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조선 후기에 들어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신분질서가 점차 무너져간 것에 더하여 소수의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권의 성립과 賣官賣職의 성행은 양반층 내부의 계층분화 양상을 더욱 현저하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양반은 정권에서 소외되었으며, 과장의 문란과 매관매직의 성행은 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관직진출을 봉쇄함으로써 정권에서 소외된 양반들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층은 향촌사회에서나마 나름대로의 지위를 누리며 지낼 수 있었지만, 한유·빈사의 가난한 층들은 사정이 달랐다.

 관직진출이 좌절되고 경제적 배경도 없던 양반 가운데는 경제적으로 오히려 평민들보다 못한 부류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과거에 家運을 걸고 있던 한유·빈사들은 생활을 위해 일반 양인이나 천민과 마찬가지로 農·工·商의 생업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는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 훈장, 의원, 지사 등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심지어는 소상인이나 소작농 혹은 머슴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들이 마주친 현실은 사회적 냉대와 수모였다. 상민들에게조차 모욕을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 돈많은 상민에게 通婚을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빈사·한유들 가운데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나가는 부류가 있었다. 그것은 이들이 주요 작가층을 이루었던 이 시기의 문학작품 속에도 잘 드러나 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품화가 이루어진 문학작품의 주요 작가층은 이른바 ‘몰락양반’들이었다.694)이명학,<漢文短篇作家의 硏究>(≪李朝後期漢文學의 再照明≫, 창작과비평사, 1983). 작품에는 능력은 있으나 문란한 과거제도 등으로 인하여 뜻을 펴지 못하던 가난하고 소외된 한유·빈사들이 지배층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사정과 그들이 가진 의식세계의 일단이 잘 드러나 있다.

 이제 이들의 눈에는 그 동안 그냥 지나쳐왔던 현실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소수의 지주가 토지를 독점하고 빈농들에게는 소작할 토지마져 돌아오지 않는 지주제의 모순, 그리고 수령과 이서배들에 의한 중간수탈이 구조화한 부세수취제도의 불합리성 등이 직접적인 이해관계로 다가왔다.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횡행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유민화하는 현실도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이들 중에는 이러한 현실을 바꾸어 보려는 부류가 나타났다. 이러한 부류는 이미 이전부터도 존재했으나, 19세기 후반으로 오면 사회적 모순이 더욱 심화되면서 한층 많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은 향촌사회에 남아 읍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읍폐를 호소하는 等狀 등의 문건을 대필해 주기도 했고, 혹은 明火賊에 가담하여 지배층에 맞서기도 했다. 또 훈장, 지관, 의원 등을 생업으로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동류의식을 형성해나가며 각종의 변란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진주에서 항쟁을 주도한 柳繼春은 ‘邑弊·民瘼을 늘 입에 올리고’, ‘營訴, 邑訴를 생애로 삼은’ 인물이었다. 함평에서 항쟁을 주도한 鄭翰淳은 함평의 폐막을 고치기 위해 중앙과 감영에 정소를 하거나 심지어 상경하여 격쟁, 거화까지 한 경력이 있었다. 고종 5년(1868) 칠원에서 민란을 주도한 黃上基 역시 영소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가산을 털기도 한 인물이었다.695)배항섭, 앞의 글, 267∼268쪽 참조. 이들을 통해 한유·빈사 가운데는 향촌사회에 남아 촌락차원의 민원 해결에 앞장서 온 부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유·빈사 가운데는 향촌사회에 남아 모순에 맞서 싸우던 자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그것이 여의치 않자 촌락을 떠나 명화적이 되거나 훈장, 의원 등 지식을 활용하여 각지를 떠돌다 동지를 규합하여 변란을 모의하는 부류도 있었다. 철종 14년 7월부터 고종 원년 10월까지 경기, 충청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잡힌 명화적 두목 南學九는 儒業에 종사하던 인물이었으나, 자기가 살던 충청도 대흥읍의 환폐문제를 바로잡고자 擊錚을 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명화적에 가담하였다.696)≪捕盜廳謄錄≫중, 갑자 10월 4일, 京畿持兵火賊 李永順供, 581쪽. 철종 2년(1851)에 구월산 일대의 세력을 규합하여 변란을 모의한 蔡喜載 역시 중화, 재령, 문화 등지를 옮겨 살며 儒業에 종사하던 자였다. 당시 조선의 어느 고을이나 그러하듯 문화에도 삼정이 문란했으며, 점차 결폐·환폐·군폐 등 허다한 폐단이 더욱 심해지자 헌종 14년(1848) 5월 폐막을 호소하려고 擊鼓차 서울에 올라와 대궐로 들어가려다 守門軍에게 잡혀 오히려 고생만하고 쫒겨난 뒤 변란에 가담하였다.697)≪捕盜廳謄錄≫하, 신해 9월, 海西獄事, 198쪽.

 이와 같이 향촌사회에 남아 모순 투성이의 현실을 개선해 보려고 노력한 이들이 그러한 노력조차 거부당했을 때 현실사회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야 할 부정의 대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의에 빠져 나라를 원망하며 난을 일으키려고 음모하는 흉역배”등으로 표현되기도 한698)丁若鏞,≪牧民心書≫兵典. 이러한 부류를 ‘저항적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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