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3) 항쟁의 결과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한편 반봉기군으로서의 이른바 ‘의병’은 그들의 ‘의병’활동을 계기로 홍경래 난 이후 평안도 지역의 향권을 잡아갔다.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행할 때 영의정 김재찬이 의병장 가운데 의주의 金見臣, 정주의 玄仁福, 강계의 宋之濂 등 세 사람의 공이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듯이,563)≪陣中日記≫권 2, 임신 5월 12일, 711쪽.
‘의병’의 활동에 대하여는 주로≪陣中日記≫를 참고로 하였다. 이하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개별적 전거제시는 생략하였다.
‘의병’세력의 성격은 이 세 사람의 행적을 통해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주와 의주가 평안도지역 향권의 향배를 엿보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사실들을 보여준다. 따라서 ‘의병’활동의 성격을 정주의 현인복과 의주의 김견신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정주 향인 현인복이 의병세력을 일으키게 되는 과정에 대해≪陣中日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平安都事 白慶楷는 이 때 本家(정주 소재)에 있으면서 적변을 듣고 달려가 성을 지키고자 위아래를 둘러보았으나 어찌할 수 없자 밤을 틈타 형 慶翰과 함께 현인복의 집으로 갔다. 이 때 인복은 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분분하던 터에 마침 경한 형제가 오자 크게 기뻐하며 맞이하여 각각 힘을 다할 방책을 논의하였다(≪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19일, 142∼143쪽).

 이 때가 봉기가 일어난 다음날인 12월 19일이었다. 현인복이 평소에 평안도사와 밀접히 관계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반봉기군의 입장에 서게 된 계기였다. 백경해는 鄭敬行이 곽산군수로 임명될 때 함께 운산군수로 임명되고 있을 정도로 정부측 입장에 서고 있었던 인물이었다.564)≪日省錄≫순조 11년 12월 23일. 한편 정경행은 곽산군수로 임명되고 있으나 이 때 이미 봉기군에 가담하고 있었다.565)鄭奭鍾, 앞의 글, 319쪽. 여기서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중앙정부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봉기군과 ‘의병’을 구성하는 세력들이 사실상 향촌사회에서의 위치가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를 구별짓는 주요한 요소의 하나는 관권과의 결탁여부라 할 수 있겠다.

 22일에 백경한과 현인복은 연일 몰래 모의하였으나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성을 회복할 계책을 마련하지 못하자 그 책임을 나누어 경한은 남아서 의병을 모으고 인복은 그 再從伯 仁黙 및 정주에 사는 前任將校 高漢燮과 함께 안주영에 위급함을 고하러 가기로 하였다. 한편 23일 안주성에 도착하여 들어가려 하였으나 봉기군으로 의심받아 여의치 않다가, 평일에 서간을 왕복하는 등 친분이 있었던 營裨 趙鳳錫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병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의병의 뜻을 말하고 정주성 공격책을 건의하였으나 여전히 의심받아 오히려 포박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아가 24일에는 병영의 壯士, 軍官들이 죽일 것을 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도 조봉석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다만 고한섭은 인질로 병영에 남고 인복은 먼저 돌아가 계책대로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의병’세력은 봉기군으로 의심받아 죽음의 위기에 처할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 봉기군과의 객관적 차이가 없었다. 다만 최초의 단계부터 다분히 관권과의 결탁을 매개로 ‘의병’화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점은 이후 지방관과 협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현인복은 26일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날 보낸 격문 가운데는 “우리 주(정주)는 청북의 도회지이고 관서의 요충으로서 집집마다 학문에 힘을 써서 평소에 衣冠의 鄕이라 불리며 村마다 縉紳이 있고 또한 簪纓之族이 많으니 이는 國恩이다”566)≪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26일, 175쪽. 라고 하여 다분히 친정부적이며 동시에 반신향적 태도를 보인다.

 그 후의 경과를 보면, 이듬해 정월 3일에 정주의 士人 趙永煥이 의병을 모아 大陣에 찾아옴을 시작으로 4일에는 前定州察訪 金致龍, 前正郞 李昌心·金景煥, 前掌令 承膺祚, 前判官 洪履祚, 前察訪 崔鳳和, 前注書 卓瑊, 章甫 金東垕·金益煥·趙夢鵬·鄭仁範 등이 대진에 찾아왔고, 이 때부터 관군에 가담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현인복도 이 때부터 의병장이라 불렸다.

 이러한 사정을 “현인복이 의병장으로 임명된 후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나는 자가 많았다. 혹은 소를 바치고 혹은 쌀을 날라 사졸들을 먹였으며”567)≪陣中日記≫권 1, 임신 정월 6일, 236쪽.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7일에는 병영에서 현인복에게 의병장 차첩과 수기를 보내 왔다. 그 후에도 ‘召募義兵’ 또는 ‘納牛助餉’ 등의 형태로 많은 사람들이 연이어 반봉기군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는 봉기군이 정주성에 고립되면서 더욱 현저하게 드러났다. 2월 28일 道帥臣의 馳啓에서 청남북의 여러 군현에서 이 때를 즈음하여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가담하거나 軍食을 가져오는 자들이 많아졌다는 기록은 그것을 뜻한다.

 현인복은 정월 11일에 정주목의 召募都監이 되었고, 23일에는 좌수에 차정되었다. 그러나 26일에 군무가 바빠 좌수를 겸할 수 없어 供饋監 卓東範을 좌수로 삼았다. 5월 5일에는 折衝이 가자되었고, 이어서 宣沙浦僉使가 되었다.

 그런데 정주 지역의 경우 정월 9일에 定州牧使 兼召募使로 徐春輔가 새로 임명되어 오게 되는데, 이 때를 기해 이 지역 향권이 ‘의병’세력을 중심으로 완전히 교체됨을 볼 수 있다. 우선 신임 수령이 부임하던 날인 9일에 최경옥·노학·백경수·현인택 등이 義士 30인과 함께 가산 삼교에서 기를 걸고 출영함으로써 ‘의병’세력과 수령과의 밀착관계를 형성하더니 12일에는 향임과 군교들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좌수 전찰방 金致龍, 예방별감 玄弘篆, 병방별감 盧鶴, 공방별감 李允慶 관청감 卓東範, 전안감 崔敬玉, 민고감 桂熊卨, 칙고감 白宗濂, 초고감 李敏祐 사창감 玄載殷, 신창감 金大健, 승창감 承啓祚, 향장무겸공석감 金相麗 각면풍헌 전정랑 金景煥, 전좌랑 李昌心, 전주서 卓瑊, 전찰방 韓學周, 전직강 李宗心, 전찰방 盧金彙 중군 전오위장 金陽直, 토포행수 金淇洙 집사 金振初·高漢淸·金漢廣·卓宗八·白東護·安志哲·鮮于伯·金永吉·張元赫

 ≪陣中日記≫에서는 이 때 “의지하고 감당할 수 있는 바는 의병에 있을 뿐이다”568)≪陣中日記≫권 1, 임신 정월 12일, 282쪽.라고 하여 ‘의병’세력을 중심으로 향촌사회 지배질서가 새롭게 짜여졌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 임명된 향임과 군교의 임원들이 거의 대부분 전후 기록에 ‘의병’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월 16일에는 정주 남산의 林將軍堂에 제사를 지내는데 초헌은 좌수인 전찰방 김치룡, 아헌은 의병장 현인복, 종헌은 역시 의병인 고한섭으로 정하였다. 이는 ‘의병’세력이 사실상 향권을 장악하여 행사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한편 그 밖의 지역 ‘의병’들의 구성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강계·철산·벽동의 삼읍 儒鄕(儒武 또는 鄕武)이 창의하였다거나,569)≪陣中日記≫권 1, 임신 2월 27일, 432쪽. 희천군에서는 유향 중에서 1, 000냥을 마련하여 軍裝과 軍糧에 備給하고 자원출전570)≪陣中日記≫권 2, 임신 3월 7일, 516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다. 또한 의병을 모은 사람들은 대개가 鄕人 또는 士人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의 의병 역시 향무층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사실상 봉기군 주도층의 그것과 크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봉기군이 정주성에 고립된 이후에는 더욱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러한 기회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세력들은 봉기군이 우세하던 때에는 관망하거나 봉기군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주의 경우, 초기 의병을 일으킨 현인복 등은 상대적으로 향권에서 소외되었던 인물로 보이며 그러한 불만이 신속하게 반봉기군의 입장에 설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현인복은 당시에 향촌지배기구와 관련된 세력집단을 형성하거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동원한 ‘의병’의 대부분은 대체로 혈연을 매개로 한 점으로 보아도 그렇다.571)현인복의 ‘의병’에는 倡義謀士로 白慶翰·玄仁宅·金益煥·白慶脩·玄仁黙·卓東範이고 ‘의병’으로는 承宅奎·玄時冕·鄭仁範 등 69명이었다. ‘의병’ 가운데는 현씨가 31명으로서 거의 절반을 점하고 있었다(≪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26일, 177쪽). 즉 현인복 형제의 혈연집단이 주축을 이루었다. 현인복과 함께 모의했던 백경한은 州中의 縉紳章甫로서 사림의 領袖였기 때문에 적들이 더욱 싫어했다거나 窮鄕布衣로서 ‘의병’을 일으키고자 모의했다는 것으로 보아 신향층과는 사회적 신분이 달랐으며 경제적으로도 부호층에 속하지는 못했던 것이다.572)≪陣中日記≫권 2, 임신 4월 1일·24일, 614·663쪽. 홍경래 난이 크게 번지지 않은 것은 大民 즉 世鄕大姓이 움직이지 않은 때문이라 한 김재찬의 말은573)金載瓚,≪海石集≫권 3, 書, 與平安監司鄭晩錫書. 현인복 등 ‘의병’세력의 이와 같은 성분을 고려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봉기군이 수세에 몰리면서부터는 오히려 향무 중 부호층이 적극적으로 반봉기군측에 가담하는 현상을 보임으로써 지배세력 내부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는 드러나지 못한 채 희석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4월 19일 “적이 마침내 평정되어 각 군이 모두 본진으로 돌아갔다. 巡撫中軍도 성내를 두루 살피다가 역시 본진으로 돌아갔다. 다만 본주에는 의병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574)≪陣中日記≫권 2, 임신 4월 19일, 647쪽.라 하듯이, ‘의병’에 의해 지역의 향권이 장악됨으로써 ‘의병’에 의한 명분적 지배가 유지되었고, 그것이 이 지역 향권의 성격을 규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의주지역의 경우는 金見臣과 許沆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허항이 중도에 죽음으로 인하여 사실상 군공이 김견신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면 이 지역 의병 활동의 경과를 군공에 따른 포상과정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2월 22일에 부윤 趙興鎭은 의주 수성을 위해 민인에 효유하였고 의주부 領軍首校 허항을 領兵將으로 삼아 군을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김견신을 防禦將軍으로 삼아 白馬山城을 지키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 11일에는 의병장 府校 崔信燁이 미곶진에 주둔한 적을 해산시켰고, 평안병사가 김견신을 의병장으로 차출하여 격려의 모범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15일에는 의병 將校 崔致倫이 정경행을 잡았고, 김견신은 정복일을 잡아 그 공으로 甲巖權管이 제수되었다. 16일에는 本府 山城 留屯將에 김견신이, 本府 陽下面 防守將에 최신엽이 각각 임명되었다.

 18일에는 허항에게 羽林將이 加資되었고, 김견신은 宣傳官이 되었다. 19일에는 최신엽도 갑암권관이 되었다. 23일에는 허항이 內禁將에 제배되었다. 28일에 최치륜에게 나주영장이 제배되었다. 2월 17일에는 김견신이 태천현감으로 移拜되었다. 김견신과 허항의 역할은 전교에 잘 나타나 있다.

선전관 김견신은 亂初에 창의하여 모병하고 적을 토멸하였다. 싸우면 반드시 이겨 목을 벤 수가 가장 많다. 의주가 온전할 수 있었고 용천과 철산이 수복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의 先倡의 힘이다. 우림장 허항은 들어와서는 籌劃에 옳음을 얻고 나가서는 전투에서 앞장선다. 청북의 대로가 일거에 뚫리게 된 것은 이 사람의 效忠의 힘이다. … 김견신에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써 관서 수령 중 빈자리가 나면 먼저 특별히 제수하도록 하라(≪陣中日記≫권 1, 임신 2월 10일, 403쪽).

 홍경래 난이 끝난 후인 5월 5일에는 김견신에게 선전관이 加資되었고, 26일에 다시 錄勳으로 공충병사를 제수하면서 朝家에서 그 공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고 하였다. 28일에는 최신엽에게도 수령직을 제수하여 楚山府使로 임명하였다. 같은 날 김견신에게는 토지 20결, 노비 10구, 군복 등을 내려 주었다.

 김재찬이 금번 토적의 공은 의주가 최고라 하며 三校(김견신·허항·최신엽)의 공을 지적하였듯이,575)≪陣中日記≫권 1, 임신 정월 23일, 362쪽. 그들은 모두 이 지역 군교들이었다. 그들이 ‘의병’을 이끌게 되는 것도 앞서 지적했듯이 부윤과의 상하관계 속에서 반봉기군 구성에 참여함이 계기가 되었다. 즉 관권과의 연계가 ‘의병’활동 개시의 매개가 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김견신이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김견신의 이러한 행적은 뒤에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그 후 이 지역 향권의 동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의주에서의 반봉기군 ‘의병’에 참여한 세력들은 정주와 마찬가지로 농민군의 주도층을 형성하였던 계층과 사회신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차이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토호 張志憲·張志賢 형제가 자발적으로 성을 지켰다거나, 성 밖의 富民 幼學 洪得周가 자원하여 錢穀을 納官했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의주의 거상 林尙沃은 民兵將이 되어 정부군측 의병장을 물질적으로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576)鶴園裕, 앞의 글(≪傳統時代의 民衆運動≫), 276∼277쪽.

 ‘의병’의 주도층은 의주의 경우, 군교로서 애당초 관권에 종속되어 있었던 층들이었지만, 정주성 고립 이후 ‘의병’에 참여한 세력들의 경우는 관권과의 결탁여부가 봉기군이냐, ‘의병’이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뿐, 양자간의 객관적 차이를 지적하기는 매우 어렵다. 정주의 경우는, 봉기군이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거나 향권에 밀착했던 층들로 구성되었던 반면에 ‘의병’의 주도층은 상대적으로 향권에서 소외되었던 층들이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나 정주성 고립 이후는 의주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의병’활동과 관련하여 의주 지역 향권의 향배는 평안도 지역 향촌지배세력의 재편과정을 잘 보여준다.

 순조 20년(1820) 7월에 정언 孔胤恒과 지평 崔命顯 간에 의주의 義會堂을 둘러싼 공박이 있어 이 지역사정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양측의 주장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7월 16일 정언 공윤항은 ‘의주 吏校들의 亂鄕의 弊’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의회당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외읍에 鄕任이 있는 것은 옛 鄕遂大夫의 남긴 뜻입니다. 門地를 精選하여 案을 두어 이름을 기록하고 안에 의거하여 직임을 差定하여 鄕中 名分의 一大 防閑으로 삼고 있습니다. 듣건데 의주 일읍이 亂鄕의 일로 인하여 班賤의 구분이 없어지고 爻象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의주는 임진(임진왜란)에 힘을 얻은 곳입니다. 선조대왕께서 이 곳에 幸行하셨을 때 三頭宴을 베풀고 상중하를 판별하여 ‘義州鄕人皆是鄕大夫者’라는 열 자를 특서하였는데 이를 향당에 걸어두고서 의주인의 榮耀로 삼았고 지금까지 엄숙하고 정성스럽게 기리고 받들어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辛壬(홍경래 난) 이후 本府의 吏校輩들이 軍功을 빙자하여 의회당을 창설하고 前兵使 김견신의 교서를 가져다 당중에 두고 이름하여 말하길 ‘御筆奉安之所’라 하여 시정의 무뢰배 및 열읍의 富商들에게서 禮錢을 거두어 이름을 써 안을 만들고 스스로 자랑하여 말하기를 ‘향당에 어필이 있으면 우리 또한 어필이 있고, 향당에 舊案이 있으면 우리 또한 新案이 있다’라 하여 관장을 속이고 향임을 차지하더니 얼마 지나자 早隷들이 문득 靑衿을 입고 심지어는 差任할 때 奴와 主가 동열에 서는 폐까지 있게 되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습니까. 단지 이뿐만이 아닙니다. 辛壬賊變이 있던 때 죄가 있는 자가 반드시 모두 鄕人만은 아닐 터이고 공이 있는 자도 모두 반드시 吏校는 아닌데 지금 그 말이 ‘향인은 난을 만들었지만 이교는 충성을 다하였다(鄕人造亂 吏校效忠)’라 합니다. 이 때문에 관서의 簪纓故族과 鄕班遺裔는 渙散의 뜻만을 가질 뿐 奠居의 즐거움이 없습니다(≪日省錄≫순조 20년 7월 16일).

 한편 이에 대해 7월 27일에 지평 최명현577)최명현은 1840년 영해향전 당시 영해부사로서 신향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인물이다. 이 점은 의주의 이교층과 영해의 신향층이 동일한 계급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張泳敏,<1840년 寧海鄕戰과 그 背景에 관한 小考>,≪忠南史學≫2, 1987).은 다음과 같이 공윤항의 주장을 논박하였다.

무릇 외읍의 校鄕輩들이 서로 득실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단지 道伯이 살피고 府尹이 금단할 일이지 어찌 臺臣이 그 사이에 끼어 부추기거나 억누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 영조 35년(1759)에 道臣의 査啓로 인하여 關西鄕案은 파하였으니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逆律로 다스리라는 聖敎가 거듭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疏에서는 영조 35년 이후 이 법이 극히 엄중하다고 하여 마치 향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성교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先正臣 李珥의 향약조례는 鄕遂의 鄕으로서 예의를 서로 앞세워 향속을 돈독히 함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름을 기록하거나 역을 차정하는 등은 다만 先事의 戒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는(향안으로 鄕中 名分의 一大 防閑으로 삼는다는 공윤항의 주장) 현인의 가르침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일 뿐입니다. 의회당을 창설한 것은 전병사 김견신이 入侍했을 때 왕이 義黨을 始倡하였고 武功을 능히 이루었다고 칭찬하고 ‘爾等樹不世之勳’이란 일곱 자의 어필을 견신에게 내려주자, 이에 감격하여 감히 사사로이 갖지 못하고 從征壯士들과 함께 堂을 하나 지어 寶墨을 봉안하고 會義라는 편액을 걸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주성이 破한 날이 되면 매년 모여서 聖德을 기려 一鄕의 光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敎書를 당중에 두었다고 하니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사실과 다른 일을 함부로 말하니 駭妄의 일단을 볼 수 있습니다(≪日省錄≫순조 20년 7월 27일).

 최명현의 논지는 다만 향안 즉 舊案은 이미 파하였고 안에 이름을 기록하거나 직임을 차정하는 등의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거나, 당중에 둔 것은 어필이지 교서가 아니라는 등의 부분적인 사항에만 국한되어 있을 뿐 吏校輩들의 亂鄕에 관한 사항을 정면에서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공윤항의 지적이 당시 의주의 실상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이고 이로 미루어 의주의 향권이 吏校層을 중심으로 한 ‘의병’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의회당은 의주 남쪽 鶴峰 아래에 있었다. 홍경래 난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병’세력들은 의회라는 모임을 조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순조 12년(1812) 6월에 이미 본당의 별실에 김견신에게 내려진 것들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 때는 정주성이 회복된지 불과 2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향권의 장악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모임을 지방관과 연결시켜 향권의 실체로 공인받고자 순조 14년에 의주부윤 吳翰源을 찾아갔고 부윤은 이를 받아들여 정주성이 파한 날인 4월 19일에 辛壬戰守將士들과 한 차례의 遊宴을 갖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모인 자들은 모두 49인이었고 그들의 명단이 의회록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新案의 모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오한원은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고, “뒷날 이 땅의 부윤이 되는 자 또한 우리들과 뜻을 같이 할 것이다”라고 하여 의회당 세력이 곧 이 지역 향권의 실체이며 이는 이후로도 계속될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公卿諸公名帖錄(그 명단에는 右議政 鄭晩錫, 右議政 林漢浩, 吏判 趙鍾永, 參判 呂東植, 領議政 韓用龜, 參判 兪應煥, 本府幕裨 李勉人·趙雲倬·金學基·宋文絅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을 두었고, 그 나머지 義士 470여 인의 성명은 義會案에 적어두었다.578)≪龍灣誌≫(≪朝鮮時代私撰邑誌≫50, 平安道篇 6) 館廨, 150∼152쪽.

 향인층은 향당을 기구로 하여 향권을 행사하고 향안을 두어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홍경래 난을 계기로 여기에 향인층 일반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틈타 ‘의병’세력이 명분을 얻어 의회당을 창설하고 신안을 만들어 기존의 지배질서를 대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향인층과 ‘의병’으로서의 신향간에 경제적 차이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의주지방의 신향들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구분되는 존재였다.

 의주의 향권은 홍경래 난을 거치면서 반봉기군 즉 ‘의병’세력에 의하여 장악되었고 그것은 의회당을 통하여 행사되고 있었다. 그 주도세력은 이교배들로서 기존의 향인층과는 정치적 성격을 달리하고 부상들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었다. 따라서 향당은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였다. 이 의회당세력은 지속적으로 중앙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평안도의 그 밖의 지역에서도 사정은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江西縣誌≫(1829년)에는 科宦條에 원납을 통한 수직자나 반봉기군으로 활동한 자들을 부기하고 있다. 이는 곧 신향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역시 이들이 향촌사회에서 주요세력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결과였다.≪安州牧邑誌≫(1820년 이후)에도 당시 목사였던 조종영의 守城記蹟碑文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고 있다.≪定州邑誌≫(고종대)에도 충의단(壬申殉節六義士)에 관한 기록이 있다.579)≪定州邑誌≫(≪朝鮮時代私撰邑誌≫48, 平安道篇 4).

 ≪용성지≫(1865년)에 의하면 홍경래 난 이후 1844년, 1845년, 1862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수령에 의해 開鄕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 발문에는 세 가지 近古의 풍속을 들면서 그 하나로 “백성들이 수령을 존중하고 법을 두려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들 신향세력과 관권 특히 수령권과의 밀착을 엿보게 해준다.

 이처럼 1811년 홍경래 난 이후 평안도 지역의 향촌사회 지배질서는 ‘의병’출신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의병’세력이 봉기군과 구별되는 점이 관권과의 결탁여부라고 할 때 이렇게 정립된 지배질서는 수령권과 유착관계를 이루었을 것이며 나아가 중앙권력으로부터 비호되었을 것이다.≪巡撫營謄錄≫권 3에는 1812년 5월 7일부터 1814년 6월 21일까지 난의 평정에 따른 논공행상과 일차 논공행상에서 누락된 자들의 재포상이 3년여에 걸쳐 행해졌던 것을 기록하고 있고, 그 후에도 19세기 내내 의병에 대한 추숭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었다.580)≪朝鮮王朝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해도≪純祖實錄≫권 7, 순조 24년 3월 신사·6월 신축·10월 계묘 및≪哲宗實錄≫권 3, 철종 2년 9월 병인·6년 9월 을축·9년 6월 갑자·10년 3월 을미 등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의병’세력이란 테두리 내에서 그 지역의 향권이 운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병’층은 나름대로의 강한 명분을 갖고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업적 이익은 독점에서 비롯되며 그 독점에는 경제적 독점과 특권적 독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봉기군이 상업적 측면에서 경제적 독점을 지향하면서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면, 관권과 밀착된 ‘의병’이 향권을 장악함으로써 상업도 특권적 독점을 지향하는 상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활동의 자유라는 근대 부르주아적 경제이념의 실현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그러한 욕구는 자연 자유상에 가까운 밀무역 종사자로부터 나타났었을 것이고 이것이 홍경래 난에 상인층이 광범위하게 가담했던 원인을 설명하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실패로 인하여 이후 독점의 실현은 상업활동의 자유에 기초한 경제적 독점에 의하기보다는, 중앙권력과의 관계에 기반한 특권적 독점에 기초하여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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