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3) 향권의 추이

3) 향권의 추이

 조선시대 농민의 본거지인 향촌은 수십 호의 자연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각 촌락에는 班村·良村의 구분이 있기도 했지만, 대개 두서너 씨족이 서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양반·평민·노비 등이 섞여 살았다. 이러한 향촌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이른바 兩班社會라는 호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양반, 즉 士族이었다. 그들은 향촌사회에서 경제적으로는 지주로, 사회적으로는 양반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16세기 후반 사림들이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그 지위가 크게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사족일지라도 그들은 서원이나 향약·향회 또는 동계를 토대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사족들은 불안정한 농촌경제를 향약이나 동계를 통해 안정시키고자 하면서 농민들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족들은 鄕案의 작성, 鄕會의 운영을 통해 스스로의 자치권을 신장시켜 갔고 때로는 수령과 대등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기반을 굳혀갔다.198)金仁杰,<朝鮮後期 鄕權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韓國文化≫2, 서울大 1981), 173쪽. 물론 지금까지 농민에 대하여 나름대로 행세하고 있던 吏族이나 국가권력의 대행자인 守令의 견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족들의 향촌사회지배는 서원과 향약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17세기 후반까지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그러한 사족지배체제는 약화되어 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 시기의 사회변동에 토대하였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상품화폐경제의 보급으로 농촌사회가 동요하고, 그리하여 농민층의 계급분화가 촉진되는 속에서 토지와 노비를 토대로 구축되었던 사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동요된 것이다. 그리고 화폐경제의 발달로 부세의 金納化가 진전됨에 따라 국가는 사족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도 부세를 수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족과의 협조관계에 더 이상 긴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족들의 향촌사회에서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이에 사족들은 종래의 신분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하여 鄕案을 중수하고 향약의 실시를 다시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족의 신분적 지배를 상징하는 향안은 新鄕의 도전에 의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는 파기되었으며, 향약 실시도 수령이 주도하는 형태로 바뀌어 갔다.199)金仁杰,<조선후기 鄕案의 성격변화와 在地士族>(≪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3), 548쪽. 이러한 현상들은 이제 재지사족이 향촌사회에서 행사하고 있던 지배력이 유명무실해져 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후 향촌사회는 官의 일방적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사족지배체제의 약화는 신분제의 동요과정에서 양적으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재지사족의 지위는 본래 경제적 위치보다도 신분적 특권에 의해 보장되고 있었다. 신분제는 봉건지배층과 국가의 상호 이해관계 속에서 성립되었다. 조선사회는 지주제를 경제적 토대로 하면서 신분제를 사회구성의 기본 원리로 한 봉건사회였다. 조선사회는 지주적 토지소유를 부정해 본 적이 없고, 마찬가지로 신분직역제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해에 일정한 제동을 가한 적은 있었지만, 지배층은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를 준수하기 위해 호적법을 강화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면서 기존의 틀을 관철시켜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래 지금까지의 봉건적 사회구성이 크게 동요하는 가운데 계급구조가 질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분별 구성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게 달라져 갔다.

 조선 후기 신분관계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호적대장의 분석에 의하면 각 지역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양반호구는 크게 늘어나고 노비호구는 격감하고 있다. 경상도 울산지역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영조 5년(1729)에 양반호 26.3%, 상민호 59.8%, 노비호 13.9%이던 구성비율이 영조 41년에는 양반호 41.9%, 상민호 57.0%, 노비호 2.0%로 달라지고 있고,200)鄭奭鍾, 앞의 책, 248쪽. 경상도 단성지역의 경우는 숙종 43년(1717)에 양반호 19.9%, 상민호 52.5%, 노비호 27.6%의 구성비율이 정조 10년(1786)에는 양반호 32.2%, 상민호 59.0%, 노비호 8.8%로 달라지고 있었다.201)金錫禧·朴容淑,<18世紀 農村의 社會構造>(≪釜大史學≫3, 1979), 35쪽. 이같은 경향은 19세기에 이르면 더욱 심해지고 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10%를 넘지 않던 양반의 신분구성비가 이와 같이 격증하고 노비호구가 격감해 갔음은 전통적인 신분구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 당시의 사정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러한 신분제의 동요는 신분상승운동에 의한 결과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사회경제적 변동 과정에서 일정하게 재화를 축적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됨에 따라 그를 바탕으로 하여 상민, 노비들이 이 시기에 대대적으로 신분상승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국가도 재정적 위기 속에서 신분제를 부정함이 없이 변화된 조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신분상승을 허용하는 자기 모순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納粟策이 그 징표였다.202)金泳謨,<朝鮮後期 身分構造와 그 變動>(≪東方學志≫26, 1981). 그리하여 농민들은 합법적·비합법적인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신분의 상승을 꾀하였다. 신분의 상승은 지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役의 부담을 모면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 후기에 있어서의 신분제 동요는 2중적 계기와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한편으로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농민층의 내재적 성장으로 제기되는 봉건질서의 붕괴과정을 표현해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에 처한 봉건지배층이 그에 대한 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된 사회정책의 한 소산이었다.203)金容燮,<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所有>(≪史學硏究≫15, 1963), 48쪽. 신분제 자체가 무력화되고 신분질서가 허구화되면서 그 토대 위에서 군림하던 사족의 권위는 빛을 잃었고, 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질서는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이래 향촌사회의 권력구조는 수령과 이향을 중심으로 하여 관의 주도하에 재편되어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서 재지사족들이 지금까지 장악해 왔던 향촌사회에서의 지배권을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204)金仁杰, 앞의 글(1981). 지금까지 향촌사회에서 재지사족들이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鄕會를 통해서였다. 향회는 글자 그대로 한 고을의 모임이나, 그것은 신분적으로 양반에 속하는 봉건지배층의 집합이었다. 그것은 16세기 이래 사족들이 기존의 鄕規에 성리학적 규범을 가미하여 발전시킨 향약의 보급과 더불어 활성화되었다. 즉 성리학을 이념적 무기로 하던 사족들이 一鄕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데 본질적 의도가 있던 것이 향회의 발족이었다.205)金仁杰, 앞의 글(1983). 따라서 향회가 추구하는 바는 향약의 덕속과 거의 다를 바 없었으니,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형식이나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겠으나 궁극적 목표는 유교적 이념의 실천에 있었다.

 향촌의 교화와 향풍의 糾正을 명목으로 한 향회를 통해서 사족들은 서로간의 결속을 꾀하면서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이서들의 횡포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향회에서는 각종의 규제조항, 예컨대 立議·約束·鄕規 등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그 실시는 물론 관과의 적절한 타협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향회에서는 鄕內의 여러 일들을 지휘 감독하였으며, 향안에 등록할 자를 결정하고, 수령의 자문기구인 鄕廳에서 일할 座首·別監 등 향임을 추천하였다. 그리고 봉건적 질서에 어긋나는 제반 행위를 적발, 留鄕所나 관으로 하여금 처벌하도록 하는 한편, 선행자를 포상하기도 했다. 이렇듯이 재지사족은 관과의 유착 속에서 향회를 통해 향촌사회의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향촌의 이서와 농민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현물납으로 부세가 징수되던 체제 아래에서 국가의 지방에 대한 지배가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질서와 그 안에서의 지배계급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재지사족의 물적 토대가 그만큼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향회의 구심체는 향안이었다. 향안은 원래 재지 品官의 명단이었으나, 17세기 향안이 재작성되는 속에서 內外鄕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 入錄될 수 있는 폐쇄적인 재지사족의 명단으로서 개념화되고 있다. 즉 재지사족의 公論에 따라 작성된, 말하자면 재지사족의 신분적 권위를 드러내주는 상징이었다. 재지사족은 이 향안을 기반으로 향촌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장치로서 향회를 구성 운영하였던 것이다.

 향안의 위치가 중요하였기 때문에 향안을 작성하는 일은 매우 신중함이 요청되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와 관계가 깊다고 할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향안은 신분적 폐쇄성을 주요 특징으로 하였다. 향안에 입록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사족이어야 하며, 그도 친족·외족·처족에 모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 했다. 그리고 향안은 한 고을 재지사족의 공론에 의해 작성되었으니, 즉 향안의 작성은 그 지방 지배세력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향촌의 여론이 분열될 때 향안은 폐기될 소지도 있었다. 이같은 향안의 기능은 한마디로 재지사족을 결속시키고 향촌사회에서 지금까지 누려왔던 사족중심체제를 계속 유지시킴에 있었다.

 그러나 향회·향안을 통해서 재지사족들이 지배구조를 계속 관철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은 18세기에 이르러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농민층의 계급분화가 이루어지는 속에서 농민층에 대한 지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사족들의 물적 토대가 취약해지는 한편으로 신분질서가 크게 동요되어 사족지배체제는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향회·향안의 성격이 변모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움직임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 사족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확실한 권위의 근거가 없이 양반 신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그들은 향안을 근거처로 삼았으니, 예컨대 서얼·부농층 등이 수령과 결탁하여 新鄕으로 등장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누구든지 일정한 돈만 있으면 향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한 자들은 기존의 사족과는 물론 신분적 계통이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향안을 통해 구래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긍심이 강한 기존의 재지사족은 향안을 크게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향안에의 입록을 기피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로 院案을 만들어 서원을 그들의 근거처로 삼기도 했다. 향안의 권위를 계속 지키려는 舊鄕들은 영조 말기 庶孽通淸 때도 서얼의 향안 등록을 허락하지 않았는데,206)≪英祖實錄≫권 119, 영조 48년 12월 무자. 이에 신향은 향안의 폐쇄성에 도전하여 신·구향 사이에 鄕戰이 발생하기도 했다. 둘째 정부의 對地主政策도 향안의 기능변화에 일정하게 작용하였다. 즉, 사족들의 물적 토대가 취약해지고 새롭게 경제력을 지닌 부민층이 성장해 나옴에 따라 중앙정부 및 그 대행자로서의 수령은 새로운 동반자로서 부민층을 향촌사회 권력구조 안에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부세정책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207)金仁杰,<朝鮮後期 社會經濟의 發展과 農民抗爭>(≪韓國史의 硏究≫, 서울大, 1989), 205∼206쪽. 조선 후기 부세정책의 특징은 모든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고, 또 摠額制라 하여 공동납의 형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大同法과 均役法이 전자의 경향이라면, 比摠制와 里定制는 후자의 모습이었다. 향회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후자의 특징으로, 정부는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받기 위하여 부세를 총액제로 수취하고자 하였다. 정부의 총액제 실시는 기존의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였겠지만, 그러나 그같은 부세정책은 향촌사회 여러 세력간의 갈등을 필연적으로 심화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단계까지는 부세수입을 확실히 보장해 주었다고 하여도,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어 더 이상 농민층의 유망을 막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한계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납세자의 절대부족으로 총액이 결코 보장되지 않았다. 따라서 부세수취의 책임을 맡고 있던 수령은 어떠한 형태로든 부농층을 납세대상으로 끌어들여야 했고, 또한 그는 형식적으로라도 납세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 때 수령의 입장에서는 향회를 적절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그리하여 향회의 구성원은 다양해졌다. 부세문제가 향회에서 논의되면서 각 계층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향회는 수령에 의해 조종되어 수령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 주는 선으로 그 역할이 저하되어 갔다. 재지사족의 권위를 상징하던 향회의 본래 의미는 크게 탈색되고 있었다. 기존의 향안은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사족 내부의 분열과 향안 기능의 변질로 말미암아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다. 또 19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기능은 거의 소멸된 것이었다. 향회·향안의 성격 변화로 인하여 재지사족은 향회·향안을 더 이상 그들의 무기로 삼지 않았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향권은 鄕任·面任·吏胥들, 그리고 이들을 비호하면서 향회를 조종하던 수령에 의해 천단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新鄕이 향권을 장악하여 갔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신향이 舊鄕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부정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시기의 향권변동은 유동적이었다. 분명한 것은 재지사족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향소의 직임을 둘러싸고 유향이 분기되며, 그 과정에서 향족이 새로이 성립되어 갔고, 수령권이 강화되어 새로운 面里編制가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역으로 재지사족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208)金俊亨,<18世紀 里定法의 展開>(≪震檀學報≫58, 1984), 95쪽.
金仁杰, 앞의 글(1981), 180쪽.
이 때에 면임·이임 등이 향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그들 역시 새로이 성장한 세력으로서 사회변혁운동에서 디딤돌이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재지사족의 지위가 약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서얼·부농·이서 등 새로이 성장한 사회세력들이 향권을 장악하고자 시도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형세를 직시하고 있던 국가는 국가대로 향촌사회에 직접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것이 부세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각 계층간의 갈등이 표출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향회에 참여하고 있던 새로운 계층의 입장이 점차 강화되어 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