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3) 변란의 추이
  • (5) 기타

(5) 기타

 철종 14년(1863)에는 서울에서 張基衝이 “호남에서 민요를 일으킨 鄭翰淳이 필경 장구대진할 것이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로 체포된 일이 있으며,735)≪捕盜廳謄錄≫중, 계해 10월 亂言告發. 고종 5년(1868) 8월에는 상주에 사는 李紀輔라는 자가 정감록류의 참서를 이용하여 인심을 현혹시킨 죄로 체포되었다. 그가 인심을 현혹한 내용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참서 가운데≪開國功勳錄≫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거기에는 새로운 나라의 영상과 판서, 경관은 누가 된다는 등 卿相으로부터 필부에 이르기까지 미리 정해두었다 한다.736)朴成壽 註解,≪渚上日月≫상, 124쪽.

 고종 5년에는 평생토록 관직을 원했으나 빈곤하여 과거장에도 한번 들어가지 못한 것을 항상 통탄하던 鄭德基가 삭녕에서 영남과 호남, 충청도의 세력을 모아 변란을 기도했다. 정덕기는 병인양요 때 모두 도망가기에 바빠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음을 통탄하던 차에 북도의 포수 2천 명이 상경한다는 소문을 듣고 洋船을 물리치기 위해 智謀之士를 모아 의병을 일으키려 했다고 진술했다. 전주의 윤내형 등과 동모한 이들은 정덕기의 등에는 七星斑點이 있고 손바닥에는 ‘王’字 무늬가 있다 하여 정덕기를 鄭眞人으로 내세웠다.737)≪捕盜廳謄錄≫하, 무진 6월 黃載斗智異山謀逆告變, 511·513쪽. 또≪九星秘訣≫·≪陰符經≫등을 가지고 다니며 “奇術이 있어서 능히 평지를 大海로 만들고 오백 명의 神兵을 부릴 수 있으니 조만간 ‘南中’에서 起兵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한편, “후세에는 延日 鄭氏가 권력을 잡게 된다”는 것과 “洋船을 물리치기 위한 義旅를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동모자를 규합하기 위해 정덕기는 영남, 尹乃亨은 호남을 담당하기로 했다. 모의에 동참한 黃載斗는 지리산 수문동 장처사가 자신의 스승이며, 하동, 진주 및 공충도의 智謀之士가 모두 자기 수하에 있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결국 황재두의 고발로 발각되었다.738)≪推案及鞫案≫303책, 무진 謀反大逆罪人德基等鞫案.
≪捕盜廳謄錄≫하, 무진 6월 黃載斗智異山謀逆告變, 511·514·521쪽

 고종 8년(1871)에는 고종 5년부터 울릉도에 들어가 살던 姜斌煥이 재물과 지모가 있는 자를 얻기 위해 육지로 나온 후 婢夫 李轍根을 끌어들여 해서의 원납전을 강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강빈환은 “울릉도에는 전지가 비옥하고 인가가 많으니 함께 이 섬으로 가면 자연 부귀할 것이며, 그대는 반드시 島主가 될 것이다”는 말로 이철근을 포섭하였다.739)≪捕盜廳謄錄≫중, 신미 7월 上納色吏刺殺及逆謀事·하, 신미 9월 姜斌煥强盜事. 고종 9년에는 수 차례의 원납전으로 가산을 탕진한 吳潤根이 金應龍의 堪輿之術을 빌려 ‘至尊’을 음해하려던 사건이 발각된 바 있다.740)≪推案及鞫案≫308책, 임신 逆賊應龍潤根等鞫案.
≪捕盜廳謄錄≫중, 임신 4월 海州咀呪及謀逆事.

 한편 이러한 이단사상의 만연은 19세기 들어 조청 양국 정부의 당면 문제로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던 犯越 문제에까지 연결되었다. 고종 9년에 후창군수의 밀명을 받고 崔宗範 등 探客 3명이 압록강 건너편 封禁地帶 이주민의 생활을 조사보고한≪江北日記≫에 따르면 조선에서 이단사상의 만연과 변란의 발생이 절정에 달했던 고종 6년에 범월자가 가장 많았다.741)≪江北日記≫에 대해서는 柳承宙,<朝鮮後期 西間島移住民에 대한 一考察-≪江北日記≫의 解題에 붙여>(≪亞細亞硏究≫59, 1978)에 상세한 해제와 함께 원문이 실려 있다. 그것은 고종 원년, 2년 무렵부터 자성군에서 유포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서북 양도, 심지어는 서울에까지 전파된 ‘僞書’에 속은 사람들이 대거 월경하였기 때문이다. ‘위서’의 작자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무산 사람인 金有司로 고종 원년, 2년 경에 월경하였다가 다시 건너오면서 이 위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위서의 내용은 대략 압록강 건너 어딘가에 羅善洞, 楊花坪, 玉鷄村, 鐵鋪城 등 별세계가 있고, 그 곳에 채선생, 곽장군, 갈처사, 김진사 등 영웅호걸이 살며 민인을 모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土亭家藏訣≫·≪慶州李先生家藏訣≫과 관계가 있거나 유사한 것으로 추측된다.742)≪土亭家藏訣≫과≪慶州李先生家藏訣≫에는 “곽장군이 요동군사를 이끌고 方·杜장수와 함께 왜와 서남쪽 오랑캐를 멸하네, 청나라를 쫒고 명나라를 도와서 정씨를 붙들고 이씨를 습격한다”, “이 때 곽장군이 백두산에서 나와서 烏首德으로부터 요동에 들어가 古月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칼을 든 채 오가니 고월반도 동쪽 백성들의 동요를 진정시킨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곽장군이라는 인물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일치하고 있다(李民樹 譯註,≪鄭鑑錄≫, 弘新文化社, 1985). 위서의 내용을 믿고 월경한 사람의 대부분은 지배층의 수탈과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빈농들이었지만, 고종 9년(1872)에 수십 명의 가족과 함께 300여 명의 인정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 홍진사 같은 이도 있어서 이단사상의 광범한 침투를 엿볼 수 있다.

 고종 14년에는 문경에 사는 李秉淵이 진주의 妖僧 李導賢과 함께 문경과 대관령 등지를 옮겨 다니며 변란을 모의하다 체포되었다.743)≪推案及鞫案≫315책, 정축 罪人秉淵啓豊等鞫案. 이들은 고종 2년 무렵부터 대관령에 근거지를 가지고 다수의 의복과 창검 등을 갖추고 있었다. 병인양요 후에는 원주, 횡성 일대에서 20여 호가 난리를 피해 몰려와 살았다 한다. 이병연은 埋六戊法이라는 술수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만약 洋夷와 倭가 쳐들어 온다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義兵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지를 포섭하였다. 이병연은 1876년 강화도조약 때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자칭 忠義將이라 하였고, 그 밖에 호조판서와 동일한 직위인 掌庫官과 中軍監이라는 직책을 두고 그러한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李啓豊과 李英俊 등을 끌어들였다.

 또 고종 19년에는 훈학 등을 업으로 10여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던 趙秉天이 200냥의 돈으로 頑悖之類 4, 50여 명을 모집하여 서울에서 변란을 일으키려 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744)≪捕盜廳謄錄≫하, 임오 4월 伐倭擧兵謀逆事. 조병천은 陸軍都督이 되어 장차 倭를 정벌하려 한다거나, 자기에게는 呼風喚雨하는 술수가 있다는 말로 동모자를 끌어들였다. 조병천은 이미 고종 9년에도 중국에 침입한 영국을 토벌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형을 받은 경험이 있는 자이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자신이 머무르며 훈장노릇을 하고 있던 집주인인 丁大璡으로부터 마련하였다. 조병천은 거사에 성공하면 정대진 부자를 수용하겠다는 말로 200냥을 얻어내었다. 이들은 4월 7일 모군한 병력을 이끌고 종로로 가서 장군이 들어온다고 고함을 치고, 그래도 안되면 眞主人이 온다는 말을 거리에 퍼뜨리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대진이 내놓은 돈 200냥으로 모군한 27명이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군을 담당했던 전만근이 고발함으로써 발각당했다.

 고종 27년(1890)에는 李瑾應·尹台善 등이 남북산에서 방포하여 궁궐로 쳐들어가는 변란을 기도하다가 탄로나기도 했다.745)≪捕盜廳謄錄≫하, 경인 8월 諺書告變, 19∼28쪽. 이근응은 30여년 동안이나 때를 만나지 못해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거사를 도모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고종 24년 무렵부터 “러시아에 智人을 파견하여 조선과 밀착시키고 그에 따라 조선과 청국 사이에 틈이 생기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하려는 계획을 꾸며왔다. 또 “黨賊이 크게 일어나는 것은 훈련도감의 餘黨”이니 각처에 산재하는 훈국군을 모아 민요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변란은 대외적 위기위식이 고양된 병인, 신미년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되다가 정작 외세의 침략이 현실화한 개항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뜸해지기도 하나 동학농민전쟁 시기까지도 변란세력의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1893년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에는 吳泰源·金炳一·吳啓源 등이 “鷄龍山에서 開國하라는 天命을 받았다”하여 영상, 좌상, 우상 자리를 미리 정해두고, “먼저 滅洋倭한 후에 무리를 불러모아 大小李閔을 盡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이의 실현을 위해 “해마다 상경하여 시세의 추이를 엿보았으며, 갑신정변 때도 四賊과 왕왕 상종을 하였으며, 仁源·愚葉·水演 등이 금구원평의 都會에 참여하였고, 亘葉을 보은도회에 투입하였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보은집회에는 ‘南朝鮮’을 건설하려는 세력도 혼입해 있었고, 농민전쟁 기간 중에도 “東徒大將軍은 이씨로 14세이나 천문과 지리에 능통하고 남조선에서 나왔는데, 정병 10만 명이 뒤따라 왔다”는 소문이 나기도 하였다. 황해도에서는 농민전쟁 직후에도 이른바 ‘東學餘黨’이 중심이 되어 척왜양을 내걸고 변란을 기도한 바 있다. 이들은 淸國에 가서 馬大人으로부터 鎭東倡義士 印信과 職帖을 받아왔으며, 우선 군사를 이끌고 군수와 관속을 屠戮한 후 軍器를 탈취하여 해주로 가서 정월 초 3일에 각 읍이 大都會하여 해주부와 각 읍을 도륙하면 마대인이 병사를 거느리고 올 터이니 합세하여 京城으로 직향하여 倭洋을 토멸하고 각 대신을 誅滅한 후 海島中의 實鄭이 즉위할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며 동모자를 규합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빈발한 전형적인 변란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746)배항섭,<1890년대 초반 민중의 동향과 고부민란>(≪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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