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1) 항쟁의 발생 지역

 부세의 운영방식과 부담의 증가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항쟁은 19세기에 들어 민란의 시대라고 할만큼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형식은 농민층의 유리, 항조투쟁과 같은 소극적인 형태에서부터 봉기에 이르는 적극적인 항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방법에 있어서는 비록 이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빈도가 늘어나고 다양한 형식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는 차이가 있다.

 먼저 농촌에서 이탈하는 이른바 유리도산은 봉건지배층에 직접 저항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소극적 저항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자신의 기반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저항의 한 방법이며 결단력이 필요하였다. 진주에서는 농민항쟁 직전인 철종 9년(1858)∼철종 10년의 2년 동안에 3,300여 호가 파산하고 유리하였는데 당시 전체 호수가 15,000여 호였던데 비한다면 2할이 넘는 엄청난 숫자였다.605)≪備邊司謄錄≫246책, 철종 10년 6월 19일. 이들이 모두 경제적 파탄의 이유로 유리하였다고 볼 수는 없고, 그 중 상당수는 부세의 부담을 벗어나려고 유리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산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말을 통한 선전 형태의 訛言이 있는데 이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초보적이나 동시에 가장 광범한 대중을 포괄하는 투쟁형태였다.606)丁若鏞,≪牧民心書≫兵典 應變. 그 내용은 대체로 수령, 이서의 탐학 사실을 규탄하거나 鄭鑑錄의 일부 문구와 같이 현존하는 통치체제를 부정하는 등 선동적이고 정치적 내용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에 농민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공감대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글로 표현하여 여론을 선동하는 掛書사건도 자주 발생하였다. 이는 문자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농민들이 직접 작성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농민들의 욕구를 반영하고, 나아가 이들을 선동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순조 원년(1801) 8월 경상도 남단에 있는 하동과 창원의 장시에서 일어난 괘서사건이 대표적이었다.607)≪純祖實錄≫순조 원년 8월 기유·10월 계유. 여기서 장시가 이런 사건에 자주 이용되는 것은 농민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어서 많은 농민들이 볼 수 있고 또 모여서 여론을 일으키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사항들은 지역 내에서 일상적이고 은연 중에 전개되는 것들이다. 더욱 구체적이고 조직화된 투쟁으로는 당시 수없이 보고된 民擾, 作變 등이 있었다.608)한명기,<사회세력의 위상과 저항>(≪조선정치사(1800∼1863) 상≫, 1990). 이같은 사건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가혹한 수탈로 인하여 통치기구로서의 관의 권위가 떨어졌고 분노에 찬 농민들은 관가에까지 뛰어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농민들의 반봉건항쟁은 19세기 봉건적 사회질서가 동요되는 가운데 차츰 고양되었으며 철종 13년(1862)에 이르러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나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중순에 명화적이 충청도 신창, 온양에 출현하였고 윤8월 초순에 아산지방에 나타난 일이 있었다. 명화적의 활동은 본래 농민항쟁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봉건해체기라는 상황과 계급적 처지의 유사성으로 인해 상호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609)裵亢燮,<壬戌民亂 전후 明火賊의 活動과 그 性格>(≪韓國史硏究≫60, 1988).

 그러나 농민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고, 삼정에 대한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농민들의 관에 대한 직접적인 요구가 활발해졌다. 이는 소장을 작성하는 방법이었다. 군현과 감영에 대한 呈訴, 나아가 중앙의 비변사에 대한 정소, 그리고 왕에게 대해서는 擊錚의 방법이 있었다. 이는 법전에서도 보이듯이 실상 정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많은 지역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인정되지 않거나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진주에서는 철종 10년에 농민들이 비변사에 소장을 올렸고,610)≪備邊司謄錄≫246책, 철종 10년 6월 19일. 함평에서도 여러 차례 중앙과 감영에 정소했고 심지어 격쟁까지 했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으며, 수령은 주동자들을 감영의 인신을 위조하여 무고했다는 혐의로 감영에 보고하여 처벌하도록 하였다.611)≪龍湖閑錄≫(韓國史料叢書 25, 國史編纂委員會, 1979) 권 3, 營奇, 73쪽.

 산에서 벌이는 횃불시위도 그 성격에서는 격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함평민들이 서울 남산에서 횃불시위를 일으킨 것도 왕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방편이었다.612)≪承政院日記≫2650책, 철종 13년 4월 22일.

 이처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등소·의송·격쟁·시위 등의 방법을 통해서도 실제로 해결되지 않자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실력행사를 하는 길이었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농민봉기는 농민들이 대중적으로 참여하고 행동으로 표출하는 반봉건항쟁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농민항쟁은 철종 13년(1862) 2월 4일 경상도 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벽지인 丹城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사족을 중심으로 한 고을민들이 환곡의 여러 폐단에 항의하면서 관아로 쳐들어가자, 현감은 감영으로 도망했다. 이 때만 하더라도 중앙에서는 이를 으례 발생하는 사태로 보고 제 구실을 못한 수령을 교체하는 선에서 처리하였다. 그러나 그 뒤 열흘만에 이웃 진주에서 樵軍이 중심이 되어 관가와 양반가를 공격하였는데, 그 양상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었다. 이를 본받아 3월에는 함양·거창, 4월에는 밀양·선산 등지에서 일어났고 곧 경상도 일대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경상도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은 곧 전국적인 항쟁으로 번져갔다. 전라도에서는 3월 말 익산에서 처음 농민항쟁이 일어나서 4월 말과 5월 초에 집중되었고 충청도에서는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6월에 들어 전라, 충청도는 차츰 가라앉는 분위기였으나 경상도에는 여전히 열기가 남아 있었다.

 9월부터는 제주도에서 일어났고 10월에 들면서 廣州, 함흥 등에서도 일어났다. 11월에는 창원, 12월에는 남해에서 일어나서 이 해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지역별로 농민항쟁의 상황을 살펴보자.613)宋讚燮, 앞의 책, 72∼75쪽. 먼저 경상도의 경우는<표 1>과 같다.

발 생 지 역 날 짜 직접적 계기
단 성 2. 4 耗條結斂, 逋欠 强制充完, 移貿
진 주 2. 14 還逋(都結), 移貿
(우 병 영) 2. 14 還逋(統還)
함 양 3. 16 田稅木價
거 창 3월 중순 結價
성 주 3. 26, 4. 12 逋欠, 結價 과다, 移貿
울 산 4. 1 都結, 左兵營 完餉米 운영
선 산 4. 2(2차) 結價 과다
개 령 4. 7(2차) 都結
인 동 4. 9 都結(吏逋徵民), 結價 과다
군 위 4월 還穀의 結斂
비 안 4월 結斂
밀 양 4월초 還穀의 폐단
현 풍 4월말, 5. 17  
상 주 5. 15 排逋濫耗, 結價 과다, 移貿
경 주 10월경 結價
신 녕 10월경 還逋
연 일 10월경 숫돌 비용 호당 부과
창 녕 10월경  
창 원 11. 8 還穀의 폐단, 移貿
남 해 12. 21 還穀의 폐단

<표 1>경상도 농민항쟁 지역

상주의 경우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1861년 겨울에 이미 사건이 발생하였다(≪承政院日記≫2648책, 철종 13년 2월 5일 및≪日省錄≫철종 13년 8월 28일).

 경상도에서는 먼저 지리산 기슭인 단성·진주·함양·거창 등의 진주권에서는 2∼3월 사이에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다음 상주권에서는 상주·선산·개령·인동·성주·비안·군위 등이 3∼4월 사이에 일어났으며 두세 차례 일어난 읍도 여러 곳 있었다. 셋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울산·창녕·밀양·신녕·연일·현풍 등 경주권으로, 이 가운데 경주·신녕·연일·창녕은 三政釐整節目이 반포된 뒤 10월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그리고 안동권에 속하는 읍으로서는 비안에서만 일어났다.

 당시 읍은 토지면적의 다소에 따라 등급을 나누기도 하는데 대체로 6천 결 이상을 대읍, 4천 결 이하를 중읍, 2천 결 이하를 소읍, 1천 결 정도를 잔읍으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의거하면 대읍으로는 밀양·안동·진주·상주·성주·경주·선산·대구 등 8읍이며, 중읍은 창녕·영천·예천·울산·김해·고성·의성 등 7읍이다. 그리고 소읍은 양산·현풍·영산·영천·청도·의흥·경산·용궁·풍기·신녕·칠곡·인동·동래·창원·하동·사천·곤양·의령·함안·함창·삼가·함양·개령·금산·거창·초계·합천·고령 등 28읍이며, 잔읍은 언양·자인·비안·연일·흥해·하양·군위·순흥·영해·청송·영덕·봉화·예안·영양·진보·기장·장기·청하·남해·단성·칠원·거제·진해·웅천·안의·산청·문경·지례 등 28읍이다(강조부분은 농민항쟁 발생지역).

 대읍은 8읍 가운데 6읍, 중읍은 7읍 가운데 2읍, 소읍은 28읍 가운데 7읍, 잔읍은 28읍 가운데 5읍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비율로 본다면 대체로 읍세와 비례하고 있다. 특히 대읍의 비율이 매우 높아서 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읍은 대구·안동 단 두 곳에 지나지 않았다. 읍세에 따라 경제적인 여건과 항쟁세력의 역량에 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또한 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와 같이 행정적인 비중이 높은 읍에서 항쟁의 비율이 높다.

 전라도는 발생지역이 매우 많고 전지역에 걸쳐 고루 분포되어 있어 경상도처럼 읍세에 따른 차이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표 2>).

발생지역 날 짜 직접적 계기
장 수 3. 16 이후  
영 광 3. 16 이후 邸債 作還
익 산 3. 27 都結(환포충완 보군폐)
능 주 3. 29 이전  
무 주 3. 29 이전  
함 평 4. 16 還穀 과다
고 산 5. 4 軍役稅 還逋
부 안 5. 8 還逋 등
금 구 5. 11 還穀 移轉, 結稅 과다
강 진 5. 12 兵營 作隊軍錢 부과
장 흥 5. 13 田稅, 大同稅 과다
순 천 5. 15 還穀
화 순   加斂, 加作
진 안   吏逋徵民 減價分給
흥 양   吏胥의 還逋
옥 과   還弊
고 창   吏逋徵民
장 성   都結, 無名戶斂錢

<표 2>전라도 농민항쟁 지역

전라도 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있었으나 보고가 되지 않은 읍으로 임피·장수·용담·무안·화순·진도·순창·태인·구례·진안·금산·고창 등이 있다(≪龍湖閑錄≫12책, 京營奇). 이 가운데 장수, 고창과 화순은 다른 기록에 보이나(≪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6월 12일, 126·430쪽) 나머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충청도는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점과 감영이 있는 공주와 병영이 있는 청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에서 대부분 일어났다는 점이 특징이다. 곧 공주와 그의 진관에 속한 임천·은진·회덕·진잠·연산과 청주와 그의 진관인 문의·회인·청안·진천 등이었다. 읍의 규모로 볼 때는 공주·청주·임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행정적으로 소읍인 현에서 일어났다. 서쪽의 내포지역에서는 한 곳도 농민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생활형편이 다소 낫다는 점과, 이미 4월에 신창, 온양 등지에서 명화적이 나타나서 병영이나 진영에서 명화적 체포를 위해 군대가 동원되는 등 억압적 사회통제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표 3>).614)망원한국사연구실, 앞의 책, 326쪽.

발생지역 날 짜 직접적 계기
은 진 5. 10 還逋, 耗穀의 結斂
공 주 5. 10 還逋, 結斂 등
회 덕 5. 10 還逋
청 주 5. 13  
회 인 5. 14 禁養 斫伐 반대
문 의 5. 14 結價와 軍役 부과 시정
임 천 5. 17 還穀의 虛留
진 잠 5월 중순  
연 산 5월 중순  
진 천 5월 중순 結價 과다
청 안 10. 2 軍錢補弊條를 結價에 첨가

<표 3>충청도 농민항쟁 지역

 기타 지역으로서 광주·함흥·제주도 등은 모두 조정에서 이정책을 발표한 뒤에 일어났다는 점이 특징이다(<표 4>). 이는 이정책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항쟁이 일어나려고 했던 지역이 있었다. 경상도 고성에서도 방문이 걸리고 무리들이 모여 진주, 단성을 본받으려고 하였으며,615)≪壬戌錄≫(韓國史料叢書 8, 國史編纂委員會, 1971), 3쪽. 함창에서는 4월 중순의 장날에 권씨 성을 가진 土班이 통문을 돌려 장시에 농민을 모으다가 관가에 의해 미리 체포되었다.616)≪壬戌錄≫<鍾山集抄>, 204쪽. 대구에서도 향회가 빈번하게 열리고 봉기가 일어날 조짐이 나타났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617)≪壬戌錄≫<鍾山集抄>, 211쪽. 감영의 소재지였던만큼 봉기가 일어나기 어려웠던 것같다.

발생지역 날 짜 직접적 계기
광 주 10. 23 파환귀결 후 환포 징수 반대
함 흥 10. 24 파환귀결 후 원곡 집전 반대
제 주 3읍 9. 12∼14 화전세 부당 징수 등

<표 4>기타 지역의 농민항쟁

 충청도 부여에서는 현감 李啓淳의 탐학에 항의하여 횃불시위가 있었으며,618)≪日省錄≫철종 13년 6월 6일. 옥천에서는 5월 중순에 부세문제의 시정을 위하여 봉기를 준비했으나 수령이 효유하여 흩어졌다고 한다.619)≪壬戌錄≫<鍾山集抄>, 225쪽. 그리고 황해도 봉산에서는 9월초 농민들이 횃불시위를 벌였다.620)≪日省錄≫철종 13년 9월 5일.

 그런데 전라도의 경우 38개 발생지역 가운데 순창·구례·진도·태인 등은 수령이나 감사가 자체처리하고 중앙에는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경상도나 충청도의 경우 정식으로 보고된 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도 농민항쟁이 발생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상 71개 읍 외에도 전라도 남원과 운봉은 3월 중순에 인근 함양봉기의 여파로, 김제는 5월 초 선무사 趙龜夏의 순행시 인근 금구·부안 봉기의 영향으로 항쟁이 발생하였을 개연성이 높은 지역이다. 한편 해남의 경우 李夏銓 사건의 주동자 金順性의 지시에 따라 김일회가 주도한 흉서사건이 8월 초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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