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4) 변란의 성격
  • (2) 변란의 이념

(2) 변란의 이념

 변란주도층은 정감록류의 비기와 참언을 이념적 무기로 이용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정감록은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참위서라는 점과 함께 주로 난세관과 말세관이 결부된 전란에 대한 공포감, 그리고 그러한 공포로부터의 도피를 그 사상적 기조로 하였다. 정감록류의 현실도피적인 사상 속에는 조선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이 일정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재물에 인색한 사람은 먼저 집에서 죽고 아무 재주도 없는 선비는 저절로 길에서 죽는다”749)<鄭北窓秘訣>. “부자는 돈이 많으니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감과 같고, 빈자는 재산이 없으니 어디든지 가나니 조금 지각있는 자라야 시국을 보아 행하리라”750)<鑑訣>.라는 구절에서는 지주제의 모순 등에서 초래된 빈부간의 갈등과 부자에 대한 반감 등이 표현되어 있어서 추상적인 차원에서나마 조선사회의 경제적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말세가 오면 아전이 태수를 죽이되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상하의 분별은 없어지고 변은 잇따라 일어나고 마침내 임금은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와 외롭게 될 때에는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751)위와 같음.하여 역시 추상적이나마 신분에 대한 비판과 조선사회의 지배질서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나아가 “사대부는 이익을 탐하고 팔도의 방백과 수령들은 다만 재물이 있음만 알고 백성이 있음은 알지 못한다”거나, “사대부의 집은 人蔘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 집은 利를 탐내다가 망한다” 혹은 “사람들의 마음이 오로지 재물에 있어서 賣文賣利함에 꺼리는 바가 없고 賣官賣爵함이 마치 시장과 같으니 天道가 어찌 부흥할 리가 있겠는가”752)<遊山訣>.라고 하여 탐학과 수탈만 일삼으며 매관매직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 도덕성과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던 지배층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감록이 농민들을 변란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새로운 사회를 주체적으로 열어가는 변혁의 무기가 되기에는 중대한 한계가 있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변혁을 위한 실천적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에 찬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새로운 세상의 숙명적인 도래를 예언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 변혁운동의 동력이 될 농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사회의 모순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의지와 주체적인 실천행위가 결합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감록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감록에 내재한 사상적 기조인 숙명론과 현실도피사상 때문이었다.

 정감록에는 “丙申·丁酉에 흉년이 목숨을 앗아가고 兵亂이 쉴새 없으니 백성들 가운데 반은 살고 반은 죽을 것이다”,753)<南師古秘訣>. 또는 “9년간의 흉년과 7년간의 水災와 3년간의 역질에 열집 중 한집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754)<西溪李先生家藏秘訣>.라고 병란이나 흉년, 疫病 등에 대한 예언과 그에 따른 참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곧 조선왕조의 멸망의 필연성과 그에 이은 새로운 세상의 숙명적인 도래를 예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홉 해 水災와 열두 해 兵亂이 있을 것이니 어떤 사람이 피하겠는가. 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때를 보아 살 것이다”755)<鑑訣>., “후세에 만약 지각있는 자가 십승지에 먼저 들어가면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으리라”라고 하여, 과도기의 참화로부터 살아남아 새로운 세상을 맞기 위해서는 십승지로 도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순에 찬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보다는 그로부터의 도피와 새로운 세상의 도래에 대한 숙명적 기다림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그것을 위해 민인들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사회적 모순이나 전란, 역질, 자연재해 등은 조선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도래할 징험으로만 파악되었다.

 정감록은 이씨왕조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측면에서는 ‘혁명적’이라 할 만하였으나, 새로운 사회는 외적인 계기에 의해 숙명적으로 주어질 뿐 거기에는 어떠한 실천적 의지나 행위도 배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감록에서의 새로운 사회는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숙명적으로 도래되는, 현실적,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저 만큼 멀리 초탈해 있는 관념적, 환상적인 세계일 뿐이었다. 현실사회에 대한 불만이 강했던 만큼 이상사회에 대한 동경 역시 그 만큼 강열했고, 그래서 정감록은 널리 확산될 수 있었지만 거기에는 다가올 새로운 사회상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정감록이 이러한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변란의 이념적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면 변란 주체가 처해 있던 사회경제적 조건, 그리고 그들이 가진 강한 엽관적 성향과 관계가 있다. 변란의 주도층은 특권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신분적, 사회적 속성은 양반이고 지식인이었다. 특히 이들이 처해있는 생활 역시 직접적인 생산자의 그것과 달리 대체로 ‘떠돌이’ 생활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정서와 일반 농민의 그것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그렇다 하여 이들이 농민들이 처한 현실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철종 2년(1851) 구월산 일대를 무대로 변란을 모의한 기덕우는 일찍이 고을의 삼정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擊錚을 한 바 있고, 철종 4년 한양에서 변란을 기도한 최봉주는 민생이 곤궁한 것을 보고 濟世의 뜻을 펴기 위해 변란을 기도하였으며, 고종 6년(1869) 광양란을 주도한 민회행은 진주민란을 본받아 읍폐를 뜯어고치려 했다. 이필제 역시 “세상일이 크게 변하여 생민의 고통이 오늘과 같은 적이 없으므로 濟世安民하려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756)≪錦營啓錄≫(≪各司謄錄≫7, 國史編纂委員會, 1983) 신미 8월 16일 鄭起源供. 또 동모자를 규합할 때도 토호무단 등 사회적 모순을 거론하기도 하였으며, 진주거사에 참여한 정덕기도 민정의 황급함을 보고 만민을 구제할 방략을 도모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변란의 주모자들도 사회현실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식을 토대로 제세안민의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향촌사회의 읍폐교구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변란 지도부는 이미 오랫동안 향촌사회와 생산현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던 자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생산활동이나 생활현장에서 우러나오는 민중들의 정서와 현실적인 요구를 수용할 여지가 협소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변란의 지도부가 가지고 있던 지나치게 강한 엽관적인 성향도 이들이 일반 민인들과 결합하지 못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헌종 10년(1844) 민선용은 죽산의 양반 李鐘樂을 끌어들이며 거사에 성공하면 판서 자리를 약속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도 변란의 주도층은 거사에 성공했을 때에 각기 차지할 관직을 미리 정해놓기도 했다. 철종 2년에 변란을 모의한 유흥렴·채희재·김수정 등은 三公, 六卿을 배정해 두었으며, 철종 4년에도 거사에 성공하면 김수정은 병조판서, 최봉주는 三道統制使를 차지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병력동원을 위해 끌어들인 구월산 호위군 별장 최치각에게도 군량에 필요한 돈 1천 냥을 제공하면 고관자리를 주겠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했다.757)≪捕盜廳謄錄≫하, 신해 9월 海西獄事, 185쪽. 고종 14년(1877)에 滅洋倭를 내세워 변란을 모의한 이병연도 호조판서에 해당하는 掌庫官과 中軍監의 직책을 미리 주며 이계풍과 이영준을 끌어들였다. 한편 고종 5년의 정덕기도 변란을 모의한 이유 중의 하나가 가세가 빈궁하여 과장에도 들어갈 수 없던 처지를 절통한 사실에 있었다 하여 엽관적 측면을 일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필제도 “京司가 부모의 평생소원”이었고,758)≪捕盜廳謄錄≫하, 신미 8월, 鳥嶺逆謀事, 568쪽. “大明太祖도 처음에는 乞兒 3백여 명이었으니, 사람의 일을 어찌 모두 알 수 있겠는가”759)≪捕盜廳謄錄≫하, 기사 4월, 梁柱東供.라고 한데서 관직 진출이나 권력에 대한 그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엽관지향성을 가지는 한 사회적 모순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입에 의한 兵禍까지도 다만 조선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재촉하는 징험이나 엽관적 지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만 이해될 뿐이었다. 그것은 19세기 전반의 변란에 잘 나타나 있다. 순조 13년(1813) 성주출신의 향반 백동원은 대마도와 연결하여 변란을 계획하였다가 미수에 그쳤으며, 순조 17년에는 蔡壽永, 安有謙 등이 화적을 동원하는 한편 제주도에 들어가 대마도에 청병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었다. 또한 헌종 2년(1836)에 남응중은 왜에 원병을 요청하여 변란을 기도하려다 체포되었다.760)배항섭, 앞의 글. 여기서는 그러한 외세의 침략에 따라 고통받을 농민이나 ‘민족적’ 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의식도 없다. 이것은 정감록이 농민대중을 끌어들이고 새로운 세상을 창출하는 변혁의 무기로 삼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이다.

 변란 주도층이 농민들과 괴리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은 변란의 주도층이 설정한 목표에서 찾을 수 있다. 변란의 주도층의 목표는 왕조의 타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민인들의 정서나 현실적인 요구와는 괴리가 큰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공허한 구호였다. 일반적인 민란을 통해 볼 때 아무리 악질적이었다 하더라도 지방수령에 대해서도 함부로 구타조차 하지 못한 것이 당시 민인들의 의식세계였다. 따라서 일반 민인들에게 왕조타도의 구호는 오히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황당하기조차 한 ‘흉칙한’ 말이었다. 개항을 하고도 약 18년이 지난 1894년의 고부민란에서도 봉기농민들은 “민요가 월경을 하면 반란의 칭을 받는다”하여 함열로 나아가 전운영을 격파하고자 한 전봉준의 주장에 반대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왕조타도의 구호로 대중들을 변란의 동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들이 일반 민인들을 변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본래의 목표를 숨기고 다른 명분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주로 다른 명분을 가탁하여 돈을 주고 동원하는 방법으로 나타났다. 장차 난리가 날 것이라는 정감록의 兵禍之說이나 새 세상을 창도할 異人이 나타났다는 異人之說을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고종 5년(1868) 장흥에서 변란을 기도한 민회행과 고종 9년 안동에서 변란을 기도한 장혁진은 장례를 치른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동원하였고, 이필제는 진주거사에서 후한 임금을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원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농민들을 동원하는 데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변란 주도층이 변란의 주동력이 될 농민들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하는 기본적인 이유이자 변란이 성공하지 못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가 되었다. 변란 주도층과 일반 민인들의 의식세계에는 적지않은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변란 참가층이 오히려 주민이나 樵軍들에게 체포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761)이필제의 영해란에 가담하였던 정창학은 피신 중에 동민들에 의해 체포되었고(≪嶠南公蹟≫ 4월 26일 鄭昌鶴更推), 조령작변에 가담했던 정해창 역시 거사가 탄로나자 피신했다가 다음날 초군들에 의해 체포되었다(朴周大,≪羅巖隨錄≫, 104쪽).

 이와 같이 변란의 지도부를 이룬 인물들은 사회적 모순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에 더하여 부분적으로는 ‘濟世安民’하려는 뜻을 가지고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랫동안 향촌사회나 생산현장으로부터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지나치게 강한 엽관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그들이 내건 왕조타도의 구호는 당시 일반 민중들의 의식수준에 비추어 볼 때 황당하리 만큼 과도한 것이었다. 이 점은 이들이 정감록을 이념적 기반으로 수용한 중요한 요인이자 생산활동이나 생활현장에서 우러나오는 민중의 정서와 현실적인 요구를 수용하는 데 근본적인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변란은 외형적으로는 민란의 고립성을 극복한 측면을 보여주었고, 중앙권력의 타도라는 높은 수준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끝내 그러한 조직과 이념이 민중과 결합되지 못함으로써 머리만 있고 발은 없는 불구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세기 변란은 몇 가지 점에서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변란의 기도와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해 나가는 단초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선 민란에서 보여주는 폭발적인 힘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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