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4) 미국의 통상요구

4) 미국의 통상요구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미국의 대외정책을 적극정책으로 주도한 국무장관들로서 1840년대의 웹스터(Daniel Webster), 1860년대의 시워드(William Seward) 그리고 1890년대의 헤이(John Hay) 장관을 들수 있다. 그 가운데 윌리엄 시워드 국무장관은 1868년 上海총영사 시워드(George F. Seward)에게 조선과 미국간에 통상조약을 체결하도록 권한을 부여하였다. 죠오지 시워드 총영사는 윌리엄 시워드 국무장관에게 셔먼(Sherman)호 사건을 조사하고 통상조약을 체결한다는 2개의 목적을 가진 원정을 제의하였다. 그의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새로 부임한 피쉬(Hamilton Fish) 국무장관은 1870년 4월 20일 로우(F. F. Low) 북경공사에게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그랜트(Grant) 대통령의 서한을 동봉하면서 조선과의 조약체결은 난파선의 구조·보호를 확약하는 통상조약으로 할 것과 교섭을 위해서는 제독을 동반하여 무력시위를 하도록 하였다.061)薰德模,≪韓國의 開國과 國際關係≫(서울대 출판사, 1980), 52쪽. 그러나 이때의 수교교섭은 양국간의 전쟁을 가져온 신미양요로 끝나게 되었다.

 1878년 4월(고종 15년 3월) 東洋貿易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캘리포니아(California) 출신의 사전트(Aaron A. Sargent) 의원은 上院에 조선과의 수교 교섭 추진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하였다. 이 결의안은 일단 부결되었지만 그 내용은 당시 미국의 지도급 인사가 조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건이다. 시전트는 이 결의안에서 조선과의 교섭의 필요성을 난파선원의 구조와 通商 외에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한 전략적 목적에 두고 있다.062)韓佑劤,<Shufeldt 提督의 韓美修好條約交涉推進緣由에 대하여>(≪震檀學報≫24, 1964).

 1879년 미국정부는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에게 조선과의 교섭에 관한 권한을 부여하여 파견하였다. 미국은 조선과의 교섭을 위해 먼저 일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의 이름으로 釜山에 있는 일본 영사에게 슈펠트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 주었고 슈펠트는 이를 가지고 1880년 5월 4일 부산에 입항하였다. 다음날 일본 영사 콘도마스케(近藤眞鋤)는 東萊府使를 방문하여 미국이 조선과 수교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美國國書를 중앙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동래부사 沈東臣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곤도영사에게 보낸 훈령 중에는 미국사신이나 조선정부가 도움을 청하면 ‘中立’을 지키며 ‘使事의 성취를 贊助할 것’이며 조약은 ‘困難民 救助’의 사항에 그칠 것이고 통상무역의 문제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 “目下 安定을 보장하는 길이다. 잘 주의하여 이를 다룰 것”을 다짐하는 지시도 포함되어 있었다.063)≪日本外交文書≫권13, 420∼425·426∼28쪽.

 일본의 중재를 통한 교섭이 실패하자 슈펠트제독은 일본으로 돌아가 東京駐在美國公使 빙햄(John A. Bingham)과 함께 外務卿 이노우에 카오루를 찾아가 다시 한번 조선과의 수교를 알선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노우에 카오루는 조선의 예조판서 앞으로 公翰을 발송하여 “宇內의 大勢는 옛날과 달라 금일에는 鎖國이 지켜질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일본이나 청국 모두 알게 되었고, 오늘날 조선이 도모해야 될 일은 저들의 청을 들어주는 일이며, 만약에 들어주지 않아 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그 피해는 매우 클 것이다”라고 하였다. 釜山領事 곤도마스케는 이 서한을 예조판서 尹滋承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윤자승은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는 金弘集을 통해 이노우에 카오루에게 西洋諸國과는 통교하지 않는다고 미국과의 수료를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측 國書는 개봉도 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빙햄공사는 또 다시 이노우에 카오루 외무경에게 알선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이 미국의 알선요구를 거절하자 淸國이 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즉 슈펠트가 나가사키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슈펠트의 나가사키 체류 목적을 탐지한 나가사키 駐在 淸國領事 余瓗이 이 사실을 이홍장에게 보고하였고 이홍장은 1880년 7월 24일(고종 17년 6월 18일)부로 슈펠트를 천진으로 초청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홍장의 초청을 받은 슈펠트는 天津으로 가서 8월 26일 (음 7월 21일)부터 이홍장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이홍장은 한미 교섭을 청국이 알선할 용의가 있음을 약속하였다.

 1870년대 말 청국은 강화도조약 체결 후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러시아의 南下를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청국은 伊犂국경분쟁 문제로 전쟁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 처하였다. 따라서 청국은 以夷制夷의 책략으로 조선으로 하여금 西洋諸國과 수교토록 하여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홍장은 1879년 8월 李裕元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이 미국과 수교하도록 권고하였다. 이에 대해 이유원은 謝恩兼冬至正使 韓敬源을 통해 미국과의 수교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서는 청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경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일본의 고급관리도 修信使 金弘集 일행에게 기회 있는대로 러시아를 경계할 것을 권고하였다.

 1880년에 들어와서는 조선정부의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미국과 수교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 까닭은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동경에 체제하는 동안 駐日淸國公使 何如璋, 參贊官 黃遵憲 등과 여러 차례 회담을 하면서 국제정세, 특히 러시아의 남진위협에 대한 이해를 높였으며 일본의 외상도 러시아의 위협에 관해 경고하였다. 특히 황준헌은<私擬朝鮮策略>을 귀국하는 김홍집에게 주었다.<朝鮮策略>은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이이제이의 책략으로서 “親中國·結日本·聯美國 하여 防俄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이었다. 黃은<조선책략>에서 미국을 영토에 야심이 없는 공평무사한 나라이고 타국의 政事에 관여하지 않으며 약소국을 돕는 나라로 소개하였다. 김홍집은 귀국 후<조선책략>을 국왕에게 바쳤고 국왕은 李最應 등 정부의 고위 정책 결정자들에게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방금 천하 각국이 合縱하지 않음이 없을 뿐 아니라 我國은 海路要衝에 처하고 있어서 미국과 聯交하는 것이 良策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건의하였다.064)≪承政院日記≫, 고종 17년 9월 8일. 국왕은 미국과 수교를 하기 위해 李東仁·卓挺埴 등을 비밀리에 何如璋 공사에게 파견하는 등065)李光麟,≪韓國史講座≫Ⅴ近代編(一潮閣, 1981), 102쪽. 미국과의 수교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보수적 유생들은<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면서 미국과의 수교를 반대하였다. 이른바 위정척사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伊犂國境분쟁으로 인한 러시아와 청국간에 긴장이 완화되면서 이홍장의 태도도 韓·美 조약체결의 알선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1882년에 들어와서 수교를 위한 교섭이 활발하게 진전되어 1882년 5월 20일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禹澈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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