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19세기는 정치적으로 세도정치기였다.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왕을 보좌하던 金祖淳이 자신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고 왕권을 압도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실시되었다. 그뒤 역대 왕들은 왕실과 척족관계에 있는 양반관료가 실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순조 말년부터 헌종 때까지는 풍양 조씨 일파의 외척세력이 대두하여 안동 김씨 일파의 세력을 견제하였으나, 헌종 15년(1849)에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정국은 다시 안동 김씨에 의해 주도되었다. 철종 때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절정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기간 동안 왕권은 명목에 지나지 않았고 조정의 요직은 권문일족들의 사유물이 되었다.

 이러한 세도정치의 성립은 어린 왕의 즉위를 계기로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전의 붕당정치가 변질되어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붕당이 척족 중심의 당파로 대치되어간 일면과 아울러 붕당의 요건이 學緣에서 외척관계로 전이된 측면, 그리고 이 시기 급격한 사회변동에 대응하여 반동적 권력구조로 재편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보수적 지배층의 정치적 한계로 인한 복합적 배경에 토대하고 있다. 따라서 세도정국에서의 정치는 정치의 집중화와 보수화가 불가피하였다.599)崔完基,<붕당정치의 전개와 정국의 변화>(≪한국사≫9, 한길사, 1994), 137쪽.

 당시 비변사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중요한 인사권을 장악하여 권력의 핵심기구가 되었다. 반면 이전의 의정부는 그 기능의 대부분을 비변사에 넘겨주고 의례 정도만을 담당했으며, 육조 또한 정책입안과 집행기능이 약화되고 비변사에서 결정된 사안을 집행하는 기능에 한정되었다.

 외척들은 비변사를 거의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호조·선혜청의 요직도 차지하여 재정기반을 굳히고,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영도 장기적으로 독점하면서 정권유지의 토대를 확고히 했다. 외척세력은 권력집중을 위해 자기 논리를 관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성리학적인 것은 물론 군신관계에 토대한 가치기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치적 견제세력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정권의 도덕성이 상실되고, 게다가 한 가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정국이 운영되어 자연히 부정과 부패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인사관리에서 두드러져서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에서 온갖 비리가 행해졌다. 합격자가 남발되고 뇌물이나 특권층과의 연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관직의 매매가 성행하였다. 특히 지방재정을 담당하는 수령직의 매매가 유행하였다. 세도를 잡은 양반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매관매직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렇게 벼슬자리가 중요한 致富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자들은 수령직 등 관직의 임기를 단축시켜 자주 그 자리를 교체함으로써 축재하였다. 또한 관직을 산 수령들은 탐학을 통하여 이를 채워나갔다.

 이와 더불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도시 소비생활의 향상을 가져온 반면 양반 지배층의 사치욕구를 자극하여 국가재정의 지출을 늘였다. 이 때문에 세도정권 아래에서는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위기가 닥쳐왔다. 이러한 국가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세도정권은 새로운 재원의 확보에 열중하였다. 대동미의 중앙 상납분을 증대시키는 조치나 환곡의 총액을 늘리는 조치, 심지어 鑄貨의 질을 떨어뜨려 화폐발행의 이익을 늘리는 것도 상습적으로 행해졌다.

 중앙정치의 여건은 지방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고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사족 중심의 지방질서를 크게 동요시켰다. 여기에다가 정치적으로 노론세력에 의한 집권이 계속되고 세도정권으로 나아가면서 지방의 많은 사족들은 세력이 침체되어갔다.

 이와 함께 점차 이완되어 가는 봉건적 지배질서를 다시 강화하기 위해 국가는 수령 중심의 통제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더구나 영조 4년(1728) 戊申亂을 계기로 노론정권은 지방사족의 반란을 염려해 군현을 지배하는데 있어서 재지사족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수령권 강화정책을 취하였다.

 이처럼 수령의 권한이 강화된 것은 중앙정부의 지방지배에 대한 정책의 변화 때문이었다. 18세기에 들면 중앙에서는 변화하는 지방사회에 대한 실정을 파악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노력하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유형의 읍지와 지도를 편찬하여 지방의 전반적인 실태와 문제점을 국가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려고 하였다. 법체제를 재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것도 변화된 사회체제를 재정립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자연히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었다.600)이해준,<조선후기 관주도 지방지배의 성격>(≪조선시기 국가의 지방지배≫, 한국역사연구회 발표문, 1995).

 그리고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중앙정부는 이제까지 군현지배를 넘어서 수령을 거쳐 면리까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향촌 통제와 관련하여 수령이 부세 운영권을 장악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처럼 19세기에 이르면 국가권력이 파행적으로 운영되면서 수령의 권한이 더욱 커지게 될 뿐 아니라 지방사회 운영도 파행성이 커졌다.

 수령권 강화책과 함께 상품경제의 발전 및 수취제도의 변화에 따라 수령의 하급 실무자인 향리층의 조직과 기능이 분화되고 강화된다. 조선 전기의 戶長→六房→色吏層으로 서열화되어 있던 위계질서가 흩뜨러지고 육방과 일부 부서의 색리들이 중요한 위치와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는 봉건국가의 부세체계와 관련해서 많은 이권이 따르고 있었다. 수령이 부세운영을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수령들은 사족보다는 이서들과 결탁하면서 운영하려고 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직임들을 맡기 위하여 향리들간의 경쟁이 벌어졌다.

 나아가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세력들이 이러한 경쟁에 끼어들어 직임을 맡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에 재지 양반층의 권력기구였던 향청은 더욱더 수령권에 종속되어 갔고 향리들의 직임보다도 못한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 결과 이전 명문사족들은 향청에 참여하기를 꺼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편승해서 새로이 신분을 상승시킨 세력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끼어들었다. 그들은 사족들이 꺼리는 면임·이임과 같은 자리를 서서이 장악하고 심지어는 재지사족들이 독점하고 있던 좌수·별감 등의 鄕任직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601)金俊亨,<18세기 里定法의 展開-村落의 기능강화와 관련하여->(≪震檀學報≫58, 1984). 기존 사족들이 이를 저지하고자 활동하였지만 그것은 성공할 수 없었다. 향안의 추가기록이 중지되거나 폐기되어 버리는 현상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족의 향촌 지배력은 더욱더 약화되어 갔다.

 물론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거나 중앙관료들과 연계를 맺고 있는 일부 토호 사족들은 여전히 수탈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기반이 상실된 대부분의 사족들은 기존의 지배권이 축소 또는 약화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사족들이 당시 상업·수공업 발달의 새로운 경제변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서 영향력이 차츰 약화되거나 축소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사족층 내부에서 대지주와 중소지주, 몰락양반으로 심각한 계층분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더 이상 사족간의 공동이해를 관철시킬 수 없었다. 대지주들은 중앙의 권력층이나 지방의 수령과 결탁하거나 또는 향촌사회 안에서 경제외적인 강제를 동원하여 토호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려 하였다. 한편 사회경제적인 발전을 적절히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던 부민층 가운데 일부가 수령과 적절하게 결탁하면서 新鄕 또는 鄕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舊鄕이라 불리면서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존의 사족층에 대항하면서 세력을 형성하여 향권에 참여하거나 혹은 향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鄕戰이 나타났다. 향전은 결국 기존 사족들의 향촌지배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신향들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편입되면서 신분적인 특권을 누리고, 자신과 관련된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602)金仁杰,≪朝鮮後期 鄕村社會 變動에 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그러나 향권을 둘러싼 갈등은 상대적으로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사족들이 향촌을 지배하는 기구로 운영되었던 향회도 그 주도권이 수령에게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진주에서 수령이 향회를 열어서 都結을 결정하도록 하였다.603)宋讚燮,<1862년 진주농민항쟁의 조직과 활동>(≪韓國史論≫21, 서울大, 1989). 이제 향회도 이러한 부세운영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부분의 사족들은 지배권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자신들도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지방운영의 실태는 부세운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보았듯이 중앙정부에 의해 재정이 감액된 지방관청에서는 지방민에 대한 수취를 강화하여 재정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삼정의 문란이나 각종 잡세의 부과, 고리대 등이 만연하게 되었다. 잡역세를 충당하기 위해 民庫가 설치 운영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604)金容燮,<民庫制의 釐正과 民庫田>(≪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1992).

 이에 따라 자연히 봉건권력에 의한 농민수탈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는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수탈의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국가재정의 위기를 농민수탈의 강화를 통해 모면해보려는 국가의 정책이 19세기 삼정문란을 야기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농민들의 삼정수탈에 대한 정소운동 등 합법적인 반대운동은 지방관의 적극적인 탄압에 의해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고을 단위로 자신들의 결집된 역량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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