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2) 유대관계의 강화

2) 유대관계의 강화

 민중이 그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에 불만을 갖고, 나아가 봉건지배층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봉건적 사회구조가 갖는 모순을 각성했다고 하여도, 그들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구체화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다. 봉건적 질서가 완강히 그들을 억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억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주체적 역량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 있어 보여진 민중세계의 각성은 다음 시기에 있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중운동의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민중세계의 각성은 이 시기에는 행동으로 구체화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민중의 저항의식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었으며, 변혁의 주체로서 나서기 위한 틀을 예비시키고 있었다. 고통에 허덕이던 민중은 개별적이고 간헐적인 抗租나 掛書 또는 群盜나 變亂에의 참여를 통해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탈출해 보고자 하였다.

 한편, 그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을 전개하고자 했다. 개별적이고 간헐적인 힘을 강인하게 집합하고자 시도하였다. 공동체적 조직인 두레나 契가 그러한 시도의 결과로, 이들 조직은 민중의 지위와 역량을 강화시킴에 있어 중요한 토대로 역할하였다. 민중은 자율적으로 마련한 이들 조직을 통해 봉건지배층의 통제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니, 이들 조직은 새로운 질서를 의도한 민중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이기도 했다.

 특히 17세기 후반 이래 이앙법의 보급을 계기로 대두한 두레는 농민들의 향상된 경제력을 발판으로 조직의 구성에서 지주층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배제하였으니, 강인한 조직력과 자율성을 토대로 그들의 지위와 역량을 강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188)신용하,<두레 공동체와 농악의 사회사>(≪문제와 시각≫ 13, 문학과 지성사, 1985), 225쪽. 따라서 그 발달은 민중의 삶에 장애가 되고 있던 봉건적 질서를 깨는데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두레가 생겨나기에 앞서 농촌사회에는 香徒라는 지역공동체가 있었다. 고려말 休閑法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촌락 단위로 그 규모가 작아진 향도는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는 벼농사에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황두라고도 불리는 향도는 김매기에 능한 장정 20∼30명으로 구성되었다고 추정되는데, 능률적이고 규율적이었다.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는 수리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조건에서 벼농사는 直播法이 일반적이었다. 향도는 곧 직파법에서 김매기에 동원된 공동 노동조직이었다. 그러한 향도가 이앙법이 보급되어 보다 강도높은 노동력이 요구되면서 공고한 결속력을 갖는 두레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189)李泰鎭,<17·8세기 香徒조직의 分化와 두레 발생>(≪震檀學報≫ 67, 1989), 21쪽. 즉, 자체의 조직적 개성이 강한 인위적 두레가 나타나면서 종래의 자연촌락에 토대한 향도와 같은 공동체적 질서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두레는 이모작이 보급되면서 그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두레는 농사작업을 공동노동에 의해 수행하면서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강화시켰는데, 農樂과 農旗는 규율적 행동과 유대관계를 조장하였다. 두레의 조직은 한 마을의 16세 이상에서 55세 이하의 성인남자를 구성원으로 하여 평균 20∼30명으로 이루어졌다. 큰 두레는 약 50명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두레의 구성원은 흔히 두레꾼, 두레패라고 불렸다. 두레는 반드시 자연촌락인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다. 행정단위로서의 洞과 里는 두레 조직의 단위가 아니었다. 두레 가입에는 전체적, 의무적 성격이 있어 공동체적 구속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양반이나 지주 등 비생산 노동계급은 두레에서 배제되었으며, 대신 머슴을 두레에 참가시켰다. 즉, 두레는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건실한 농민으로 구성된 민중의 작업 공동체였다. 두레는 반드시 농기와 농악이 있었는데, 농기는 두레의 상징으로 농민의 자부심과 단결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그리고 농악은 공동노동에서의 노동능률을 높이고 노동을 즐겁게 하며, 두레를 작업공동체로 단결시키는데 기능하였다.

 두레가 이와 같이 공고한 결속력과 농민의식의 함양에 기능하였다고 할 때, 농민의 지위와 역량은 이를 통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한 기능은 농촌사회가 동요하고 농민층이 분화하는 갈등구조 속에서 보다 강렬하게 발휘하여, 농민들이 그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의식하고 개척해 나감에 있어 역동적으로 활기를 부여해 주었다.

 정부에서도 이 점에 유의하여 두레의 동태를 주목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영조 13년(1737) 湖南別遣御使로 임명된 元景夏는 두레의 농기와 농악기가 민중의 소요시에 이용될 수 있다고 하여 압수한 바 있다.190)≪承政院日記≫ 881책, 영조 14년 11월 17일. 이 때는 戊申亂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던 때이어서 각지의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조직력, 자율성, 규율성이 강한 조직체가 형성되어 갔다고 하는 것은 이 시기 민중의 지위를 충분히 가늠하게 해준다.

 논농사에서 두레를 이용하여 공동노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 밭농사에서는 품앗이라는 공동노동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191)李泰鎭, 앞의 글(1989), 14쪽. 품앗이는 소겨리, 들계 등의 이름으로 15세기 이래 존속되고 있었는데, 소겨리는 밭갈이를 함에 있어 소를 가진 집을 중심으로 5호 정도가 하나의 노동조직을 이루었다. 그리고 들계는 김매기에 있어서 함께 노동하는 조직으로, 자연촌락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큰 마을에는 4∼5개의 들계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품앗이 조직도 두레와 마찬가지로 공동노동조직으로서, 노동의 능률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으나, 조직력이나 자율성에 있어서는 두레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들 조직 역시 농민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사회의식을 키우는데 나름대로 이바지하고 있었다.

 두레나 품앗이에 의해 노동력이 집약되어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그러한 농민층의 이익을 분점하고자 국가가 수취체제를 里·洞 단위의 共同納 제도로 전환하여 간 것이 18세기였다. 이에 농민들은 그 부담을 완화하고자 각종의 계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적 조직체인 계는 농민간의 상부상조를 위해서도 요청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사회의식의 결집으로서도 활용되었다.192)金仁杰,<朝鮮後期 鄕村社會 統制策의 위기>(≪震檀學報≫ 58, 1984), 142쪽. 17세기 이래 농민층의 분화로 인해 유민이 다수 발생하였다. 그들은 도성 주변으로 모여들었는데, 자신들이 대를 이어 살던 농촌에서 쫓겨나야 했던 운명이어서 지배구조에 매우 저항적이었다. 그리하여 劒契, 殺主契, 香徒契 등의 조직을 만들어 잦은 정변 속에서 특정한 정파의 무력 행사에 이용되기도 하였다.193)鄭奭鍾,≪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一潮閣, 1983), 23∼29쪽. 이와 같이 18세기에는 두레뿐 아니라 계와 같은 조직도 성행하여 민중의 결속을 다졌다.

 두레나 품앗이 또는 계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결집하여 주체적으로 행동해 나갔다면, 그것들은 곧 농민들이 대다수인 민중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 민중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鑑訣思想이었다. 鄭鑑錄으로 대변되는 감결사상은 18세기 이래 특히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배체제의 모순이 여러모로 나타나고, 그에 대한 반발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건지배층은 모순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강구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고자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상적 기능을 상실하고, 그것은 민중세계와는 거리가 먼 관념세계였다.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속에서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없는 감결사상이 유행하였다. 감결사상의 현실 부정적 성격은 당시 민중세계에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감결사상은 현세에 대한 강한 거부의식과 더불어 理想鄕에 대한 추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194)趙 珖,<朝鮮後期 思想界의 轉換期的 特性>(≪韓國史 轉換期의 問題들≫, 지식산업사, 1993), 167쪽. 그리고 감결사상에서는 현세의 질곡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주고, 이상향의 도래를 가능하게 할 존재의 출현이 임박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조 24년(1748)의 李之署 事件, 영조 36년의 愼後一 사건, 영조 39년의 宋永興 사건, 영조 40년의 李達孫 사건, 영조 44년의 黃應直 사건 등은 모두 감결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하였으며, 더욱이 정조 6년(1782)의 文仁邦·李京來 사건에서는 정감록이 본격적으로 이용되었다.195)高成勳,≪朝鮮後期 變亂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149∼155쪽.

 감결사상과 더불어 미륵신앙, 도교사상 등도 민중세계를 동요시켰다. 17세기 후반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미륵신앙운동은 영조 13년 황해도·강원도·경기도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정계에 문제화된 바 있었는데, 기존의 질서나 이념체계에 매우 부정적이었다.196)鄭奭鍾,<朝鮮後期 肅宗年間의 彌勒信仰과 社會運動>(≪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1), 430쪽. 그리고 일찍부터 민간신앙으로 전승되어 온 도교사상도 반체제적 사상이었는데, 정조 9년(1785) 洪福榮·李瑮 등은 정감록과 함께 도교를 배경으로 조선왕조의 전복을 시도하였다.197)≪正祖實錄≫ 권 19, 정조 9년 3월 기유. 이러한 민간신앙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는 않았지만, 고통과 불안에 허덕이는 민중세계를 현혹하면서 사회 저변으로 널리 확산되어 갔다. 즉, 이는 당시 민중의 정신적 피난처 구실을 하였으니, 민중은 감결사상 등을 통하여 저항력을 응집시켜 나갔던 것이다. 민중을 지배하고 있던 이같은 민간사상은 민중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삶의 새로운 방향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민중세계의 동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상치 않았다. 봉건적 사회구조가 모순을 드러내는 속에서 상품화폐경제가 진전되어 사회변동이 기층사회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에는 농민층의 분화가 본격화하면서 몰락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은 현실세계의 모순을 직시하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두레나 감결사상 등을 통해 응집력을 강화시켜 가면서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강화하여 새로운 사회를 주동할 힘을 구축해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가지는 주체적 의식은 아직 낮은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잉태되고 있는 봉건질서에 대한 저항의식은 어느 시기에 이르면 결집되어 분출되게끔 갈등의 앙금은 나날이 보다 더 축적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향촌사회를 신분제적 지배를 통해 장악해 왔던 봉건지배층, 즉 在地士族의 지배력도 동요를 일으켰으니, 그것은 민중세계를 종래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봉건지배층은 향촌사회를 통제하고자 서원, 향약, 洞契의 기능을 강화해 보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그것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같은 사회적 움직임 속에서 한편에서 鄕權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선 잔반, 중인, 서얼, 노비, 농민 등 각계층의 동향 역시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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