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7) 공격대상

(7) 공격대상

 농민들은 공적 권력과 사적 권력 모두 공격하였다. 대체로 공적 권력에 대한 공격은 조세체계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수탈한 수령, 이서층을 대상으로 하였고, 사적 권력에 대한 공격은 읍내 사대부, 鄕員, 지주가를 대상으로하였다.

 농민들은 먼저 국가의 조세수탈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따라서 지방관이 통치하는 관청으로 몰려갔다. 수령은 고을의 통치 권한을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수령은 왕이 직접 임명하여 파견된 관리이므로 직접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들도 공격대상임에는 분명하였다. 진주에서는 병사 白樂莘을 둘러싸고 하룻밤을 꼬박 지세웠고,646)≪晉州民變錄≫本營兵使白樂莘狀啓. 제주·옥과·함평·익산의 경우 수령을 구타하여 가마에 태운 뒤 경계선 밖으로 추방하는 적극적인 행동이 있었다. 본래 지방 수령은 특별한 사유없이 자기가 담당한 행정 구역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특히 농민에 의해 마을 경계선 밖으로 축출되었을 경우는 수령의 자격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수령에 대한 임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印符를 빼앗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농민들은 이같이 경계밖으로 추방하여 수령의 고을 지배를 부정하려는 것이었다.

 이서들은 농민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한 대상이었다. 이들은 봉기과정에서 수령과 달리 전혀 보호받지 못한 채 농민들에게 공격당하였다. 조세에 대한 투쟁이 전제가 되는 한 실제로 조세를 징수했던 이서들이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래 성주의 예에서 보듯이 이곳에서는 읍폐 12개조가 제기되었는데 대부분 이서들의 수탈내용을 담고 있다(<표 5>).647)망원한국사연구실, 앞의 책, 179쪽.

포 탈 자 포 탈 세 목 및 포 탈 액
배술호 서택현
유영하 배우종
이무미 6,000석을 몰래 획급받아 먹어버림
서택현 江米를 매결당 10두씩 높게 책정하여 잉여미 1,700석을 본읍
의 대동으로서 먹어버림
유영하 結稅를 돈으로 거둘 때 매결당 2냥 7전씩 덧붙여 받아들임
吏校와 各面哨官 각면 초관이 향리로 나가 폐해를 끼침
都書員 災結을 몰래 먹어버림
각면 서원 허위로 수세안을 작성하여 세를 거둠
서리 배창호 直載米 마련시 농간부림
서리 서택현 營需米 마련시 농간부림
서리 배창호 別米 마련시 농간부림
서리 배창호 山米 마련시 농간부림
上·下納을 관장한 서리 大同木을 돈으로 거둘 때 기준가를 높이 책정함
창고지기 환곡 분급시 요호에게 뇌물을 받고 還戶名單에서 빼줌

<표 5>성주의 읍폐 12개조

 이같이 농민들의 공격이 이서들에게 가장 가혹했던 점은 이들이 농민들을 직접 수탈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동헌과 읍내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임, 현임을 불문하고 징세담당자인 이서들의 집을 습격하고 때로는 이들을 처형까지 하였다. 진주목의 이방 金閏斗는 농민들을 피해 도망하였으나 농민들이 끝까지 쫓아가서 체포하여 처형하였다.648)≪晉州民變錄≫本營兵使白樂莘狀啓.

 한편 농민들은 동헌을 습격하여 지배 수탈의 근거이며 봉건적 공권력의 상징물이었던 인신과 병부, 문서를 수거하였고, 허액이 기록된 환곡장부 등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또한 作廳, 刑廳, 軍奴廳 등과 같은 관청건물을 부수고 방화하거나 창고의 公錢을 꺼내가는 등 훨씬 격렬한 행위도 있었다. 특히 초기 발생 지역보다 후기에 발생된 지역의 경우 공격 양상이 더욱 격렬하고 공격대상도 다양화되고 있었다. 이것은 농민들의 실력투쟁이 성과를 이루게 되자 지도부에서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농민항쟁의 공격방향은 국가의 조세수탈과 이에 따른 동헌 관속에 대한 습격뿐만 아니라 향촌 지배자 집단의 불법적 지배에 대해서도 행해졌다.

 진주에서는 馬洞의 營將 鄭南星, 成富人, 靑崗의 崔進士 등이 공격당했는데 이들은 평소 세력을 믿고 院宇를 짓는다고 무절제하게 농민들을 사역하여 원성이 높았던 자들이었다.649)≪壬戌錄≫嶺南, 1쪽.

 대체로 수령과 결탁하여 읍권 장악에 앞장섰던 토호가와 중앙권력에 연결되어 산림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등 무단 지배를 행하였던 士大夫家, 그리고 관주도의 향회에 참석하여 불법 수취를 승인한 鄕員들의 집을 공격하였다. 또한 고리대나 고율의 소작료를 통해 향촌 내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지주, 부민들의 가사도 부수었다. 봉기 당시 농민들은 양반의 衣冠을 갖춘 사람을 보는 대로 구타하였고 습격한 家舍에서 돈과 쌀을 가져갔다.

 부세수탈과 관련된 상인에 대해서도 공격하였다. 진주의 경우 개성상인으로 물건을 팔려고 내려온 자들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이서들과 결탁하여 읍민들을 착취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650)≪晉陽樵變錄≫晉州牧三公兄文狀.

 이와 같이 농민항쟁은 기존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 항쟁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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