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2) 삼정에 대한 대책

(2) 삼정에 대한 대책

 이러한 강경한 탄압을 하면서도 일정하게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삼정 때문에 항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위정자들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두 지역이 아니라 삼남일대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수령의 책임만으로 한정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항쟁을 겪은 강위는 “한 州의 폐단은 수령에게 책임을 묻지만 三路의 폐단은 조정에 실책이 있다”는 주장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666)≪古歡堂收草≫擬三政捄弊策.

 5월 15일 조두순은 “민란의 처리방법은 선무사가 덕의를 선포하여 인심을 기쁘게 한 뒤 계속해서 실질적인 혜택을 베풀어 주어야만 영구히 안정될 것이다”667)≪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5월 15일.고 하여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에서도 항쟁의 중요 원인이 되었던 환곡 폐단에 대한 대책으로서 환곡에 대신하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먼저 각 지역의 감사로 하여금 이 때까지 환곡이 담당하고 있던 재정을 계산하여 앞으로 여기에 대한 대책을 6월까지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중앙의 2품 이상 고관에게도 대책을 제시하도록 하였다.668)≪承政院日記≫2650책, 철종 13년 4월 15일·2652책, 철종 13년 6월 12일.

 특히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가 진주목의 포흠을 조사한<査逋狀啓>와 환곡을 해결하는 방안을 담은<講求方略釐整還餉積弊疏>를 올리면서 대책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경상도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가 경상도의 환폐를 이정하기 위하여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고 대책을 마련하여 먼저 한 도에서 시행하고 나중에 전국으로 확대하자는 보고를 하여,669)≪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5월 22일. 그 뒤 이정 방향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왕은 농민항쟁을 진압하려면 먼저 폐단을 없애고 그 다음에 주모자를 처벌해야 하는데 항쟁민들이 모두 폐단의 혁파를 주장한다는 점과 그것이 모두 삼정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이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670)≪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5월 25일. 따라서 왕은 별도의 기구를 만들고 삼정을 개혁하는 방안을 각 읍까지 물어서 6월내로 보고하도록 하였고 그 다음날 즉시 三政釐整廳이 만들어졌다.671)≪承政院日記≫2651책, 철종 13년 5월 26일.

 조정에서는 6월 10일 삼정책문의 방침이 공포되었다. 왕은 삼정구폐의 방략을 강구하는 것은 국가의 대경장에 속하는 것이므로 여론을 넓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으로부터 試策의 형식으로써 의견을 받아들일 것을 밝혔다. 그리고 시책에 나오지 못한 지방인사의 의견을 듣기 위해 策題를 전국에 보내어 지방민으로 하여금 방략을 모아서 거두도록 하였다.672)金容燮,<哲宗朝의 應旨三政疏와 三政釐整策>(≪韓國近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75).

 여기에 호응하여 견해를 밝힌 자가 수백 명에 달했는데 이를 기초로 하여 윤8월 7일 삼정이정절목을 만들었으며 다시 논란을 거친 뒤 윤8월 19일 반포되었다. 이정책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673)≪壬戌錄≫<釐整廳謄錄>윤 8월 7일 330쪽.

 먼저 田政에서는 전답에서 과외로 거두어들이는 것과, 토지 이외의 땅이나 전택에 마구 침탈하는 문제를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전자의 경우는 국세에 해당되는 전세, 대동, 삼수미 등 三稅 외에 토지에서 과외징렴하는 것을 없앨 것, 현물이 아니라 돈으로 거두면서 생기는 防結이나 都結取剩같은 방식을 없앨 것, 혹 作錢하는 경우에도 時價가 아닌 詳定式例로 할 것 등이다. 후자는 개간지를 입안의 명목으로 빼앗는 것, 제언 안을 함부로 경작하는 것, 포구나 제언 축동 등에 사사로이 세목을 두는 것 등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전정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본다면 국가에서 설치한 제도를 유지한 채 명목외 징수를 금지하고 수세상의 폐단을 제거하는 방향이었다.

 軍政에서는 軍丁 가운데 도피하거나 읍에서 사사로이 설치한 헐역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원액이 줄어들고 남은 사람들에게 무겁게 매겨지는 문제를 들었다. 연한에 맞춰 징수할 것, 읍에서 만든 募入軍官을 없앨 것, 校院의 保率이나 각 기관의 계방을 혁파하고 유학을 모칭하여 탈역하는 것을 방지할 것, 각 군현의 군액을 조정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만 소극적이나마 洞布制를 시행해도 좋다고 거론하고 있다.

 還政에서는 장부에도 없으면서 백징하는 것이 가장 큰 폐단이라고 하면서도, 이를 탕감하더라도 남은 곡물에 의해 폐단이 여전하므로 社倉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환곡을 담당하는 재정은 토지에 부과하는 이른바 罷還歸結하도록 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환곡을 폐지하고 환곡이 담당하던 재정은 8도의 전답에 결당 2냥씩을 거두어서 마련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곡식은 돈으로 계산하여 거두어서 3년 동안 곡물을 만들어서 150만 석을 恒留穀으로 하여 국가의 예비곡으로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보듯이 이정책에서 새로운 제도로서 제기된 것은 환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하였던 漁鹽船稅가 給代로 사용되지 못하였고, 궁방전 등에 대해 결렴을 부과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還穀耗條 대신 이용될 財用이 토지를 대상으로 부담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존의 부세 수취 구조의 전면적인 개혁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상납세액에 따른 부가세가 없어지기 어려웠다. 결국 鄭元容이 지적하였듯이 토지에 대한 별도의 부담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시행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