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1) 변란과 민란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을 둘러싼 제반 갈등이 심화되는 데 짝하여 민중운동이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후반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조선사회의 해체와 갈등이 한층 급격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민중운동도 한층 다양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다.

 민중운동은 투쟁주체나 투쟁공간, 투쟁구호, 투쟁형태 등에 따라 몇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향촌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움직임만 하여도 가장 초보적인 것으로 일종의 反官的 反租稅 저항의 성격을 띠는 ‘流亡’으로부터 조세 拒納(抗稅)이 있고, 反地主的 성격을 띠는 지대거납(抗租) 등이 있다. 유망이나 항세, 지대거납 등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개별호구 단위로 이루어졌다. 집단적인 저항으로는 고을 단위의 민인들이 모여 그들이 수령에게 직접 민원을 호소하는 呈訴(等訴), 나아가 민인들이 파괴행위를 수반하며 吏胥輩와 수령을 직접 징치하고 邑弊民瘼을 자신들의 손으로 바로잡고자 한 ‘민란’ 등이 있었다. ‘민란의 시대’라고도 불리는 19세기의 민중운동을 대표하는 ‘민란’은 1862년 농민항쟁의 폭발 이후 대원군 집권기에는 상대적으로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1880년대 이후 다시 빈발하기 시작하여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또 억압과 수탈에 견디다 못한 몰락농민이나 일부의 ‘저항적 지식인’이 무장집단화하여 지배층을 공격한 明火賊의 활동, 그리고 도시하층민의 저항도 광의의 의미에서는 민중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명화적은 조선왕조 전시기에 걸쳐 특히 흉년이 들 때면 빈발하였지만, 1862년 농민항쟁을 겪은 이후에는 더욱 활발해져 항상화, 광역화하게 된다.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함께 도시화가 진행되고 도시하층민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크고 작은 집단적 저항운동도 가시화하였다. 또 일부의 ‘저항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기도한 각종 ‘變亂’ 역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민중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변란은 그 이전 시기에도 없지 않았지만, 19세기, 특히 186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빈발하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光陽亂과 李弼濟亂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 19세기의 민중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난리에는 兵亂과 民亂이 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689)≪駐韓日本公使館記錄≫(國史編纂委員會, 1986) 1, 28쪽. 일반적인 민란과 兵隊를 동원하여 일으키는 변란(兵亂)을 들 수 있다. 민란과 변란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난다. 民擾라고도 하던 민란은 대체로 ①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그 속에서 생산활동이나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나가던 사람들이, ② 發通聚會, 呈訴의 과정을 거치면서 격화하여 봉기하는 것으로 일종의 ‘공동체적 강제’에 의해 주민들을 동원하지만, ③ 조직적으로 무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④ 투쟁공간이나 지도부 및 참가층의 구성면에서 고을 단위에 국한된 지역적 제한성을 보이고, ⑤ 투쟁구호도 대체로 특정 고을의 부세수취와 관련한 부당함을 반대하는 고을 단위의 반부패·반불법 투쟁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⑥ 봉기농민들이 근본적으로 勤王主義的 의식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각지의 민란에서 파괴와 폭력이 수반되었고 吏胥輩들을 살해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국왕을 대신하여 牧民의 책임을 맡고 있던 수령에 대한 심한 공격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법적 수탈이 아무리 극심했을지라도 수령에 대해서는 구타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⑦ 그러므로 투쟁목표도 궁극적으로는 각종 政令과 부세수취 등을 ‘國法’ 내지 ‘王法’대로 실시하라는 데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守令이나 吏胥輩의 부정부패를 징치하고, 읍폐민막을 뜯어고치기 위해 일시적으로 읍권을 장악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민란에 대해서는 지배층에서도 “백성들은 모두 덕을 생각하고 의리를 두려워하니 반드시 부득이 해서 일으킨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봉기농민들도 “감히 관리를 죽이거나 城池를 약탈하지는 않고 오직 깃대를 세우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국왕의 회유가 있으면 곧바로 평정”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때문에 고종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에서도 민란을 예사로운 일로 여기기조차 하였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민인들도 민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게 되었다.690)黃玹,≪梧下記聞≫首筆 및≪梅泉野錄≫甲午以前.
≪日省錄≫고종 30년 11월 13일.

 한편 ‘변란’은 대체로 ① 향촌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訓長, 醫員, 地師 등을 생업으로 삼아 각지를 편력하던 소외되고 가난한 寒儒·貧士 가운데 일부(‘저항적 지식인’)가, ② 빈민, 유랑민 등을 동원하여 일으키는 것으로 이들을 동원하기 위해 金品을 지불하는 등 대가를 제공하며, ③ 대체로 조직적인 무장을 수반하는 병란의 형태를 띤다. 또 민란과 달리 ④ 참여층, 특히 지도부는 특정 고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각지의 인물들로 구성되고, 고을 단위를 벗어난 여러 지역간의 연계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⑤ 투쟁구호도 邑弊의 矯捄나 이서배의 징치보다는 末世의 조짐을 강조하면서 왕조의 타도와 ‘濟世安民’의 포괄적 구호를 내건 점에서 정치적 성향이 강하였다. ⑥ 또 鄭鑑錄류의 易姓革命思想을 이념적 무기로 왕조의 전복을 의도하였던 만큼 이서배는 물론 수령을 살해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며, ⑦ 궁극적인 목표는 조선왕조의 전복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의도에서 알 수 있듯이 왕조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변란에 대해서는 정부나 민인들도 민란과 구분하여 인식하였다. 철종 14년(1863) 10월에 체포된 張基衝사건의 공초기록에는 “이것은 吏民들의 是非에 불과 하며 난리가 아니다”는 말이 나온다.691)≪捕盜廳謄錄≫(保景文化社 影印本, 1985) 중, 亂言告發, 540쪽. 이민들간의 시비인 일반적인 민란과 그것과 차원을 달리하는 난리를 구분하고 있다. 또 1894년 정월에 全琫準이 일으킨 고부민란에서도 “민요가 越境을 하면 반란의 稱을 받는다”는692)張奉善,<全琫準實記>(≪井邑郡誌≫, 1936;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편,≪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1, 여강출판사, 1991, 353쪽). 표현이 있다. 공간적으로 고을 단위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내용상으로는 이민들간의 시비인 민요=민란과 그 범위를 벗어나는 반란을 구분하여 인식하였던 것이다. 정부에서도 이필제란이나 광양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민란과 달리 ‘稱兵騷亂’, ‘賊變’, ‘變亂’, ‘謀逆’, ‘土寇의 亂’ 등으로 규정하였고, 변란의 주모자들도 스스로의 행동을 ‘변란’이나 ‘作變’, ‘兵亂’, ‘謀逆’ 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민중운동의 전개양상을 조직과 이념, 투쟁의 목표 혹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때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민중운동인 1862년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전쟁 사이에는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보인다. 우선 조직의 측면을 보면 동학농민전쟁에서는 1862년 농민항쟁에서 나타난 운동의 고립성, 분산성을 극복한 조직적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 두번째로 투쟁의 목표 역시 농민전쟁에서는 농민항쟁과 달리 고을 단위의 국지성을 벗어나 중앙권력의 타도와 조선사회 전반에 걸친 모순의 척결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또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이념의 측면이다. 민란의 요구사항은 ‘반봉건적’ 측면만 담고 있었지만, 동학농민전쟁에서는 초기부터 斥倭·斥洋이라는 반외세의 구호가 반봉건적인 요구와 함께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배경이나 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첫째, 조선사회의 모순을 양적, 질적으로 증폭시킨 객관적 조건, 특히 개항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일련의 정치적 격변, 둘째, 민중운동 자체의 주체적 역량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두번 째 측면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바로 변란이다.693)19세기 후반의 변란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金義煥,<辛未年(1871) 李弼濟亂>(≪傳統時代의 民衆運動≫下, 풀빛, 1981).
朴廣成,<高宗代의 民亂硏究>(≪傳統時代의 民衆運動≫下, 풀빛, 1981).
朴孟洙,<海月 崔時亨의 初期行蹟과 思想>(≪淸溪史學≫3, 1986).
尹大遠,<李弼濟亂의 硏究>(≪韓國史論≫16, 서울大, 1987).
張泳敏,<1871年 寧海 東學亂 硏究>(≪韓國學報≫47, 一志社, 1987).
우 윤,<19세기 민중운동과 민중사상>(≪역사비평≫1988년 봄호).
朴孟洙,<嶠南公蹟 解題>(≪韓國史學≫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9).
鶴園裕,<朝鮮後期 民衆運動の二三の特質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27, 1990).
배항섭,<19세기 후반 ‘변란’의 추이와 성격>(≪1894년 농민전쟁연구≫2, 역사비평사, 1992).
앞서 언급하였듯이 ‘변란’은 조직과 이념, 그리고 투쟁의 목표 내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민란과는 확연히 구별되었고, 동학농민전쟁 단계에서 획득하게 되는 일부의 요소를 외형적으로는 이미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변란에서는 이미 일찍부터 반외세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된다. 1876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근대민족운동에는 반봉건에 더하여 반외세를 동시에 함축하는 논리가 요구되었지만,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민란은 반봉건에 일면적으로 경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란은 반봉건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던 근대민족운동을 전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항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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