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6) 요구조건

(6) 요구조건

 농민들은 봉기를 하면서 所志를 올려서 이를 통해 요구사항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사례는 5월 10일 공주농민항쟁 때 올린 11개 소지와 함평농민항쟁 때의 十條仰陳 등이 있다.643)망원한국사연구실, 앞의 책.

 먼저 공주의 사례를 살펴보자.

1. 稅米는 항상 7냥 5전으로 정하여 거둘 것. 2. 각종 軍布를 小民들에게만 편중되게 부담시키지 말고 각 호마다 균등하게 부담시킬 것. 3. 환곡의 폐단을 없앨 것. 4. 군액의 부족분을 보충한다거나 환곡의 부족분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결렴하는 제도를 폐지할 것. 5. 吏校의 작폐와 사령의 침어를 금지할 것. 6. 전정의 稅米를 거둘 때 기한에 앞서 거두지 말 것. 7. 토지가 川浦로 변하여 세금을 낼 수 없는 토지와 가뭄 등의 이유로 災結이 된 토지, 새로 재결이 된 토지에 대한 면세조치는 균등하게 분배할 것. 8. 各面主人에게 지급하는 例給條와 각 廳의 契防條는 시행하지 말 것. 9. 사대부가에서 표적을 묻어놓고 땅을 광점하는 것을 금지시킬 것. 10. 各面書員들에게 주는 例給과 周卜 명색을 시행치 말 것. 11. 공주부의 各班下人들을 원래 정해진 액에 따라 그 액수를 감할 것.

 공주 농민의 요구조건은 1∼4항에서 보듯이 전정, 환곡, 군포 등 삼정과 결가에 관계된 내용이 중심이다. 6, 7항은 전정에 관한 것, 2, 4항은 군역에 관한 것, 3, 4항은 환곡에 관한 것, 1, 4항은 결가 결렴에 관한 것이며, 그 밖에 5, 8, 10항은 이들 조세를 구체적으로 수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방관이나 서리층의 중간 농간이나 지방경비 지출에 관계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러한 지출을 막기위해 11항에서는 각 기관에 소속된 하인들의 규모를 원래 정해진 규모로 줄이자고 하였다. 또한 9항은 양반층이 산지를 무단으로 광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봉건적 지배관계에 대한 모순의 시정을 담고 있다.

 다음은 함평의 십조앙진을 살펴보자.

1. 漕倉에 납부하는 액수를 남봉한 점. 2. 궁방전의 결세가 높은 점. 3. 虛結을 빙자하여 탈루한 점. 4. 京債 명목으로 억울하게 징수당한 액수가 32,000여 냥에 이른 점. 5. 경채 가운데 거두지 못한 부분과 서리들이 몰래 빼낸 營還錢 7,400냥을 환곡 장부에 첨부시킨 점. 6. 營邸吏 역가를 稅米價에 붙여서 부과한 점. 7. 본읍 환곡이 본래 24,000여 석인데 매년 늘어나서 기십만 석에 이른 점. 8. 본읍 매호 作錢과 매 結頭가 1냥 정도였는데 지난해 牟作錢이 매석 4냥이었고 租還이 매호 9냥 5전, 매결 8냥 5전이 된 점. 9. 軍丁流亡番錢을 호와 결에 거두었는데 매결 8, 9냥에 이른 점. 10. 관에서 미납한 액수를 7년간 배봉하도록 하여 매호 5, 6푼 정도였는데 근래에는 결두에 1전 8, 9푼에 이른 점.

 함평농민들이 제기한 요구조건도 삼정을 비롯하여 저채, 잡세 등 부세문제였다. 2, 3항은 전결세 운영을 둘러싼 문제이고 5, 7항은 환곡, 9항은 군역세의 문제, 4, 5항은 저채 문제, 1, 6항은 잡역세의 문제, 8, 10항은 앞의 부세와 관계되겠지만 이를 호렴·결렴하는 것에 관련된 것이다. 이처럼 요구조건이 10항목이지만 운영과정에서 서로 밀접히 관련되고 있다.

 이상에서 농민들은 소지를 통해 봉건적 지배관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적인 문제점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자신들의 절실한 이해가 걸린 토지문제는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는 요구조건을 담은 소지가 소빈농의 조직적 역량이 갖춰지지 않은 초기 등소운동과정에서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주도한 계층이 주로 지주, 부민이었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 농민들은 봉건적 부세체제를 개선하려는 입장이 우선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조세문제의 경우 고을에서의 관행, 부과방법, 운영방식에 따라서는 소빈농을 비롯한 각 계급간의 이해가 상충되게 나타났다. 부과대상만을 염두에 둘 때 대체로 군역세, 환곡 같은 부세는 소빈농의 이해관계가 밀접하고 結價의 문제는 자작농 이상 지주층의 이해에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지적되는 것처럼 삼남지방에서는 결가뿐 아니라 과외의 결렴분까지 작인에게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 결가의 문제는 소빈농의 이해와 결코 무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은 환곡의 부담을 둘러싸고 나타나기도 한다.

 상주의 경우 관에서 포탈한 환곡 4만여 석의 이자를 마련하는 문제에서 대민과 소민 사이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대민은 호에다 분담하자는 주장이었고 소민은 토지에 나누어 분담하자는 주장이었다.644)≪壬戌錄≫<鍾山集抄>, 206쪽. 토지를 기준으로 거두면 자연히 토지가 많은 양반호의 부담이 늘어날 것이고, 일방적인 환곡 분급 예에 따라 호에다 분급하면 양반호는 환곡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 빈부의 구별없이 같이 부담하므로 자연히 가난한 농민들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농민들의 요구는 지방관으로부터 답변을 넘어서 가능한 한 책임있는 기관인 중앙이나 중앙관리로부터 확인받고자 하였다. 함평의 정한순은 죽음을 무릅쓰고 안핵사 趙龜夏 앞에 나서서 폐막 10조를 올렸으며, 선산의 전범조가 관으로부터 결가 8냥의 전령을 받은 데도 선무사 李參鉉의 길을 막고 이를 확인하는 문적을 받고자 하였다.645)망원한국사연구실, 앞의 책, 189∼198·273∼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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