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2) 변란발생의 배경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조선사회가 서구세력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는 것은 개항 이후이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 異樣船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양이의 침공에 대한 위기의식도 고조되었다. 특히 철종 11년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소식은 조선사회에 엄청난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왔다. 조정에서는 천하를 장악한 중국조차 당하지 못한 양이의 무력에 전율하면서 조선에 곧 닥칠 위험을 걱정하였다. 민간에서도 곧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와 난리가 일어나리라는 소문과 함께 보따리를 싸들고 산곡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고, 심지어 서둘러 성경을 구입하거나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자가 속출했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부터는 이 같은 위기의식이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났다. 1866년 丙寅洋擾와 1871년 辛未洋擾가 그것이다. 서양세력의 침공을 구체적인 현실로 맞아 인심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따라 양이의 침공이라는 대외적 위기의식은 절정에 달했으며 異端思想 역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것은 이 시기에 집중되는 변란의 빈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전부터도 대표적인 민간신앙으로서 민중세계의 깊은 곳에 잠류하며 크고 작은 변란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온 이단사상이 민간의 의식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이단사상은 곧 조선왕조의 지배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에 따라 통치자들은 이단사상의 만연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집요한 탄압을 가했다. 그러나 이단사상은 날로 확산되어 갔고, 고조되는 대외적인 위기의식은 다양한 이단사상의 만연을 초래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민간에 널리 유포된 이단사상으로는 철종 11년(1860)에 창시된 東學과 鄭鑑錄699)이 시기에 유포된 秘記는 매우 다양하였지만, 이 글에서는 정감록으로 통칭하기로 한다.을 들 수 있다. 동학은 조선왕조가 직면한 내부적 모순과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불안의 산물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었다. 특히 철종 11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침략을 비롯한 서양세력의 침공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경신년(1860)에 전해온 세상의 이야기는 요망한 서양의 적이 중국을 범하여”라는<권학가>의 기사나, “서양은 싸워서 승리를 취하니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천하를 진멸하니 역시 脣亡之歎이 아닐 수 없다. 輔國安民의 계책을 장차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포덕문>의 기사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동학 역시 주자학적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심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동학이 처음 알려졌을 때 지배층에서는 동학을 혹은 천주교가 이름을 달리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서학과는 달리 지식인이 물들 염려가 없는 저급한 이단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이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가자 그 조직력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여 결국 고종 원년(1864) 3월에는 左道亂正의 죄목으로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동학은 정부의 끈질긴 탄압을 받으면서도 전국적으로 그 세를 넓혀 갔다.

 동학이 이 시기에 창시된 것이라면 정감록은 이전부터 민간에 유포되어 있다가 이 시기에 들어 급격히 확산되었다. 변란의 이념적 배경이 된 것이 바로 정감록이다. 정감록은 같은 부류의 무수한 비기류 가운데 하나로 대체로 임진왜란을 겪은 후인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李沁과 鄭鑑이 대화를 통해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평양과 송도, 한양, 그리고 계룡산의 순서로 운수를 점치고 아울러 피난처로 十勝地를 논하여 이씨 조선의 국운을 예언, 圖讖하여 이씨 조선의 멸망과 정씨 조선의 대두를 역성혁명사상에 의해 예언한 것을 기록한 형태를 취한다.700)申一澈,<鄭鑑錄>(≪韓國의 名著≫, 삼성출판사, 1970). 이러한 정감록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배경에는 동학과 마찬가지로 조선사회 내부의 문란과 불안이라는 대내적 상황과 함께 철종 11년(1860)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등 서양세력의 침공이라는 대외적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감록은 역성혁명사상을 바탕으로 왕조의 멸망을 예언함과 동시에 戰亂과 자연재해, 疫病 등에 대한 공포감과 결부된 亂世觀이나 末世觀을 기조로 하였다. 또한 거의 예외 없이 정감록에는 그러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제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말하자면 서양의 침공이라는 대외적 위기의식이나 사회적 문란, 잦은 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에 따른 불안감, 공포감이 왕조에 대한 부정과 이상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나 정감록이 만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감록류의 이단사상이 만연하자 정부에서는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 탄압하였다. 그러나 정감록은 이미 지배층 내부에까지 퍼질 정도로 그 영향이 사회 전체에 확산되며,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사회적 냉대와 부패한 현실 속에서 향촌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의원, 훈장, 지관 등을 생계로 삼아 각처를 떠돌던 빈사·한유들의 현실사회에 대한 불만이 이러한 이단사상과 결합하여 나타난 것이 변란이었다. 이단사상이 가장 쉽게 침투할 수 있는 부류도 바로 이들과 같이 토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유동성을 가진 층이었다. 좌절과 고통만 안겨주는 이씨 조선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생각을 품게되었을 때 정감록류의 이단사상은 이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이념적 무기였다. 바로 이씨 조선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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