 과다한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과의 대상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농민을 토지에 긴박시켜 이동을 억제하였으니, 號牌法·五家作統法 등은 그러한 정책의 구체적 표현이었다.180)≪仁祖實錄≫ 권 9, 인조 3년 7월 경신.
≪孝宗實錄≫ 권 2, 효종 즉위년 11월 병인.
그리하여 농민들은 대를 이어가며 한 곳에 살면서 지급자족적인 봉건경제권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회체제가 어떠하든 간에 한 사회의 통치자들이 그 구성원들에게 한계 이상으로 생존문제에 제약을 가한다면, 그 구성원은 마침내 그 사회체제에서 이탈하게 된다. 생존능력 이상의 제약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순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선사회에서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지배체제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던 조선사회의 농민들이었지만, 그들이 부담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부담이 가중되고 수탈이 강화되자, 마침내 농민들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체제에서 이탈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부세의 과중한 부담과 봉건지배층의 무도한 억압을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은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유리하였다. 농민층의 유망은 이전 시기에도 널리 나타나고 있었지만, 17세기에는 그 양상이 심각하였다. 인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趙翼의 보고에 의하면, 가난한 농민들은 거의 모두 파산하여 생업을 잃고 타향을 전전하다가 마침내는 토호의 소작인이 되어 겨우 호구를 면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181)趙 翼,≪浦渚集≫ 권 2, 因求言論時事疏. 문제는 유망민 당사자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봉건지배층은 유망민의 부세 부담을 남아있는 이웃, 친족에게 전가시키니 그들도 견디지 못하고 유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농촌사회의 현실은 농민층 자체에게 뿐만 아니라 정부로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정부의 재정수입에 있어서 근간이었던 부세수취는 농민층의 토지에의 긴박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16, 17세기를 통한 농민층의 광범위한 토지 이탈현상은 최소한도나마 그것의 유지를 곤란하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건지배층은 자신들을 위해서도 농촌사회의 파산을 예방하기 위한 미봉책이라도 강구해야 했으니, 이에 실시된 것이 大同法과 均役法이었다. 특히 대동법은 위기에 봉착한 국가재정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아울러 봉건적 질서를 보다 강화하고자 한 경제적 측면에서의 지배구조의 재편성이라 하겠다.182)崔完基, 앞의 글, 207쪽. 따라서 잠시 안정을 보이는 듯하던 농촌사회였지만,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18세기에 이르러서도 농촌사회의 동요는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농민들의 의식이 각성되면서 그 양상은 소극적인 모습에서 적극적인 모습으로 전화되어 갔다. 농민들의 일부는 봉건국가와 봉건지배층이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여 갔던 것이다. 그들은 조선왕조가 내세웠던 農本政策이 봉건지배층의 정치적 구호였다는 것과, 따라서 그것은 기대할 수 없는 허구임을 점차 깨닫기에 이르렀다. 농민층의 분화가 심화되는 속에서 각 계층간의 갈등이 격렬해지고, 마침내 폭발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갈등은 우선 무전농민·영세작인 들에 의해 야기되었다. 토지의 상품화에서건 가혹한 수취체제에서건 토지를 상실하고 몰락해 갔던 빈농들은 그들이 대대로 경작해 오던 토지로부터 배제되면서 당시의 사회적 모순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심과 아울러 현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사회구조가 갖는 모순에 대해 인식하기보다는 외형적으로 토호지주의 횡포와 봉건지배층의 수탈에 의해 몰락하였기 때문에 우선 토호지주나 봉건지배층에 대해 적대의식을 표명하였다.183)정창렬,<조선후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식>(≪韓國人의 生活意識과 民衆藝術≫,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84), 53쪽.

 물론 이 시기 몰락농민의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다수가 그들이 처한 상황의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강인한 봉건질서 앞에서 별다른 묘안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탐관오리의 횡포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일부는 개성이 강하여 매우 비판적이기도 했으니, 민중의 동요는 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봉건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는 속에서 지배층의 탐학과 횡포가 날로 농촌경제를 파탄시켰는데, 여기에 더하여 질병, 기근과 같은 자연적 재해가 겹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해졌다. 따라서 자연적 재해도 민중이 동요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었다. 물론 홍수나 가뭄, 전염병의 유행 등이 민중운동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 재해들은 지배층에 대한 불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재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배층의 무능이 여지없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재해가 유난히도 심했다.184)趙 珖,<19世紀 民亂의 社會的 背景>(≪19世紀 韓國 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2), 185∼203쪽. 영조 9년(1733)에 충청도와 경상도 지방을 엄습한 기근으로 연인원 40만 명의 飢民과 13,000여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영조 39년 호남지방의 기근에서는 50만 명에 가까운 기민이 생겨났다. 그리고 기근과 함께 발생한 전염병은 기근으로 인한 피해를 심화시켰다. 콜레라·장티푸스·천연두 등으로 알려진 전염병이 유행하면 숱한 사망자가 생겨났다. 18세기 전반은 전염병이 특히 맹위를 떨쳤는데, 영조 20년에는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6∼7만 명이라 하였고, 영조 25년에는 50∼60만명이 전염병으로 병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민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85)≪英祖實錄≫ 권 58, 영조 19년 11월 계해. 실로 조선 후기 민중세계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날로 커 갔다. 사회의 분위기는 주변에서 그들을 자극하는 움직임이 있게 되면 쉽게 폭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중세계의 각성은 18세기에 이르면 도처에 개설되어 전국적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던 場市나 浦口 자체에 의해서도 조장되었다. 이들 장소는 물화의 교역 장소였을 뿐 아니라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고, 그 곳에 있던 객주나 주점에 머무는 상인, 여행자들을 통해 곳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정보교환 또는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186)金大吉,<朝鮮後期 場市의 社會的 機能>(≪國史館論叢≫ 37, 1992), 185쪽. 장시에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대화와 주연을 하는 가운데 사회의식을 키웠고, 판소리·타령·잡가 등을 통해 양반들의 비행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장시나 포구는 괘서나 벽서의 형태로 사회의 불평, 불만을 품고 있거나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8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괘서나 벽서는 일종의 대자보로서 민심을 선동하고 불만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187)李相培,<英祖朝 尹志掛書事件과 政局의 動向>(≪韓國史硏究≫ 76, 1992), 72쪽. 이처럼 장시나 포구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민중을 일깨우는 장소로, 나아가 민중운동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정부로서도 이 점에 유의하여 장시나 포구에 관리를 보내 민심의 동태를 관찰하거나 파악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한글소설이나 판소리가 널리 보급되면서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널리 읽혀진 許筠의≪洪吉童傳≫은 서얼 차대의 철폐와 탐관오리의 응징을 주장하는 등 시대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대하여 강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확작품 중에서 최대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는≪춘향전≫은 원래 판소리의 형태로 전해졌는데, 여기에서는 상민이나 천민도 양반과 동등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춘향이 수령에 대해 항거함을 통해서 평등의 문제를 실감할 수 있었고, 춘향이 자기가 추구한 사랑을 실현하는 결말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민중은 점차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미숙하나마 가늠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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