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3) 동서 신국제관계의 성립:불평등조약 체제
  • (2) 중영 개전과 남경조약의 체결

(2) 중영 개전과 남경조약의 체결

 영국인들이 광주를 떠나 마카오로 철퇴한 직후인 1839년 7월 7일 九龍에서 술에 취한 영국 선원들이 林維喜라는 중국 농민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임칙서는 가해자를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엘리어트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임칙서는 홍콩에 집결하여 있던 영국 선박에 대한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인근 해안지대의 우물에 독물을 투입하여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편 엘리어트는 임유희 살해범들을 재판하여 금고와 벌금형에 처했다. 이는 당시 중국이나 영국 형벌에 비하여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임칙서는 8월에 무력으로 마카오를 봉쇄하고 식량과 연료 공급을 중단하며 그곳에 있던 모든 중국인들을 철퇴시켰다. 마카오에 있던 영국인은 8월말에 대거 홍콩으로 피난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임칙서는 중국에 있는 외국인에 대한 사법권은 중국이 행사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엘리어트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국민을 위해 연해지역에 중국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일방적인 계획이나 요구를 중국측이 쉽사리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고 이 문제는 결국 아편문제와 함께 中英간에 무력대결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이와 같이 양측간에 험악한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9월 4일 엘리어트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구룡에 나타났다. 그러나 현지 관원들과의 교섭이 결렬되고 영국측에서 먼저 발포하여 해안 砲臺와 교전이 벌어졌다. 얼마 후 교역季節이 시작되었는데 엘리어트는 영국상인들은 이에 참가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1월 3일 이 명령을 무시하고 영국상선 한 척이 광주를 향하여 珠江 河口에 들어서자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영국 포함이 威嚇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부근에 있던 중국 艦船들이 영국상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응 발포하여 양측간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영국군함은 순식간에 중국함선 3척을 격침하고 1척을 대파하였다. 임칙서는 다시 영국에 대하여 무역정지를 선포하였다.025)위의 책, 162∼179쪽.

 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영국정부는 중국에 파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투보고를 받고 다음해 1840년 4월초에 중국에 원정군을 파견하기 위한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였다. 정부안은 4월 7일 下院에서 9표 차로 간신히 통과하였는데, 이때 野黨인 保守黨 의원으로 훗날의 名宰相 윌리엄 그래드스톤(William E. Gladstone)은 이를 반대하여 명연설을 하였는데, “그 원인에 있어서 이같이 부정하고 우리 나라에 이토록 영원한 불명예를 가져올 전쟁을 본인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고 읽어본 적도 없다. … 영국 국기는 바야흐로 불명예스러운 밀무역 보호를 위하여 게양되었다”고 했다. 정부안은 5월 12일 상원에서도 통과되었다. 이리하여 원정군은 이미 6월에 속속 현지에 도착하였는데 그 병력은 육군은 보병 3개 연대, 인도 지원병 1개 연대, 유럽인 포병 2개 중대, 공병 2개 중대였으며, 해군은 대포 약 400門을 탑재한 대소 군함 10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선박 10척이 참가하였다.026)坂野正高,≪近代中國政治外交史≫(東京:東京大學出版會. 1973), 162∼165쪽.

 현지에 도착한 영국군은 먼저 광주항을 봉쇄한 다음 북상하여 7월 7일에 舟山列島의 定海를 점령하고, 이어 寧波와 揚子江 河口를 봉쇄하였다. 그리고 다시 북상하여 8월 11일부터 天津에 가까운 白河 河口에 있는 大沽에서 北京이 파견한 直隷총독 琦善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엘리어트는 英國外相 파머스톤(Henry John Palmerston)이 북경정부에 보내는 공식서한을 전달하였다. 이 長文의 서한에서 파머스톤은 임칙서에 대한 비난공격을 늘어놓은 다음 중국정부에 대한 영국정부의 요구를 열거하였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① 몰수된 아편의 대가를 보상할 것. ② 엘리어트를 모욕한 자들을 처벌할 것. ③ 영국에 대하여 군비를 배상할 것. ④ 홍콩을 영국에 할양할 것. ⑤ 중국상인들의 영국상인들에 대한 부채를 변제할 것. ⑥ 양국 관헌간의 대등한 교제를 인정할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이 주로 임칙서 개인을 비난의 대상으로 한 이 서한은 중국의 강경책이 임칙서의 독자적인 결정과 행동에 기인한 것이라는 영국당국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었는데, 이와 같은 견해는 연쇄적으로 영국정부의 의도에 대한 청조당국의 그릇된 판단을 초래하였다. 즉 그들은 임칙서만을 처벌하면 영국인들을 무마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같은 안이한 판단에 따라 琦善은 엘리어트를 甘言利說로 교묘하게 다루어 현지에서 교섭하자고 약속하고 우선 그를 광주로 철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청조는 임칙서를 파면하고 기선을 광동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영국함대에 대한 기선의 상세한 보고에 접하여 비로소 그 실력을 알게 된 북경정계에서는 和平論이 대두했는데 주로 漢人출신 관료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이들도 청조가 임칙서를 처벌하고 무역을 재개하고 아편 대가를 배상만 하면 영국은 만족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해(1840) 11월 말 광동 현지에서 기선과 엘리어트 간에 교섭이 재개되었으나 兩軍 간에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1841년 1월말에 청조는 정식으로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기선과 엘리어트는 양국간 화평을 위한 잠정협정에 합의를 보았는데,<川鼻草約>으로 불리는 이 假協定에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 조항에 따라 영군은 1월 26일 홍콩을 점령하였다. 2월 26일 이 소식에 접한 북경 당국은 즉각 기선을 파직하고 그를 문초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압송할 것을 명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와 같이 청조의 태도가 강경론으로 변한 것은 영국 함대가 천진에서 남방으로 물러가고 화평교섭이 재개되어 영국의 군사적 압력이 완화되자 북경 정계 내에서 다시 주전론이 대두한 때문이었는데 滿人출신 고관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또 고조된 광동 지방의 排英 氣運도 이를 부추겼다. 기선이 실각한 후 1841년 8월 영국정부도 군사적으로 영국에 유리하게 된 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이유로 엘리어트를 해임하고 육군대령 헨리 포틴저(Sir Henry Pottinger)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천비초약>이 백지화되자 즉각 전투상태에 들어갔으나 때마침 진행중이던 무역을 끝내기 위해 쌍방이 3월 20일부터 일단 停戰한 다음 5월 21일에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후 1주일이 못되어 廣州城이 함락 직전의 위기에 빠지게 되자 市 당국이 600만 달러의 대가를 지불하고 점령을 면하였다. 8월 중순에 포틴저가 부임하자 영국군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8월 26일에 厦門을 점령한 다음 10월에는 승승장구하여 定海, 鎭海, 寧波를 차례로 무찔렀다. 영국은 겨울을 지낸 다음 이듬해 1842년 봄에 다시 작전을 개시하여 5월에는 浙江省 해역을 휩쓸고 북상, 6월 하순에는 상해를 점령하였다. 여기서 長江을 溯航하여 7월 21일에는 大運河와 長江의 교차점인 鎭江을 탈취하였다. 이 교통과 전략의 요지를 수비하고 있던 八旗兵 1,600명은 그들 가족과 함께 거의 전멸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운하가 봉쇄되고 江南에서 북경으로 가는 漕米를 비롯한 중요물자 수송을 위한 대동맥이 절단되었다. 여기서 英軍은 남경공략의 준비를 시작하고 최후통첩을 발하였다. 그 기한이 끝나는 8월 14일 南京城頭에 白旗가 올라갔다. 이리하여 양국대표 간에 강화교섭이 시작되어 8월 29일 영국함대 기함 콘윌리스(Cornwallis)號 艦上에서 근대 국제관계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 남경조약이 조인되었는데 헨리 포틴저가 영국을 대표하고 欽差大臣 耆英이 청조를 대표하여 이에 서명하였다.027)아편전쟁의 開戰과 戰鬪의 全過程에 관한 상세한 서술은 Fay, The Opium War, pp.213∼307 참조.

 남경조약은 전문 13조로 된 비교적 간단한 조약인데 그 역사적 의의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후속조치로 중영 양국이 조인한 일련의 추가 협정과 함께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본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① 廣州, 厦門, 福州, 寧波, 上海 5항을 개방한다. ② 公行(洋行)의 무역 독점을 폐지한다. ③ 공평하고 정규적인 수출입 관세를 설정 공포한다. ④ 개방되는 5항에 영국영사를 상주시킨다. ⑤ 중영 양국 관헌은 대등한 입장에서 문서를 교환한다. ⑥ 홍콩을 영구히 영국에 할양한다.

 추가협정에는 다음과 같은 보충규정이 있다.

① 관세율은 쌍방의 협정에 의하여 결정하되 從價 5%를 원칙으로 한다. ② 개방되는 5항에 있는 영국인에 대하여는 영국 영사관이 재판권을 행사한다. ③ 중국은 영국에 대하여 最惠國待遇를 부여한다. ④ 영국은 개방되는 5항에 군함 1척을 상시로 정박시킬 수 있다.028)아편전쟁의 종결에 관하여는 John K. Fairbank, ed.,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Cambridge, England: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8), vol. 10, part 1에 수록된 Frederic Wakeman, Jr., "The Canton Trade and the Opium War,"의 pp.203∼208 참조.

 남경조약은 물론 승전국인 영국이 패배한 중국에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이며, 이는 서방열강이 동아시아 제국에 강요한 ‘불평등조약’의 효시이다. 여기에는 協定關稅, 領事裁判權, 최혜국대우 등 그후 1세기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의 주권을 침범하고 경제적으로 약탈하는데 사용된 모든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규정의 준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砲艦外交’가 보장되어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놀라운 것은 아편 밀무역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전쟁을 종결시키는 조약에 이에 관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청조로서는 물론 도의적으로나 법적으로 아편 밀수를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不正하고 不名譽스러운’ 일을 타국에 강요할지언정 이를 공공연하게 조약으로 합법화하고 정당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양국은 이를 ‘不禁之禁’으로 남겨 두었다. 사실 홍콩을 중국주권에서 분리하여 이를 아편무역을 포함한 동아시아 무역의 총 근거지로 장악하게 된 영국에는 아편무역의 합법화 여부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편전쟁은 결코 아편문제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첫째 19세기 중국인들은 중국은 세계만방의 종주국이고 여타 모든 국가나 민족은 屬邦이나 藩屬이며 이 같은 종속체제 하에서 종주국인 중국의 우위는 절대적이라고 믿고 妄自尊大하였다. 한편 영국인들은 모든 국가와 민족은 大小强弱을 막론하고 동등한 주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들 상호간의 관계는 대등하다고 믿었다. 아편전쟁은 중국인들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적 세계질서와 영국인들이 대표한 서구식 국제질서간의 충돌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둘째 농경사회에서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 아래 살고 있던 중국의 위정자들은 해외무역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고 ‘柔遠’의 정신으로 속방이나 ‘四夷’에 베풀어주는 恩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이미 근대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영국지도자들은 해외무역은 국가 경제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정부는 국민들이 자유롭게 이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무역 논자들이었다. 아편전쟁은 중국통치자들의 전통적인 ‘貿易恩 典論’과 영국 지도자들의 근대적인 ‘自由貿易論’간의 차이에 기인한 충돌이었다. 또한 아편전쟁은 농경사회 중국의 전통적인 ‘商業輕視’와 ‘商人賤視’사상과 산업사회로 들어간 영국의 ‘重商主義’간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분명히 해둬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아편전쟁은 영국이 자국의 신흥 방직공업을 보호·발전시키기 위해 印度방직업을 몰락시킨 다음 인도농민들에 아편재배를 권장하여 그 판매권을 독점하고 이를 중국에 무력으로 강제로 수출하여 자국 식민지경제를 구제하는 동시에 더 중요하기로는 누적되는 자국의 중국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는 근대문명사회에서는 어떠한 文化差異論이나 자유무역론으로도 정당화하거나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부도덕성이나 야만성에 있어서 이는 근세초기의 아프리카 奴隷무역과 크게 다른 바가 없다고 하겠다. 아편전쟁이야말로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社會進化論을 신봉한 서구 제국주의열강이 동아시아세계에서 자행한 침략과 약탈의 출발점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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