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민란에 대해서는 지배층도 탐묵한 지방관이나 이서배들의 수탈에 견디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일으킨 소요 정도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봉기농민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우리 先代의 성스러운 임금께서 키우고 보살펴온 赤子’라는 적자관이 적용되고 있었다.747)물론 1862년 농민항쟁처럼 민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대되어갈 경우에는 봉기농민에 대한 정부의 시각도 점차 ‘亂民’, ‘化外必誅之賊’ 등으로 강경하게 변해갔다(망원한국사연구실,≪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8, 338쪽). 그런 만큼 민란의 전개방식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였고, 주모자들과 참가자들도 민란이 일어난 고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읍폐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을 함께 논의하자는 통문을 작성하고, 이것을 면리조직을 이용하여 공공연하게 전파하여 읍민들을 모은 다음 대체로 향회 내지는 그와 유사한 회의를 거쳐 요구조건을 마련, 그것을 일단 지방관에게 등소의 형식으로 제출하였다. 봉기가 일어나는 것은 그러한 等訴가 묵살되고, 나아가 주모자들이 부당한 처벌을 받게되는 등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다음이었다. 운동양태는 농간을 일삼던 吏胥輩나 악질적인 지주의 집을 불태우고 파괴하거나, 심한 경우 이서배를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또 관아를 점령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는 등 부당하게 운용되던 부세제도의 시정을 시도하며 독자적으로 향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지만, 수령에 대해서는 아무리 악질이었어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지 못하고 고을의 경계 밖으로 쫓아내는 정도의 보복을 하였다.

 ‘변란’은 이와 달랐다. 우선 주모자들이 향촌사회에 거주하거나 직접적인 생산활동에 종사하기 보다는 지관, 의원, 약상, 훈학 등 떠돌이 생활을 하던 寒儒·貧士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고종 6년(1869) 광양란을 주도한 민회행은 20년 이상 영호남 지역을 편행하며 동지를 모았고, 철종 2년(1851), 철종 3년에 연속적으로 변란을 기도한 유흥렴·김수정 역시 오랫동안 각지를 떠돌았다. 고종 14년에 변란을 모의한 장혁진·최봉주는 이미 십수년 전에 유배된 몸으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포섭했고, 이필제도 철종 10년에 유배당한 이후 10여 년간 각지를 떠돌다가 고종 6년 이후 일련의 변란을 주도했으며, 고종 19년 ‘伐倭擧義’를 주장하며 변란을 기도한 조병천도 10여 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변란은 조선왕조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 명백한 ‘역모’였고, 발각되었을 경우 그에 준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또 주모자들이 향촌사회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참여층의 동원에도 공동체를 매개로 하는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변란은 민란과 달리 준비과정이나 모의과정이 비밀결사적인 형태로 매우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이들의 변란모의는 각지를 편력하는 과정에서 의기투합한 동지를 만나서면서부터 시작된다. 변란의 핵심적인 인물은 대개 1, 2명 내지 3, 4명 정도였으며, 이들은 길게는 몇 년, 짧아도 몇 개월여 전부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를 편행하던 과정에서 알게된 인물을 찾아가거나, 핵심 인물이 적당한 대상에게 의식적으로 접근하여 거사계획을 털어 놓는 방식으로 동모자를 포섭한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진행되었으나, 동모자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포섭대상자의 고발로 탄로가 나기도 하였다. 일단 동모자의 포섭이 끝나면 지도부가 형성되고 거사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절차를 결정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병력, 군량, 무기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지도부가 나누어 담당하거나, 핵심적인 인물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기도 하였다. 지도부에서 가장 고심한 부분이 바로 자금이었다. 자금은 거사에 필요한 병력의 동원과 병기, 군량의 마련 등 거사준비에 무엇보다 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자금마련은 주모자들 가운데서 염출하거나, 고기잡이나 소금구이 등의 방법으로 자체 조달하기도 했고, 철종 2년의 해서세력의 변란기도나 이필제의 진주거사에서처럼 명화적 활동을 통해 마련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재력가들, 특히 엽관적 성향이나 신분상승 욕구가 강한 재력가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재력을 이용하였다. 재력가에 대한 물색과 접근은 주로 친인척 관계나 평소의 친분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는 본래의 목적을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수 차례의 만남을 통해 의사를 타진해 본 후에는 본래의 목적을 밝히기도 하였지만, 본래의 의도를 숨기고 北伐이나 洋夷를 물리치기 위한 의병을 가탁하는 등 다른 명분을 내세웠다. 본래의 의도를 밝힐 때에는 미리 ‘異人之說’이나 감결류의 참언으로 당사자를 현혹시켰으며, 성공할 때에는 대단한 관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미끼를 내걸었다. 병력동원 역시 친인척이나 평소의 친분을 이용했다. 이 때에도 주로 다른 일을 가장하여 돈을 주고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이인지설이나 참언으로 감복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이필제의 영해란이나 조령작변에서처럼 이미 존재하는 조직적 기반이나 특정한 지역에 이미 팽배해 있던 불만을 이용하기도 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들의 최종 목표는 조선왕조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서울로 직향하여 최종 목표를 단행하기에는 물리적인 역량이 부족했다. 따라서 이들은 일단 특정 고을을 중심으로 거사하여 거기서 역량을 비축한 다음 여세를 몰아 서울로 직향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또 이들은 일단 ‘난리’를 일으키고 격문을 각지에 띄우면 각지에서 합세해 올 것이라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상’을 품고 있었다.748)≪慶尙監營啓錄≫고종 7년 6월 14일 梁永烈供. 물론 이를 위해 영남지역, 호남지역 등을 분담하여 각자 동모자를 규합하는 방법을 채택하기도 하였지만, 제대로 성공한 예는 없었다. 특정 고을을 무대로 한 거사를 일으킬 만한 적정 인원이 동원되면 거사에 착수하였다.

 거사방법에서도 변란은 민란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변란세력은 동원된 자들을 병기로 무장시키고 관아로 쳐들어갔고, 그 시기도 주로 한밤중을 택하였으며, 곧장 수령을 해치려는 행동을 보였다. 민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거사 직후에는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주민들을 안도시키려는 노력에 힘을 기울이면서, 한편으로는 주민들 중 일부를 협박, 회유 등의 방법으로 동원하여 세를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서도 호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받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이들은 주변 지역을 석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울로 직향한다는 원래의 계획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수일 동안 관아를 점령해 있다가 진압 관군이 파견되면 속절없이 도주하는 투기적·모험적 측면이 강하였다.

 한편 19세기 후반의 변란사건에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참가층의 광역성이다. 비록 조직적 결속력은 떨어졌지만, 고을 단위로 고립되어 일어났던 민란과 달리 단위 고을을 벗어난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채희재·유흥렴·김수정·최봉주·장혁진 등이 철종 2년(1851)과 철종 3년, 고종 14년(1877)에 해서지방과 영남, 혹은 영남과 호남지방의 연계를 기도하였고, 고종 6년에서 고종 8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변란을 기도한 ‘이필제란’에도 경상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의 인물이 가담했다.

 이 시기의 변란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동일한 인물에 의해 변란이 연속적으로 모의되었다는 점이다. 이필제는 고종 6년에서 고종 8년에 걸쳐 진천·진주·영해·문경 등지를 편력하며 연속적으로 변란을 기도했고, 유흥렴·김수정이 철종 2년에 구월산, 철종 4년에 서울에서, 최봉주가 철종 4년에 서울, 고종 14년에 전주에서, 장혁진과 이사윤이 고종 9년에 안동, 고종 14년에 전주에서, 민회행이 고종 5년에 강진, 고종 6년에 광양에서 연속적으로 변란을 기도했다. 이러한 모습은 일단 통치질서의 문란과 洋夷의 침공에 대한 위기감으로 이단사상을 수용하는 변란세력이 그만큼 전국적으로 만연해 있었음을 뜻하는 사실로 이해되지만, 변란 주도세력의 사회적 존재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향촌사회를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모의가 탄로나도 쉽사리 체포되지 않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또 다른 변란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변란은 항쟁의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란이 가진 고립, 분산성과 지역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것은 변란의 투쟁목표 역시 읍권의 장악이 아니라 중앙권력의 타도에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전국적인 항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조건을 외형적으로는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변란은 조직적 기반과 관련하여 기본적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직의 결속도가 대단히 취약했다. 변란 지도부는 오랫동안 향촌사회나 생산현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향촌사회의 농민들을 묶어낼 수 있는 어떠한 조직적인 기반도 없었다. 또 지도부와 참가층의 결합이 민란과 달리 목적에 대한 합의나 이해의 일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래의 목적은 숨긴 채 다른 명분을 내걸거나, 자금으로 고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진행과정에서 본래의 의도가 알려졌을 경우 이탈자가 속출하였으며, 관에 고발을 하는 자도 주로 그 중에서 나왔다. 또한 서로 다른 수준에서 끌어들인 참가층간에는 사회경제적 처지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자금확보를 위해 끌어들인 자들은 대체로 현실에 대한 불만과 함께 엽관적 성향이 강한 재산가들이었으며, 병력으로 동원된 계층은 대체로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날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빈민들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변란의 조직적 기반을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고, 대부분의 변란이 거사단계까지도 가지 못하고 도중하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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